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가위에 되새겨보는 전통사회 장애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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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가위에 되새겨 보는 전통사회 장애우의 삶
함께하는 세상살이가 던져주던 꼬들꼬들한 재미
옛부터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하던 명절인 한가위가 다가오고 있다. 사회복지의 개념이 싹트기도 훨씬 오래 전, 전통사회에서의 장애우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안동대 국학부의 한양명 교수에게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의 전통사회의 모듬살이와 잡색놀이에 나타난 당시의 장애우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모두가 가난하여 차라리 평등했던 전통사회
우리들이 삶을 영위해온 세상을 유지해온 힘은 무엇인가? 형이상학적인 대답들을 밀어두고, 우리가 관찰하고 느낄 수 있는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그 대답을 마련해 보라고 한다면 인간차별을 들고 싶다.
흔히들 유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될 때 "인간차별 하지 말라"고 언성을 높이거나 분노한다. 이 분노 속에는, 평시에는 자신이 차별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적 삶은 차별을 근거로 이루어져 왔으며 거기로부터 이 사회를 유지하는 힘이 생성, 분출되고 있다. 차별의 실상을 살펴보자.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딸과 아들, 맏이와 막내, 언니와 동생 등의 차별의 존재하며 학교에서는 선생과 학생, 선배와 후배, 우등생과 열등생, 모범생과 불량학생, 일류와 삼류 등의 차별이 존재한다. 회사에서는 사용자와 노동자, 상급자와 하급자, 여사원과 남자사원, 대졸과 고졸사원 등의 차별이 존재하며 범사회적으로는 남녀노소, 빈부, 권력의 유무 진보와 보수 등등의 차별이 존재한다. 무수히 많은 차별을 근거로 일상의 사회구조는 지탱해 간다.
만약 이러한 차별이 무너진다면,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사회는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살이의 관건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고, 그 관계는 그 사회가 설정하거나 용인하고 있는 차별의 정도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차별의 양과 질의 진폭을 줄인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 반대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 수월하게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전근대를 관통해온 전통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익히 알 듯이 전통사회는 양반과 상민, 그리고 천민이 구분된 신분 사회였다. 이 구도 아래서는 특별한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 한 신분의 이동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전통사회는 구조적 차별이 강제된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통사회는 요즘의 사회보다 차별이 심했던 사회인가? 법제적 차원에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모둠살이는 마을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리의 조상들께서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가 태어난 마을을 떠나지 않았으며 모든 생활은 마을 내에서 거의 자급자족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후기에 장시의 발달로 경제활동의 범위가 확대되기도 하였지만 세계의 중심으로서 마을이 갖는 소우주적 성격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사회의 인간관계의 참모습은 마을문화에 대한 이해로부터 파악되어야 한다.
닭 잡아서 이웃 빗기고 개 잡아서 동네 빗기던 그때
전통사회에서 대부분의 마음은 모두가 가난함으로써 평등한 사회였다.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빈농들이었으며 몇몇 양반 부농이 함께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의 운영은 자치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을 의회라고 할 대동회가 연례적으로 개최되어 마을의 대소사를 민주적으로 결정하였다.
한편 가장 중요한 생업인 농사는 두레 조직이 담당하였다. 두레는, 마을의 청장년들이 함께 모여 꾸려낸 노동 결사체로서 집약적 노동이 요구되는 모내기와 김매기 등을 공동으로 수행함으로써 노동 및 토지의 생산성을 극대화하였다. 두레는 호혜평등과 대동의 원칙에 의거하여 운영되었다. 이에 따라서 과부나 소년가장, 병자 등의 사회적 약자에게는 무상으로 노동이 제공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비단 농사뿐만 아니라 마을살이의 모든 면에 적용되었다. 상부상조의 조직으로 두레 말고도 계와 품앗이가 있어서 이웃의 기쁜 일에는 함께 즐거워하고 슬픈 일에는 소매를 걷어 부치고 나서서 물심양면의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하였던 외국 선교사들이 남루한 조선인의 삶 가운데서도 특별히 놀라마지 않았던 것이 바로 곤란에 처한 이웃을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주는 이웃사랑이었다.
안동 지역 속담에 "닭 잡아서 이웃 빗기고(삐치고) 개 잡아서 동네 빗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닭을 잡으면 마땅히 이웃잔치가 되어야 하고 개를 잡으면 마땅히 동네잔치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아무리 형편이 넉넉하더라도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고깃국을 끓여먹기 어려웠고, 정히 먹어야 한다면 이웃 몫까지 끓여서 나눠 먹는 것이 인심이고 마을살이였다. 이웃사촌은 괜한 말이 아니라 혈연적 유대와 진배없던 이웃과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웃사랑에는 차별이 없었다. 유랑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어려운 시기에, 대부분이 병약자였던 걸인들이 아침밥이라도 청하면 방으로 불러들여 밥상머리의 한쪽을 내주는 것이 예사였다. 꾀죄죄한 행색과 더러운 냄새, 장국을 뜨는 손에 덕지덕지 붙은 땟국물 때문에 아이들이 눈살이라도 찌푸릴라치면 혼줄을 내시곤 하던 어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말이 나온 김에 글쓴이가 자라난 마을의 지난 시절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우리 마을 근처에는 음성 나환자 부부와, 그 아들이 살고 있었다. 남편은 거동이 상당히 불편하였지만 늘 웃음을 머금은 뛰어난 상여 앞소리꾼이었다.
