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산업재해로 시드는 꿈, 외국인 노동자들2] 르포/꿈의 나라에서 배운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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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르포/ 꿈의 나라에서 배운 절망
안산 공단 산재 외국인 노동자를 찾아서
신갈 안산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보면 서안산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공장지대와 마주치게 된다.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을 중심으로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신흥공업도시 안산. 그 공단의 거대함 뒤에서 부서지는 "코리안 드림"을 부여잡고 한숨짓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나보았다.
외국인 노동자 안산에만 7-8천명
안산시 원곡동에 들어서자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라는 길다란 플랭카드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플랭카드를 내건 5층 건물에 "안산형제교회"라는 간판 또한 쉽게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교회가 십자가를 내걸고 있는 안산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하는 사람들 "안산외국인상담소", 5층 건물 옥상의 임시사무실이지만 층계 한편 벽에 빽빽하게 영어로 씌어진 상담판이 이곳이 얼마나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의 쉼터가 되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갈 곳 없는 외국인들이 숙식을 할 수 있도록 부엌과 휴식처를 꾸미고 그 옆으로 두 개의 책상이 놓여진 작은 사무실이 안산의 그 넓은 공단지대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같은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곳이다.
마침 이 곳 소장인 박천웅(38세) 목사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알고 싶다며 찾아온 두 명의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박 모사는 성심성의껏 자료를 보여주며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현재 안산에 위치한 공단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는 모두 13만명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 사무직 노동자를 제외하면 모두 8-9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라며 그 가운데 7-8천명에 이르는 숫자의 노동자가 외국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박 모사는 "대전시의 경우 1천 5백명 정도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는 것을 보면 안산이 작은 도시임에도 상당히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라며 "이곳 공단 안에 있는 기업들이 대부분 중소업체이기 때문에 값싼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젊은이들이 돌아간 후 산업재해라는 피할 수 있었던 재난을 업주의 이기심으로 인해 피하지 못하고 타국에서 장애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까지 입게 된 몇 몇 외국인노동자를 박천웅 목사와 함께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외국인 노동자들, 한국에서 맛보는 절망
공단의 규모만큼이나 이곳에서 일어나는 산재 건수는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특히 소위 3D업종이라 부리며 가장 많은 사고를 유발하는 일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기에 안산 곳곳에 위치한 산재병원에서 쉽게 사고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날 수 있다.
박 목사의 안내로 찾아간 곳은 안산서해병원 304호실 병실로 들어서자 4개의 침상 가운데 한개 침상을 중심으로 까만 피부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3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명의 외국인 가운데 한 명이 말쑥하게 차려입은 옷에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었고 박 목사는 이 사람이 통역을 해 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304호실 침상의 주인공은 "한난(M.D.Hanon Malla)"(27세)씨, 박 목사는 상담일지를 펴들고 먼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방글라데시인인 그는 96년 3월 24일 국내에 들어왔다. 이미 4년 전 한국에 들어와 고국에 있는 11명 가족들의 생활비를 대고 있었던 형 "조니(M.D. Shohydul Malla)"와 함께 돈을 벌겠다고 한국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꿈은 너무 빨리 깨어져 버렸다. 고향의 땅을 팔아 마련한 640만원을 브로커에게 지불하고 어렵게 한국에 건너와 인천의 한 기계제조공장에 취직한 그는 정확히 근무를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내려치는 프레스를 피하지 못했고, 결국 오른손 엄지손가락만 남긴 채 4개의 손가락을 잃게 되었다.
"기계 작동법을 잘 몰랐어? 아니며 기계가 이상했어? 기계 작동법은 누가 가르쳐줬어?" 박 목사는 대부분의 기계가 산업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면서 한난씨에게 자세한 상황을 물었다.
