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1] 헌법재판소에 의해 좌절된 생보자의 인간적인 삶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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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헌법재판소에 의해 좌절된 생보자의 인간적인 삶의 권리
6만 5천원 생계비로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하다고 보는 헌법재판소 판결 납득 안가
생활보호법상의 거택보호대상자인 80대 노부부인 심창섭 부부는 1994년 3월 헌법소원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 정부에서 지급하는 매월 6만5천원의 생계보조 수당으로는 헌법에서 정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제대로 실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정도의 열악한 생계보호수준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내용이었다.
헌법재판소가 그에 대한 결정을 미루고 있는 동안 노부부 한 분은 유명을 달리하였다. 더구나 97년 5월29일 헌법재판소는 마침내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결정을 내렸다. 거택보호대상자에게 지급되는 생계보호기준은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까지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생활보호법상의 생계보호기준만 가지고 따질 것이 아니라 다른 법령에 의해 거택보호대상자에게 지급되는 각종 급여, 부담 감면 등의 내용을 모두 포함해서 판단해 볼 때 1994년도 거택보호대상자 1인에게 매월 지급하는 6만5천원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열악한 수준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헌법재판소 헌법소원 각하
▲생보자-좌절된 인간적인삶의권리 |
94년 3월 심창섭 부부의 헌법소원을 대리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헌법소원심판 청구서를 제출한 바 있다.
"우리 헌법은 우리 국민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구체적인 실생활에 있어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국민의 이와 같은 권리의 보장을 위해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중진에 노력할 의무를 지며, 신체장애우 및 질병 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헌법 이론상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라고 함은 국가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국가에게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 역시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그 보호의 수준 역시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와 같은 헌법정신에 따라 생활보호법은 보호대상자에 대한 보호의 수준을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규정하고 있다."
즉 1994년 당시 시행했던 생활보호법상의 생계보호기준이 헌법상 보장한 생활무능력자들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 주요 골자였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발표한 생계보호기준이 행정조직의 업무처리에 대한 내부적인 지침에 불과하여 국민에게 직접적인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위 생활보호법에 따른 사업지침의 고시행위가 공권력의 행사에 해당되지 아니하므로 위 헌법소원은 제기요건을 갖추지 못한 부적법한 것이므로 각하가 되어야 한다고 답변해 왔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헌법상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구체적인 권리라고 볼 수 없으며, 생활보호사업이 충분한 재정 및 예산상의 여건이 확보된 뒤에 가능한 것이므로 국가의 재정사정 등을 고려하여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야 하므로 보호수준과 최저생계비와의 단순비교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위 고시행위로 인하여 기본권이 침해된 바가 없기 때문에 기각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답변을 하였다.
생계보호급여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다툼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생계보호기준이 대외적으로 직접 효력을 가지고 공무원의 생계보호급여지급이라는 집행행위는 위 생계보호기준에 따른 단순한 사실적 집행행위에 불과하므로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 직접적인 효력을 갖는 규정이라고 판단하였다. 또 명시적인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에 대한 국가의 보호의무, 헌법이 정한 여러 가지 사회권적 기본권 등에 비추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구체적인 권리가 아니라 정부측 견해를 채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위와 같은 생활보호급여청구권의 권리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행복추구권을 침해하였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위 생계보호기준이 헌법에 위반된 것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하였다.
즉, "국가가 행하는 생계보호가 헌법이 요구하는 객관적인 최소한도의 내용을 실현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결국 국가가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함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조치는 취하였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면서 "인간다운 생활이란 그 자체가 추상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그 나라의 문화의 발달, 역사적·사회적·경제적 여건에 따라 어느 정도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가 이를 보장하기 위한 생계보호수준을 구체적으로 결정함에 있어서는 국민 전체의 소득수준과 생활수준, 국가의 재정규모와 정책 국민 각 계층의 상충하는 갖가지 이해관계 등 복잡하고도 다양한 요소들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또 "국가가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헌법적 의무를 다하였는지의 여부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된 경우에는 국가가 생계보호에 관한 입법을 전혀 하지 아니하였다든가 그 내용이 현저히 불합리하여 헌법상 용인될 수 있는 재량의 범위를 명백히 일탈한 경우에 한하여 헌법에 위반된다고 할 수 있다"면서 "국가가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행하는 사회부조에는 생활보호법에 의한 생계보호 외에도 다른 법령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도 있으므로 국가가 행하는 생계보호의 수준이 그 재량의 범위를 명백히 일탈하였는지의 여부는 생활보호법에 의한 생계보호 급여만을 가지고 판단하여서는 아니되고 그 외의 법령에 의거하여 국가가 생계보호를 위하여 지급하는 각종 급여나 각종 부담의 감면 등을 총괄한 수준을 가지고 판단하여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실망스런 헌법재판소 판결, 재고돼야
1994년 당시 거택보호대상자에게는 생계보호기준에서 정한 매월 금 6만5천원 외에도 월동대책비로 6만1천원, 노령수당 1만5천원, 매월 1인당 3천6백원 상당의 버스승차권이 지급되고 있었다.
상하수도 사용료 감면, 월 2천5백원 상당의 텔레비젼수신료, 6천원까지는 전화사용료가 면제되는 등 각종 급여부담 감면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매월 금 6만5천원의 보호급여가 일반 최저생계비(헌법재판소가 판시한 1994년도 1인당 최저생계비는 대도시의 경우 월 19만원 정도, 중소도시는 17만8천원, 농어촌은 15만4천원이다)에 못미친다 하더라도 그 사실만으로 노부부의 행복추구권이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헌법재판소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에 반대하는 헌법재판관은 단 1명도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와 같은 헌법재판관들의 판단을 건강한 상식을 가진 국민을 납득할 수 있을까.
예로부터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속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복지국가관에 비추어 볼 때, 과거와는 달리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들에 대한 문제가 자본주의 경제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문제로서 그들에 대한 보호의무를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으며, 하위법인 생활보호법 역시 생활보호수준을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1인당 19만원 정도가 최저생계비라고 판시하면서도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의 경우 6만5천원 정도의 급여로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으로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인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사회권적 기본권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인식이 정녕 그 정도에 그치는 것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에서 원용한 1인당 최저생계비 19만원이라는 통계도 과연 정확한 것인지 우선 의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생활보호대상자들이 생계보조수당 외에 정부로부터 각종 급여나 부담금을 감면받는다고 했지만 그것을 금액으로 환산할 경우 대략 금 8만2천1백원 정도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최저생계비의 43% 정도에 해당하는 보호수준으로도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의 경우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행사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으며, 생활보호법에서 정한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 경제규모도 세계 10위가 될 정도가 되어 선진국들의 집단인 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였어도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들의 경우 그것은 자신들의 잔치가 아닌 남들의 잔치에 그치고 만다. 그렇기에 심창섭 부부와 같은 생활보호대상자들은 더욱 더 자신들의 삶이 서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결국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수준은 정책의 반영일 수밖에 없으며, 그와 같은 정책은 결국 사회복지의 실현을 노력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회복지를 위한 투쟁으로서 달성되는 것임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도 헌법재판관들의 헌법의식이 개선될 때까지 제2, 제3의 심창섭 옹의 외로운 싸움이 계속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글/ 이남진 (변호사,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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