그는 소리솜씨뿐만 아니라 뛰어난 재담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술자리의 스타였다. 자그마한 키에 욕을 잘하였던 부인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동냥을 다녔다. 몽당치마를 입고 바삐 고샅길을 훑고 다니다가 혹 아이들이 놀리기라도 할라치면 부러 화낸 표정을 짓던 선한 눈매가 떠오른다. 글쓴이보다 몇 살 위였던 그 아들은 우리와 함께 마을 근처의 초등학교를 마쳤다.
마을에는 이분들 말고도 딱한 이들이 많았다. 그중 정신이상증세를 나타내던 한 분은 늘상 도로 변에 있다가 지나가는 차들 앞에 뛰어들어 누워버리고는 담배 한 개피라도 받고서야 길을 터 주었다.
혹 사연을 모르는 운전수가 화라도 낼라치면 이웃들이 나서서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였다. 역시 정신지체아였던 한 친구는 글쓴이와 동갑이었지만 늘 더 어린 또래들과 놀면서 즐거워하였다. 누구도 그를 업신여기지 않았으며, 혹 아이들이 어린 마음에 놀리기라도 하다가 어른들에게 들키면 혼구멍이 나곤 하였다. 이들까지 포함하여 우리는 모두 한 식구였으며 마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이들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불과 30년 전만 하여도 농촌마을의 모둠살이가 이러하였으니 이웃 사랑의 전통이 더욱 드세었던 이전 시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대동세상이 지상에 드러나던 한가위
글쓴이는 이렇듯이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거나 분리해내지 않고 감싸안으며 모두가 크게 하나되어 살아가고자 하였던 전통적 이념을 "대동(大同)"이라 보고 있다. 대동은, 꼭 필요한 구별은 있되 차별은 없는 상태, 평등하고 즐겁게 하나되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전통사회에서 민중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내용을 이루는 정신이었다.
민중들이 꿈꾸었던 대동세상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가 바로 명절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을 통해서, 특히 추석이 민중에게 가장 소망스런 삶의 모습을 닮은 유토피아의 모델로서 인식되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추석이 되면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들에게 정성을 다해서 차례를 지내고 성묘함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의 유대가 새삼 강화된다. 또한 산 자들은 좋은 옷과 맛난 음식들을 서로 나누고 대동의 놀이를 행함으로써 산 자들끼리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이런 가운데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는 평시의 그것보다 훨씬 더 "우리"라는 것이 강조되고 "나" 그리고 "너"라는 차별적 인식이 약화된 것으로서 대동적 인간관계에 다름 아니며 이는 곧 유토피아인 대동세상이 구현되는 것이었다. 아이와 여성, 그리고 가축에 대한 사랑까지를 요구한 동학이나 증산교같은 민족종교에서 상정한 지상의 유토피아도 사실상 이러한 대동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잡색에 장애우는 왜 등장하는가?
이와 연관하여, 추석 뿐만 아니라 매 명절마다 축제분위기를 휘어잡는 풍물놀이의 잡색 구성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잡색은 잘 알 듯이 풍물패의 뒤를 따라 다니는 분장한 패거리다. 탈춤의 앞선 형태로 평가받는 이 놀이패는 보통 양반, 각시, 포수, 곱추와 같은 지체장애우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 가운데 지체장애우가 포함된 까닭은 무엇일까? 단지 사람들을 웃기거나 지체장애우들을 비웃기 위해서일까? 글쓴이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등장하는 연유는, 사회적 배려에도 불구하고 주변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장애우들의 한계, 그리고 그들 앞에 가로놓인 한계를 부정하고 그들의 존재를 공식화하여 장애우 역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대동세상을 추구해 나갈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양상은 여타의 민속현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전통사회의 인간관계는 법제화된 차별적 질서에도 불구하고 모든 구성원들이 차별없이 함께 살아가는 대동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서 오늘날의 사회는 어떠한가? 무수히 많은 차별과 그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우리는 평등하고,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군가가 이야기했거니와 법의 이름으로 위장된 거짓 평등과 기회에 불과하다. 법제적인 신분사회보다도 오히려 더한 인간차별이 발생하고 고착화하고 있다.
여성, 어린이, 노인, 장애우, 가난한 자 등등의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은 시장의 논리 아래 인간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수많은 법이 제정되고 당위적 언설이 지면을 아로 새겼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대우와 괄시는 여전하다. 문제는 법이 아니고 글이 아니고 인식의 공유를 통한 실천이다. 자식이 장애가 있는 친구와 함께 공부하는 것을 꺼리는 학부모로부터 행려자 보호시설의 설립을 가로막는 지역 이기주의, 여성이나 장애우를 위한 정책을 울며 겨자먹기로 인식하는 정책결정자들에 이르기까지 지금 우리 사회는 오히려 반대동(反對同)의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먹고살기는 좋아졌지만 사람살이의 꼬들꼬들한 재미라고는 남은 게 없다"고 탄식하던 한 할머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사람살이의 꼬들꼬들한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전통사회에서 그 재미는 함께 하는 세상살이에서 왔다. 넘어지면 세워주고 뒤쳐지면 당겨주며, 힘들면 부축하고 부족하면 채워주는 함께 하는 세상살이의 묘미를 조상들께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그러므로 어쩌자는 말인가? 옛날로 돌아가잔 말인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글쓴이는 전통사회를 황금의 시대로 보고 있지도 않거니와 맹목적 회고주의에 빠져있지도 않다. 전 근대사회가 수많은 모순과 병폐를 안고 있었지만 차별없는 대동적 인간관계를 지향하던 올바른 정신은 되새겨 보고 우리들 각박한 세상살이에 참고하자는 것이다. 마침 원만구족의 보름달이 동천에 떠오르고 우리 마음에 전통의 시내가 되살아 흐르는 한가위가 저만큼 다가오고 있으니…….
글/ 한양명 (안동대학교 인문대학 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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