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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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후천적 장애인이 80퍼센트가 넘습니다. 우리 모두 예비 장애인입니다. 장애는 남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보정당의 정치인의 연설 내용 중 일부다. 장애인복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나온 말이다. 걸음이 멈춰졌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연설은 ‘장애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전국 장애인 수는 272만7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5.6%며, 이 중 후천적 장애인의 비율이 88.9%다. 병(56.2%)이나 사고(32.7%)가 원인이라고 한다.
장애를 만드는 사회에 맞서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장애문제에 접근하면, 장애에 대한 구조적 인식이나 공동체적 인식을 제한한다. 먼저 장애를 손상과 동일시해 장애문제를 개인화시키고 개별화시킨다. 또한 장애는 개인의 손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사회구조가 원인이라는 ‘사회적 장애 모델’과 어긋난다. 사회적 장애 모델은 장애는 개별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적 과제이자 공적 해결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
실제 손상이 언제나 바로 장애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그/녀의 몸이 손상됐어도 장애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사고로 신체적・감각적・인지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장애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저상버스가 보편적으로 보급된다면,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된 신체장애인도 버스(대중교통)를 이용할 수 있다.
점자블록이나 점자책이 잘 마련된 도시에 산다면, 병으로 시력을 잃은 장애인도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에 그런 환경이나 서비스가 마련돼 있지 않다면, 장애인들은 이동할 권리의 제한(장애)을 경험하게 되고 공공도서관을 이용할 권리의 제한(장애)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듯 그/녀가 지닌 손상은 그대로지만 어떤 사회냐에 따라 장애를 경험할 수도 있고,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몸이 손상됐기에 장애를 경험하는 게 아니라 특정 사회의 차별(비장애인 중심의 접근권 보장)이 장애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장애문제를 개인화하는 접근은 책임도 개인화한다. 2015년 한 인터넷 언론의 기사는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보건복지부의 장애인실태조사 결과 발표를 근거로 해당 언론은 장애발생예방캠페인 기획연재를 했다. 보건복지부의 발표를 소개하면서 후천적 장애인(중도장애인)이 되지 않기 위해 방법으로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사고예방을 제안했다. 우스꽝스럽게도 장애예방 5계명은 ▵안전벨트 착용 ▵무단횡단 안 하기 ▵아파트 난간, 학교, 놀이터에서 위험한 장난하지 않기 ▵수영장, 계곡, 바닷가에서 다이빙하지 않기 ▵위험한 오토바이 타지 않기다. 기초질서를 지키는 것이나 다이빙하지 않고 오토바이 타지 않기가 장애예방이란다. 장애문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식이다. 장애를 경험하게 한 사회구조의 문제를 짚기 어렵게 한다.
이러한 접근은 장애에 대한 의료적 모델을 당연시한다. 이는 장애를 병리화하고 생물학적 특성(선천적 기질 등을 포함한)이 차별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과 연결된다. 파시즘이 횡행했던 시기에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스웨덴 조차 1950년대까지 정신장애인에 대한 반(半)강제불임수술을 실시했을 정도로 우생학적 시각이 영향력을 펼쳤다. “장애란 인구의 신체적 도덕적 온전함 내에서 하나의 오염물질이며, 그러한 온전함에 대한 위협을 의미한다는 관점”은 장애(발생)를 차단하기 위한 국가정책으로 이어진다. 1919년 미국의 산아제한론자인 마거릿 생어는 “건강한 몸으로부터는 더 많은 아이를,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부터는 더 적은 아이를. 그것이 산아제한의 최우선적 이슈다”라고 선언했다. 장애인이 태어나지 않게 막자는 주장이다. 장애인은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오류’라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오류가 사회를 오염시키지 않아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고 보기에, 장애인의 건강한 사회적 삶은 애초 상정되지 않는다. 누군가 장애인으로 태어나든 비장애인으로 태어나든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정책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당신도 장애인이 될 수 있으니 장애에 관심을 가지라는 논리는 비장애인은 장애문제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고 정당화하는 것 같아 약간 불편하다. 인권문제가 불평등한 구조(권력)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 때, 그 해결의 과제는 당사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은 차별과 억압이 없는 사회를 열망하는 모두가 함께 힘을 보태야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정의와 평등에 대한 감각의 문제이기도 하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당장 내가 차별받지 않는다고 행복할까. 연루된 자로서의 감각은 내가 차별받는 것이 아니어도 타인의 차별을 목도하며 불평등을 경험하게 한다. 우리 중 누군가의 존엄성이 부정될 때(우리에 속한) 나의 존엄성도 부정당한다고 느낀다.
내가 장애인이 될 수 있기에 장애인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연루된 자로서, 평등과 존엄을 원하기에 함께하는 것이면 좋겠다. 물론 장애인이 될 수 있어서 연대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연루된 자로서의 감각이, 차이에도 서로의 존엄을 지키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수자 배제의 논리와 구조는 비슷해
사진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36463157@N08/ |
장애문제를 개인화하고, 의료화(병리화)하는 것은 성소수자 배제의 논리와 비슷하다. 5월 17일은 아이다호 데이(IDAHO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 Transphobia,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990년 5월 17일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했고, 국제사회는 이 날을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로 기념했다.
그 이전까지 많은 나라에서 동성애를 질환으로 보고, 이를 치료한다며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침해했다. 성소수자들을 정신병원에 가두기도 하고, 치료하겠다며 전두엽 절제수술을 하기도 하고, 호르몬을 투여하거나 전기충격기를 사용하는 등의 폭력을 행사했다. 1973년에 미국정신의학회는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국제기구의 규정 삭제까지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일부 반(反)동성애 운동 단체들은 동성애는 질병이라며 전환치료를 주장하고 있다. 작년에 진주의 한 기독집단에서 트랜스젠더를 전환치료하겠다며 가두고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 세상에 폭로됐다. 트랜스젠더는 귀신이 들린 것이기에 축사(마귀를 쫓는 의식)행위를 한다며 폭력을 행사했다. 성적 지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성애와 남성과 여성의 이분화된 성만이 정상이라는 사회는 지속적으로 ‘다름을 병리화’한다. 이렇게 접근하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의 사회구조와 문화는 문제되지 않고 성소수자 개인이 치료되면 해결되는 문제로 탈바꿈된다.
사회적 문제로 보되 차이를 들여다보기
그렇다고 소수자 인권을 다룰 때, 소수자 배제의 사회구조만 보자는 건 아니다. 개인의 경험을 삭제하지 않고, 차이를 무화하지 않을 때 차별은 구체화되고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를 바탕으로 서로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소수자를 배제하는 논리와 사회구조를 봐야 소수자 인권이 사회문제임이 드러난다면, 소수자 개인의 삶을 보는 것은 소수자를 타자화하지 않게 만든다. 병리화는 타자화와 맞닿아 있다.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세상, 장애인이 세상을 만나는 방식을 이해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이 세상을 접하는 것은 비시각장애인과 다르다. 물론 다르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구조와 차별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다. 시각장애인이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면 다름이 어려움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시각장애인은 소리와 촉각과 온도로 세상을 만난다고 한다.
중도시각장애인은 감각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목소리가 들리는 높이로 상대의 키를 짐작하거나 빛이 몸에 비치는 정도로 하루의 시간대를 짐작한다. 비의 굵기를 보지 못하지만 빗소리로 비의 굵기를 느낀다.
선천적 장애인이든 후천적 장애인이든 그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차이가 위계가 되고 차별이 되지 않게 하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될 것이다. 차이를 들여다볼 줄 아는 능력과 감각을 키울 때 그것이 우리를 차별 없는 세상으로 이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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