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까지 인기척을 기다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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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참정권의 현실적 문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한 기획취재에 흔쾌히 응한 시각장애 1급의 이보훈 씨, 그는 선거(투표) 진행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지역의 시각장애인협회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경험이 있고, 20대 중반에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장애인 등록을 했기 때문에, 비장애 시절과 장애당사자의 현실적 상황을 비교하며 밝히기에도 충분했다. 더욱이 참정권을 갖게 된 이후로 모든 대통령 선거는 빠짐없이 참여했다고 하니, 취재원으로선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시각장애인이 투표소에 갈 방법부터 마련하라
“일단 먼저 언급할 불편한 점은 투표 장소까지 찾아갈 지원이 없다는 거예요. 동네 주민센터에 투표소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편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장애등록이나 복지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곳이잖아요. 내부가 어떻게 생겼고, 어느 정도의 크기이며 어떤 구조물이 있는지를 대강 아니까 찾아가는 건 큰 불편함이 없는데, 이번처럼 처음 가는 고등학교에 투표소가 있다고 하면 난감해집니다.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어야 하거든요.”
서울 외곽지역의 한 전철역에서 만난 그는 동행하는 이가 없이 혼자 움직인다는 가정 하에서, 시각장애인이 투표소를 찾아가는 과정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이번 취재의 핵심 키워드는 ‘인기척’이라는 한 단어가 돼야 할 것 같다. ‘누군가’가 없으면, 또한 현재의 위치와 상황을 알 편의시설이나 안내가 없다면, 말 그대로 망망대해와 마주서야 하는 시각장애인의 현실이 생중계처럼 이어졌기 때문이다.
“자, 보세요. 여기가 학교 교문인데 아무것도 없잖아요. 투표소가 앞쪽에 있다는 건지, 좌우 어디에 있는지 여부조차 저는 알 수가 없어요. 이럴 때마다 제자리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누군가가 다가올 때까지, 그래서 물어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죠. 이렇게 큰 고등학교에 투표소가 있다면, 교문 입구에 진행요원 한 명 정도는 배치가 돼서 도우미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장애를 가졌거나 이동이 불편한 유권자가 저 하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기자의 팔을 잡고 이동하긴 했지만, 교내의 긴 거리를 걷는 동안 이보훈 씨가 투표소를 찾기 위해 참고할 만한 배려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 건물로 들어서니 바닥면 종이에 적힌 ‘투표소 2층’이란 화살표 모양이 전부였다. 시각장애인에겐 무용지물일 뿐이다. 게다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이보훈 씨는 엘리베이터가 있는지를 물었다. 자신이 이용하려는 게 아니라,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중증장애당사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란다. “왜 1층에 투표소를 만들지 않을까요? 강당이든 체육관이든 이동에 불편함을 갖는 유권자들을 위해 얼마든지 배려할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2층과 3층에 투표소를 설치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투표권은 국가가 보장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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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 올라간 그는 기자의 도움 없이 투표소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아무런 표시도 없이 그냥 ‘뻥 뚫린 듯’ 넓은 실내공간에서 그가 택한 방법은 ‘인기척’이었다. 누군가가 있는 듯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이가 있으면 질문하는 방식으로 그는 어렵게 투표 현장을 찾아갔다. 신분증을 꺼내며 시각장애인임을 밝혔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은 ‘저쪽 투표장으로 가세요.’가 전부였다. 도대체 어디가 투표장이란 말인가. 투표를 마친 뒤에도 나가는 길이 어딘지를 알 방법은 없었다. 낯선 고등학교 건물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모든 게 ‘문의’뿐이었다. “조금 전에 보셨듯이, 시각장애인들한테는 ‘투표보조용구’라는 별도의 종이 한 장을 제공합니다. 기표소 안에 들어가 투표용지 위에 올려놓고, 기호와 후보자 이름을 점자로 확인한 뒤 우측에 뚫린 구멍에 맞춰 도장을 찍는 거죠. 그런데 그 보조용구가 너무 얇아요. 그래서 기표할 위치를 찾기가 정말 어렵거든요. 게다가 제가 이 소중한 한 표를 실수 없이 행사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어요. ‘정말 내가 제대로 찍었을까?’ 그런 불안감이 있다는 거죠.” 투표보조용구에 불편함을 느끼는 시각장애인들은 2명의 참관인과 함께 기표소에 들어가서, 참관인이 대신 투표용지에 찍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한다. 반드시 2명이 동행해야 한다. 투표참관인들은 서로 다른 정당 소속이기 때문에, 부정이 발생할 우려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지지난 번 대선까지는 1명만 동행해도 되는 방식이었기에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단다. “제가 ‘O번을 찍고 싶습니다.’ 하고 밝히면, 정직한 사람은 ‘O번’을 찍어줘요. 그런데 ‘OO번’을 찍고서 ‘O번을 찍었습니다’ 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제 참정권이 완전히 도난당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개념이 없을 때가 얼마 전까지 실제 있었습니다.”