"기계 작동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냥 옆에 있던 한 아줌마가 잠깐 가르쳐 줬어요. 그리고 기계가 멈춰야 된다는데 내 손이 들어갔는데도 멈추지를 않았어요." "한난"씨의 대답에 박 목사는 처음 들어온 사람에게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맡기는 곳이 어디 있냐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난 씨의 소식을 듣고 동생을 만나기 위해 안산으로 오던 그의 형 "조니"는 안산역에서 출입국관리소직원에게 잡혀 고향으로 강제출국 당했다.
막내 동생이 10살이고 아버지의 일당 3만원으로 생활하고 있는 가족들, 형은 강제출국 당하고 자신은 다시 일하기 힘들 정도의 장애를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손가락이 잘리기 그 3시간 이전까지도 그에게 한국은 꿈의 도시였다.
"돈벌어서 결혼하고 집 마련하고 가게 마련하고 가족과 다 함께 잘 살아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2차 수술을 끝낸 그는 당장 치료가 끝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며 고개를 떨군다.
한난 씨의 방글라데시어를 통역해주고 있던 아부나세르 아라나(30세)씨는 "한국에서 돈 벌어가지고 돌아간 친구들은 가게를 갖는데 그렇게 되려면 4-45년은 이곳에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라며 하달에 40-45만원정도를 고국으로 보낸다고 했다. "브로커 머니 내고 그 다음에 패널티 내고 먹고 살고 그러니까 3년 되기 전에 잡혀 가거나 다치면 손해를 본 게 됩니다."고 덧붙이는 아라나 씨는 한국에 온 지 4년이 되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해결 되지 않은 문제 때문에 그는 아직 이 힘겨운 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 한국사람에게 발로 채여서 팔이 부러졌어요. 8주 진단이 나왔는데 치료비를 주지 않아 친구들 월급을 빌려서 병원비를 냈습니다."그는 현재 팔에 심을 박은 채 통원치료 중이고 이 날 박 목사와 함께 경찰서에 고소장을 낸 상태이다.
"한국사람 60-70%가 나빠요. 일하면 돈도 안주고 먹을 것도 안주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나쁜 말하고 때리고 너무 힘들어요. 우리나라에서 일할 곳 없어 한국에 왔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아라나 씨는 그래도 따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며 같은 공장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무척 잘해주었고 한국말도 아주머니들이 가르쳐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문제가 해결되면 고국으로 돌아가겠지만 300만원이나 되는 벌금을 낼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온다는 아라나 씨, 친구들의 기숙사를 전전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박 목사는 상담소의 쉼터 열쇠를 그에게 주었다.
아라나 씨의 설명에 따르면 많은 외국인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수많은 부상과 장애를 입고 있다고 한다. 아라나 씨는 손목까지 잘려나가는 시늉을 하며 그렇게 장애를 입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의 회사가 부도가 나버려서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아라나 씨의 한국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 쪽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외국인에게 박 목사가 말을 걸어 보았다. 그도 역시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한국말 할 줄 알아요?"
"몰라요"라고 또렷한 한국말로 대답하는 "아올라도 후세인(28세)"씨는 한국에 온지 이제 7개월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역시 방글라데시 사람인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6년 정도 일해고 주로 국제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7월 9일 무거운 것을 옮기는 도중에 같이 물건을 들고 있던 사람이 손을 놓치면서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 한마디를 잘렸다.
박 목사와 보상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후세인 씨는 자신의 급료명세서를 내밀었다. 실수령액 65만 몇 천원, 하지만 후세인 씨는 그돈에서 2만 4천원을 공제해야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 에이전트 머니, 산업연수생으로 그를 모집해준 쪽에 내는 돈이다. 다달이 2만 4천원 1년에 25만원이라는 돈을 지불하게 된다고 한다. 그가 소개비로 지불한 돈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한국에 올 때 그는 이미 4백만원의 돈을 브로커에게 지불했다.
박 목사는 "현재 출입국 관리법 상 산업연수생이라는 제도 자체가 불법입니다. 그런데도 나라에서는 그 수를 더 늘리겠다고 해 양 국가에 브로커들과 회사들만 서로 얽혀서 다양하게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후세인 씨는 1년 동안 일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았다. 1년 후에 떠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그냥 미소만 짓는다. 브로커 머니 4백 만원을 그는 잘린 손가락을 잡고 다시 일터로 돌아갈 것이다.
