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2002년과 장애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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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2002년과 장애우 운동
월드컵 개최에 가려지고 있는 또 다른 2002년의 의미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은 우리 장애우들에게 아주 의미있는 시기이다. 1981년 "세계장애인의 해"를 필두로 1983년에서 1992년까지의 "아·태 장애인 10년"이 이어지는 이 시기는 장애우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최적의 기회다. 하지만 2002년을 "월드컵"이나 "부산아시안게임" 개최 년도라는 사실 외에 "아·태 장애인 10년"이 마무리되고 "아·태 장애인경기대회"가 부산에서 개최되는 해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만큼 장애우문제는 관심 밖이다. 그것은 이제껏 우리 사회가 장애우문제를 사회 시스템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온갖 병폐들로 인해 "인간환경"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는 이 사회에선 누구나 언제든지 장애를 입을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장애우 중 88% 이상이 후천적 요인으로 장애를 입었다는 통계자료만 보더라도 모두는 예비장애우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장애우문제는 "소수의 그들" 장애우만이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인 것이다. 무엇보다 장애라는 말 자체가 환경과 관련하여 정의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계단 없는 건물, 리프트가 설치된 지하철, 장애우 편의시설이 갖춰진 직장, 그런 사회시스템 속에서는 장애우는 더 이상 장애우가 아닌 것이다. 곧 환경적 장애를 무수히 지니고 있어 장애우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이 사회가 한 인간을 장애우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장애우법의 모범이라는 "미국장애우법"이 장애우문제를 차별금지라는 시민권적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장애우복지의 지향점을 생존권을 넘어 생활권보장에다 두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 장애우복지의 얼굴도 바뀌어져야 한다. 복지분야의 중심이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옮겨가고 있듯, 장애우복지도 대상화되고 수혜적 형태에서 벗어나 장애우현실과 그 생애주기(Life Cycle)의 일반화작업을 통한 사회통합과 주류화를 꾀해야 한다.
사실 장애우가 비장애우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밑바닥에서부터의 사회복지"가 온전히 이뤄져 있다면 장애우를 위한 "특별법"같은 것도 굳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진정 장애우복지의 목표는 "세상 "속"으로 태어난 이를 세상 "밖"으로 내치지 않도록 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모든 공동체문화운동은 장애우사회통합의 핵심과정
그를 위해 우선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지역사회의 장애우문제는 지역사회가 해결한다는 취지에서 지역사회중심의 부양서비스를 확충해야 한다. 그리고 장애우복지정책의 기획과 결정 그 시행과정에는 반드시 그 주체인 장애우들이 참여하여 지역사회가 장애우의 삼의 기반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와 함께 공동체 문화운동에 장애우들이 한 몫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문화를 매개체로 한 심정적 만남을 통해 인간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일어나는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기에, 편견의 벽을 허무는 장애우의 사회통합과정은 우선적으로 "문화의 옷"을 입고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여성(Female)·감성(Feeling)·가상(Fiction)의 3F의 정보화시대는 다름 아닌 문화의 시대로서 이제껏 지배질서 체계에 의해 가려졌던 저변의 부드러운 문화들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풀뿌리 문화운동, 독서운동, 환경운동, 인권운동, 먹거리 및 생활공동체운동 등 다양한 시민운동이 이 사회의 주류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장애우를 비롯한 약자들이 주체적으로 연대해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공동체를 창출하는데 상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장애우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일 뿐 아니라 "인간환경의 인간화"가 이루어진 성숙한 사회로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팔꿈치 사회"를 뛰어넘어 복지사회로
사실 장애우의 문제는 "약자"의 문제이다, 장애우문제가 안고 있는 기본 틀은 "부익부 빈익빈"의 빈부격차, 인종차별, 성차별, 제3세계와 제1세계간의 남북문제, 지역·계층·산업간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사회민주화문제, 민족통일문제, 심지어는 지구 생태계의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의 바탕에 깔려있는 "인식의 틀"과 놀랍도록 동일하다. 그것은 한 마디로 기득권(결국에는 경제적 이권)을 가진 사람들이 약자와 더불어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보아 비정상적인 것(예를 들어 백인에 있어 흑인, 이른바 비장애우에 있어 장애우 등)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의도적으로 창출해내면서 자신들의 폐쇄적 삶과 차별의식을 정당화하고 제도적으로 고착시킨다. 그에 힘입어 "약자"에 대한 편견의 틀은 유지될 수 있고 "약자"들의 삶의 주변화는 더욱 가속화되는 것이다.
누가 이 사회를 서로가 서로를 밀쳐 내는 "팔꿈치 사회"라고 적절히 표현했지만 이처럼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양육강식적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순 없다. 인간은 타인이 만들어 놓은 요람에서 삶을 시작해 타인이 만들어 주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 삶을 끝맺는다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삶의 공동체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의 당위성의 근거는 아주 현실적인 것이니, 곧 보험의 원리이다. 보험이란 누가 피보험자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피보험자가 될 수 있다는 산술적 확률에 의거한다. 즉 보험은 지금 당장 혜택을 입는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 대한 준비로 남을 살림으로써 자신도 살리는 상호부조이다.
선진사회의 시민의식 역시 이와 같은 원칙에 바탕을 두고 그들은 자신을 위해 "공동선"을 추구한다. 이른바 "보살핌의 윤리"의 효용가치와 인권의 공동체성에 새삼 주목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복지문제도 그런 관점에서 모색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OECD회원국이다. G7의 선진국을 꿈꾸는 소득 1만불시대라지만 GDP 대비 사회복지예산비율이 후진국 수준을 헤매고 있다. 국가 생산성 확보의 차원에서라도 인간복지는 실현되어야 하고, 모든 정책은 사회복지를 지향해야 마땅할 것이다.
결국 장애우운동은 "인간"의 문제로 귀착된다. 인간다운 사회에서만이 장애우같은 "약자" 등도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인간"은 필경 21세기의 지배적 담론이요, 징표가 될 것이며 동시에 그런 새 시대의 패러다임은 당연히 "벽(壁)의 구조"를 "장(場)의 구조"로 변환시키는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장애우운동이 우리 사회에 공동체적 삶의 연대망을 구축하는데 첨병이 되어 궁극적으로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시킬 때, 장애우복지의 공간도 온전히 확보될 것이다.
사실 장애우복지야말로 인류 최후의 복지과제이며, 장애우문제는 우리 사회의 선진화의 지표의 핵심에 닿는 문제다. 바로 2002년을 우리 사회가 진정한 선진사회가 되는 장애우복지 선진화의 신년으로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글/ 정중규 (1958년생 소아마비장애우 부산 마리아특수아동조기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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