어이가 없는 경우는 그뿐이 아니란다. 2명의 참관인이 들어가서 투표를 도와줄 때 그가 작은 목소리로 ‘O번을 찍어주세요’ 하면, 투표를 대신한 다음 ‘네, O번 찍었습니다!’ 하며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참관인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황당한지 아세요? 투표에는 4대 원칙이 있잖아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거기에 1인 1표가 기본인데, 저의 신성한 권리가 기표소 밖에 있는 모든 유권자들한테 공개되는 거잖아요.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 잘 찍었습니다’ 답하는 걸로 끝나요. 이게 뭔가 하면 교육이 전혀 안 돼 있다는 거예요. 선거관리를 하는 진행요원들에게 꼭 필요한 사전교육이 없다는 거죠.”
또한 투표의 문제점은 집으로 배송되는 선거공보물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각 후보들의 공약이 담긴 공보물이 먼저 오고 투표 장소와 유권자 일련번호 등이 담긴 공보물이 두 번째로 오는데, 가장 난감한 점은 후보의 공약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공보물에는 점자로 된 안내지가 함께 동봉돼 있지만, 이보훈 씨의 관점으로는 그게 너무 행정편의적인 형식에 불과하다며 강한 지적을 덧붙였다. “일반적으로는 시각장애인들이 모두 다 점자에 능숙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점자에 익숙한 이들은 선천성 시각장애를 가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후천적 시각장애를 가진 이들한테는 점자가 무용지물이에요. 그래서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음성에 의지합니다. 휴대전화나 센스리더와 같이, 음성으로 정보를 접하는 게 훨씬 빠르고 익숙하거든요. 그러니까 앞으로 선관위에서 공보물을 보낼 때는, 동봉되는 CD 안에 투표 과정을 설명하는 형식적인 내용보다는, 후보자들의 공약을 음성녹음으로 함께 담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각장애를 가진 유권자가 투표소까지 안전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이동지원을 실시하는 시스템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은 지역의 개별 단체에 신청하면 활동가나 자원봉사자가 개인 차원에서 동행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시각장애인의 투표권은 선관위 차원에서 보장하는 게 올바른 방식이 아닐까요? 소중한 참정권 행사에 장애요인이 있다면, 국가가 먼저 유권자의 투표권을 보장하는 게 최선의 대안이자 배려가 될 테니까요.”
그동안 모든 대선마다 국민의 소중한 권리를 지키며 행사해 왔다 했는데, 이번 투표는 어떤 입장으로 임하는지를 물었다. ‘누구를 선택하느냐?’는 ‘기호 몇 번’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가치 앞에 국민의 삶을 맡기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보훈 씨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의미 같았다. “이번 선거는 사실 명확해진 것 같아요. 좌우의 대립을 떠나서, 부패와 반(反)부패의 구도라고 봐야 한다는 거죠. 누가 되든, 몇 번 후보가 당선되든 간에, 국민을 바라보지 않은 세력은 뽑지 말자는 거, 국민을 향한 진정성을 국민이 되찾을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는 거, 그 안에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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