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필요해요] "제게 발을 달아주실 분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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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필요해요]
"제게 발을 달아주실 분 없나요"
신문가판으로 생계 이어가는 강쌍운씨
한 달 수입 30만원
지하철 8호선 문정역에서 신문가판업을 하고 있는 강쌍운(뇌성마비·29)씨. 그에게는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웃음이다. 쌍운 씨는 신문 한 장을 팔면서도 꼭 "감사합니다"란 인사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인사와 더불어 환한 미소를 짓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아주 환한 웃음.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생활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강쌍운씨는 어려서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게 됐다. 장애 정도가 심해 식물인간처럼 천정만 바라보고 말도 못했던 그가 이렇게 건강해져 신문가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주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는 혼자서는 이동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 한다.
그는 지금 마천동에 살고 있는데, 이웃에 사는 벧엘의 교회 박성호 목사는 매일 아침저녁 쌍운 씨의 운전수 역할을 자청해 오고 있다. 또 매달 전기세도 대신 내준다. 쌍운 씨는 자신보다 더 수입이 적은 박 목사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늘 미안할 따름이지만 달리 도리가 없어 받기만 하는 신세다.
쌍운 씨는 요즘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현재 살고 있는 월세방이 너무 낡아 내년 봄이면 헐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딱히 갈 곳이 없는 그의 입장에서는 어디로 방을 얻어 가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주위에서는 신문가판대를 운영하면 그럭저럭 살만 하지 않느냐고 말들 하지만 그 말이 강쌍운씨에게는 답답증만 더하게 할 뿐이다. 처음에는 그도 신문가판을 하면 돈을 번다는 얘기를 듣고 이 일을 시작했지만 현재 하루 수입 1만원을 넘기기 힘든 게 현실이다.
"올 초 신문단가가 오르면서 수입이 거의 반으로 줄었어요. 예전에는 스포츠신문 한 부를 팔면 240원을 저희들이 가졌는데 지금은 160원을 저희가 갖고 240원은 신문사가 가져가요. 하루에 평균 신문 70부를 파는데 수입은 고작 1만원 정도밖에 안돼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신도림역은 그래도 하루 매상이 십만원이 넘는다지만 이제 생긴지 채 1년이 안되는 8호선에는 다니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그런 차이를 조정하기 위해 신문가판대의 계약금도 역마다 5백만원에서 2백만원까지 차이가 있다. 물론 문정역의 계약금은 2백만원으로 가장 싼 편이지만 그 돈마저 마련하지 못해 급한 대로 돈을 꿔서 계약하느라 매달 원금 16만원씩을 갚아 나가야 한다. 빌린 돈을 갚다보면 14만원이 남는데 그 돈으로 월세 10만원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 저축은 꿈도 못 꾼다. 다행히 쌍운 씨는 생활보호대상자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작은 액수의 생활비가 나온다. 그 돈으로 겨우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돈도 안남는데 뭐하러 신문가판 일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쌍운 씨가 가판을 하는 이유는 장애우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의 밑에서 일하면서 인간대접을 못 받고 사느니 구멍가게 사장이라도 좋으니 남의 눈치 안보고 속 편히 살고픈 장애우의 그 심정을.
소중한 사람들 있어 외롭지는 않아
▲강쌍운씨-신문가판대에서 |
쌍운 씨는 처음엔 목사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비록 체육이나 실과, 미술시간에는 교실에 혼자 남아 있었지만 그때에도 암기과목이라도 공부하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그는 신학대학에 합격을 했지만, 그의 병을 고쳐보겠다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어렵게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차마 등록금을 대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깨끗이 잊고 돈을 벌기 위해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25세에 시작한 사회생활. 그는 모 재활원 훈련생을 거쳐 장애우 근로시설에서도 잠시 있었고, 금은세공 공장에서도 일을 했다. 하지만 어딜 가나 맛본 건 장애우로서 당해야 하는 차별과 서러움이었다. 그는 "이십대의 나이에 너무나 험한 세상을 겪다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래도 죽지 못하고 버틴 이유는 단 하나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목사의 꿈은 버렸지만 꾸준히 교회를 다녔고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96년 겨울 드디어 강쌍운씨에게 기회가 왔다. 신문가판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는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는 무엇이든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추첨을 통해 그에게 8호선 문정역이 배정됐고, 이후 지금까지 계속 그곳에서 신문가판 일을 하고 있다.
신문가판 일을 한 지도 벌써 반 년이 지나갔다. 물론 벌어놓은 것도 없고, 달랑 몸 하나지만 그래도 강쌍운씨는 지금이 좋다. 신문가판 일을 하면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정역에서 역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주용(32)씨. 문정역에서 오다가다 인사하면서 정이 든 두 사람은 지금은 의형제까지 맺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한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김 씨는 쌍운 씨에게 한약을 지어주기도 한다.
또 가판대 계약금 2백만원을 선뜻 빌려준 경찰 공재철씨. 쌍운 씨와 같이 살고있는 청각장애우 지상렬(23)씨. 지상렬씨는 휠체어도 밀어주고 그가 외로울 때 많은 힘이 돼준다. 또 결혼을 약속한 손영애(34)씨가 있다. 돈이 없어 아직 결혼식을 못 올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녀에게 흰 웨딩드레스를 입혀줄 날이 올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렇다고 신문가판 일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그가 상대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훑어보거나 무례한 태도로 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가 저랑 비슷한 손님들이 "신문 있냐?"고 반말로 말할 때 참 기분이 안좋아요. 또 3백원하는 자판기 커피를 빼마시면서 신문 살 돈은 모자란다고 신문값을 깎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도 그런 사람은 양반이죠. 아무 말도 없이 신문을 집어 달아나는 사람도 있거든요."
반면에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에게는 쌍운 씨는 미리 준비해 놓은 껌을 한 통 선물한다. 큰 것은 아니지만 작은 사랑을 주고받는 그의 삶의 방식이다. 쌍운 씨의 이런 소박함 때문에 한 번 그를 안 사람들은 잊지 않고 문정역 신문가판대에서 신문을 산다.
혼자 출퇴근하기 위해 전동휠체어 필요해
요즘 강쌍운씨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인근 역에서 신문가판을 하는 장애우 동료들이 급한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우면 대신 지켜주는 일이다. 때론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들의 가게를 하루 동안 봐주기도 한다. 그가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지상렬씨와 손영애씨가 대신 문정역에서 가판대를 지킨다.
그러나 신문가판 일을 언제까지나 계속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문정역을 비롯한 제2기 지하철역의 신문가판은 계약기간이 3년이어서 그 이후에는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그래서 쌍운 씨는 요즘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형편이 어려운 장애우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예배도 드리는 공동체를 만들어 벧엘의 교회 박성호 목사와 문정역에서 같이 일하는 지상렬씨, 그리고 몇몇 장애우들을 더 모아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울타리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계획이라기보다 바람에 가깝지만 그는 매일 새벽 4시면 새벽기도회에 나가 이 계획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단다.
기도가 끝나면 박성호 목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문정역 신문가판대로 출발한다. 이렇게 그의 아침이 또 시작된다. 오늘은 또 어떤 만남이 강쌍운씨를 기다리고 있을까?
현재 박 목사의 도움으로 출퇴근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쌍운 씨는 스스로의 힘으로 출퇴근을 하는 데 필요한 전동휠체어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전동휠체어가 있으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사는 게 훨씬 행복해지겠죠."
쌍운 씨는 말 끝에 환하게 웃었다.
글/ 노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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