장애인은 후견인 없이 금융업무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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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대출 거부한 금융기관
지난 7월, 시각장애인 A씨는 정부 지원 대출 신청을 하기 위해 안양원예농협을 방문했다. 대출 신청을 위해 작성해야 하는 서류를 받은 A씨는 동행한 활동보조인의 도움으로 서류 작성을 해나갔다. 처음에는 펜을 쥔 A씨의 손을 활동보조인이 붙잡는 방식으로 써내려갔지만, 작성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서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항들은 활동보조인이 작성하고 서명란 위치를 A씨에게 알려줘 A씨가 서명을 하는 방식으로 서류를 작성했다. 일부 도장으로 서명을 대신할 수 있는 부분은 도장을 사용했다.
완성한 서류를 받은 창구 직원은 “자필 작성이 아니면 대출이 어렵다”, “나중에 약관 내용에 대해 몰랐다고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직원의 반응이 긍정적이지 않자, A씨는 직접 대출 의사를 녹취하거나, 활동보조인을 수임인으로 위임장을 작성하는 등의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A씨는 처음 작성한 서류를 그대로 제출하고 돌아와 결과를 기다렸다.
A씨가 안양원예농협을 방문했을 당시 응대했던 창구 직원은 A씨가 돌아간 뒤, 상급기관인 농협중앙회에 A씨의 서류 처리에 대해 문의했다. 농협중앙회에서는 A씨의 사례를 듣고 후견인 지정에 대한 답변을 내놨다. 안양원예농협 직원은 농협중앙회의 답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날 저녁 A씨는 대출 서류를 자필로 작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있으며, 후견인을 지정한 뒤 후견인이 대필해야 대출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장애인 차별 만연한 금융권
A씨의 사례와 같은 금융권 내에서의 장애인 차별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대출 뿐 아니라 카드 발급 거부나 보험가입 거부 등 다양한 사례들이 알려진 바 있다. 한국지적발달장애인복지협회 송남영 실장은 금융권 전반에서 장애인이 거부 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기본적인 통장 개설에서부터 체크카드 발급, 보험, 대출 등 일부 상품이 아닌 금융상품 전반에서 장애인들은 불편을 겪고 있다. 방문해서 상품을 이용하려는 과정에서 조금만 매끄럽지 못하면 바로 그 사람의 사무처리 능력을 의심한다. 본인 명의의 통장을 본인이 직접 와서 만들겠다고 하는데도 진행이 잘 되질 않는다. A씨의 사례와 같이 의사소통 능력에 문제가 없는 시각장애인도 거부 당하는 상황에서 의사표현이 어려운 장애인들은 더 쉽게 차별에 노출될 것이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7조는 “금융상품 및 서비스 제공자는 금전대출, 신용카드 발급, 보험가입 등 각종 금융상품과 서비스의 제공에 있어서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을 제한·배제·분리·거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이하 희망을만드는법) 김재왕 변호사는 “A씨의 사례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7조 외 제20조, 제15조 위반”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이같은 사건은 장애인이 금융서비스를 받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지 지침이 없거나 지침이 있다고 해도 직원들이 관련 내용을 숙지하지 못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장애인인권침해예방센터(이하 인권센터)는 A씨의 사건을 접하고 공익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피고는 안양원예농협과 농협중앙회이다. 인권센터는 지난 8월 11일, 차별구제소송 소장을 제출한 상태다.
후견제도에 대한 몰이해
A씨의 사건을 중심으로, 후견인 제도에 대한 몰이해와 장애인을 무능력자로 보는 차별적 시선도 지적됐다. 한국지적발달장애인복지협회 송남영 실장은 “성년후견제도는 모든 성인에게 의사결정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제도이지만, 해당 창구 직원은 이에 대한 이해없이 장애인은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후견인 동행을 요구했다”며 “금융권이 후견제도의 이름만 알고 의미를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민법에서는 질병, 장애, 고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특정 사무에 관한 처리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사람에 대해 심판을 통해 후견을 개시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시각장애 외 어떠한 정신적 장애도 가지고 있지 않은 A씨에게 후견인은 불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해당 은행은 A씨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금융 관련 업무를 할 능력이 없다고 간주하고 후견인을 요구한 것이다.
은행 외에도 후견인을 요구하며 장애인의 요구를 거절하는 경우들은 적지 않다. 지자체 공공기관 등에서 특정 서류를 발급 받을 때에도 후견인 제도는 장애인의 용무를 가로막는다. 실제 후견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송남영 실장은 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후견인 제도가 되려 장애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민센터에서의 사례가 가장 빈번하다. 얼마 전에도 피후견인이 인감증명서 발급 거부를 당했다고 연락이 왔었다. 주민센터에서 후견인을 데려와야 인감증명서를 발급해주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피후견인이 성인이고, 부모와 동행했음에도 후견인이 요구됐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해당 주민센터 직원, 그 직원 상급자 등에게 전화를 통해 설명을 해주고서야 인감증명서가 발급됐다. 후견제도는 필요한 사람만 이용하는 제도인데, 기본적으로 제도 취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모든 장애인에게 후견인이 필수적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문제다.”
매뉴얼 제작, 교육 실시 시급
A씨의 사례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시급한 것은 금융기관 및 공공기관 일선 직원들에게 배포할 수 있는 매뉴얼 제작과 이를 바탕으로 한 교육 실시다. 인권센터는 A씨의 사례로 진행되는 공익소송 소장을 제출하며, 장애인 금융차별에 대한 재발방지 대안과 조직 구성원 대상 인권교육 등을 요구했다.
동시에 김재왕 변호사는 인권센터가 진행하는 공익소송을 통해 “해당 금융기관 외 전반적인 금융기관에서의 동일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송남영 실장 또한 “이번 소송이 후견인 제도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을 없앨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금융위원회는 올해 2월 ‘장애인 금융접근성 제고를 위한 간담회’를 개최하고 ‘장애인 금융이용 실태조사’를 추진하는 등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는 상반기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9월 중 장애인 금융접근성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9월 중 종합대책을 발표한 뒤, 재발 방지를 위한 확실한 교육을 진행하려 계획 중”이라며 “이 부분에 대한 교정 작업은 꾸준히 추가적으로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조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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