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사랑방 3] 자유에의 동경과 사랑의 꿈 심어주는 함께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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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사랑방] 독자 이야기1
자유에의 동경과 사랑의 꿈 심어주는 함께걸음
대법원 판결은 서류만으로 이루어진다. 피고인은 그 재판에 참석할 수가 없다. 나는 11년 전에 서울구치소에서 긴장된 마음으로 가족면회를 기다렸다. 재판을 방청한 가족이 내게 달려와서 그 결과를 이야기해 줄 예정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이 면회장에 들어오셨다. 한결같이 경직된 얼굴 표정에서 이미 그 결과가 짐작되었다. 아무 말 없이 머뭇거리던 세 분 중에서 이윽고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씀하셨다.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천당에서 가족들이 다시 다 같이 만나자는 말씀이셨다. 천당에서 가족이 다시 모일 때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하냐는 어머니 말씀에 옆에서 계시던 아버지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리내어 우셨다. 그 날 대법원에서는 나에게 사형 확정 판결을 내렸다.
나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의 일리노이주립대학 정치학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국내에서 학생운동을 해왔던 나는 해외에서도 그 "끼"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두려움을 무릅쓰고 북한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동독과 헝가리의 북한 대사관을 방문하여 여러 날을 묵으면서 민족 통일의 방법론을 놓고 그들과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후에 이 일이 밝혀지면서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간첩"으로 발표되면서 거의 모든 친구들이 내 곁을 떠나갔다. 혹시라도 불이익을 받게 될까봐 몸조심을 하였던 것이다. 친척마저도 우리 집과 발길을 끊었다. 길을 지나가던 아이들이 "간첩집"이라며 집에 돌팔매질을 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사람의 처지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일까? 나의 눈에는 세상이 얼어붙은 얼음덩어리처럼 여겨졌고 그 얼음덩어리 위에서 나는 천애고아의 고독감과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하루하루 나의 신경은 날카롭게 변해 갔다. 사형 집행일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사형 집행 대상자가 미리 고지되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라도 손에 흰 장갑을 낀 교도관들이 여러 명 몰려와서 나의 방문을 열면 일어나서 교수대를 향해 걸어가야 했다. 나의 인적사항을 묻고 같이 찬송가를 부르고는 가차없이 나의 목에 밧줄이 걸리고 나의 몸은 공중에 매달릴 터였다. 운동을 시작할 시간이 넘었는데도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는 기색이 없으면 나의 가슴은 방망이질 쳤고, 냉정하고 쌀쌀맞은 성격의 교도관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온통 웃는 낯이 되어 다정하게 대해주면 나의 가슴은 또 두근거렸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와의 싸움은 생리적 고통이었다.
또한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견디는 것도 참으로 힘들었다. 그들의 눈에 나는 "간첩사형수"일 뿐이었다. 마치 내가 몹쓸 문둥병 환자라고 되는 양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한결같이 혐오의 눈초리를 보내왔고 나를 징그러운 존재로 생각했다. 그보다 더욱 신경을 자극했던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와서 "간첩"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방 안에서 대변을 볼 때도 내 방문을 두드려 눈길을 마주치고는 얼른 사라지는 것이었다.
사형수는 24시간 손목에 수갑을 찬다. 자살과 도주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낮에 기온이 높아서 얇은 옷을 입었으면 그 옷으로 밤의 추위를 견디어야 했다. 두 손이 묶였으니 옷을 벗을 수도 없었다. 밤새도록 추위에 시달리고 난 다음날 아침이면 마음 속의 울분을 가눌 길이 없었다.
수치스러워서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았을 뿐 죽을 때까지 남아있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 중에서는 찾을 수 없고, 동물쪽으로 가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절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분명히 많이 있을 텐데 밖에 있을 때 그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하였던 것이 참으로 후회가 되었다. 너무도 아쉽게 여겨졌다. 아아! 얼마나 바보 같았던가! 별 흥미도 못 느끼면서 시간이 남으면 당구장으로 달려갔던 나 자신의 삶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강당에서 기독교집회가 있을 때 사형수들끼리 모여 앉아서 같이 예배를 본 적이 있었다.
그 후 며칠 뒤에 있었던 사형집행에서 내 오른쪽과 왼쪽 양옆에 앉았던 사형수 두 명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손목에 수갑을 차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으며 나에게 어떤 꿈이 더 남아 있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결심했다. 만일 기적이 일어나서 내게 새 삶이 주어진다면 불행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는 일을 새 삶의 일부로 하겠노라고 사형확정판결을 받은 지 2년 4개월만에 많은 분들의 구명운동 노력으로 나는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고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지금도 12년째 옥 속에 갇혀있는 몸이지만 나는 매달 설레임 속에서 "함께걸음"을 집어든다.
장애우의 휠체어를 비장애우가 미는 모습의 사진은 나에게 자유에의 동경과 사랑에의 꿈을 심어준다. 10년 넘게 사랑의 마음이 영글어왔건만 나에게는 자유가 없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행복감을 안겨준다. 봉사는 봉사받는 사람에게도 좋은 도움이 되지만 봉사하는 사람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나는 따뜻한 정과 사랑을 나누는 기쁨과 즐거움을 그리워하며 자유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함께걸음"이 많은 분들께 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나에게 자유에의 동경과 사랑에의 꿈을 심어주는 그 책의 의미는 또 남다른 것일 것이다.
글/ 김성만
김성만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전주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다. "사형수작사 양심수작곡"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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