산업재해, 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병원을 나서며 박 목사는 외국인 산재사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3D 업종이라는 것에서 가장 산재사고가 많이 나는데 거기서 일하던 한국인들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외국인들이 채운 것 이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지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산재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라며 또한 박 목사는 "자기가 프레스 만지고 일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안할텐데 책상머리에 앉아서 정책을 만들기 때문에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만 계속 다치게 되는 것입니다."라며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3D 업종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실태는 아직 정확히 나온 것이 없다. 사고가 발생해도 상담소로 찾아오지 않으면 암묵적으로 일이 처리되기 때문에 "많다"라고 추정만 할 뿐이다.
"과로사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원인 모르게 죽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결국 그것이 과로사죠. 하지만 아직 이것도 보상 받을 수 있다 라는 인식이 낮아서 대부분 쉬쉬하며 감추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박 목사는 워낙 일이 고되고 잔업이나 철야가 많기 때문에 이런 식의 재해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불법체류라 해도 외국인 노동자가 산재를 당했을 경우 산재보상보험법에 따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불법체류자라는 약점을 이용해 보상을 회피하거나 본인 스스로 강제출국이나 다른 문제를 생각하며 보상을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라며 박 목사는 불법체류 이전에 산재노동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이날 안산 서해 병원에서 만난 한난 씨와 후세인 씨는 다행히 산재보험으로 처리가 되는 기업에서 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적법한 절차에 따라 치료비와 보상금을 받게 된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임금체불과 함께 해결되지 않고 있는 산재보상 문제는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온 "류화(26세)"씨는 손가락이 잘리고도 현재까지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있어 안산상담소를 통해 계속 사장과 합의 중에 있다.
우리는 이미 어둠이 내린 저녁 8시 30분 지금쯤 잔업이 끝날 을 것이라는 박 목사의 말에 따라 반월공단안에 있는 류화 씨의 공장 기숙사로 직접 그녀를 찾아갔다.
잘린 손가락보다 두려운 한국인들
공단의 작은 골목들 안에 크고 작게 위치한 공장들, 그 가운데 콘테이너 박스 몇 개로 이루어진 작은 공장이 보였다. 공장은 한눈에 보아도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세워져 있는 콘테이너 박스로 지어진 간이 기숙사에는 이제 막 일을 끝낸 사람들이 각자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 목사는 공장의 관리사무실로 들어가 "류화 씨 문제로 취재하러 왔다고 일부러 강조해서이야기하며 사장을 찾았다. 몇 번이나 확답을 주기로 약속한 날짜를 어기고 자꾸 피한다는 사장은 이날도 역시 지방출장중이라며 자리에 없었다.
관리사무실 바로 옆 칸이 류화 씨와 그의 남편 반핑퐁(35세) 씨가 생활하고 있는 기숙사이다. 방문을 열자 1평이 조금 너는 방에는 가지런히 이불이 깔려있고 텔레비전 한대와 간이 책상 하나가 간출하게 놓여 있었다.
반핑퐁 씨와 류화 씨는 한국말을 거의 할 수 없다.
박 목사는 통역을 해주곤 했다는 베트남 사람을 찾았지만, 그는 옆 방 관리사무실에서 몇 마디이야기를 나눈 후 이 방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만 남기고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우리는 가능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찾아 대화를 시작했다.
반핑퐁 씨와 류화 씨 부부는 베트남에서 결혼해 94년 산업연수생으로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현재 베트남에는 친정어머니가 4살 된 아들을 키우며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 일년 정도 이 부부는 골프공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면서 베트남에 있는 어머니에게 생활비와 저축할 돈을 보내며 나름대로 안정된 생할을 하고 있었다.
그 후 95년 11얼 광명시에 있는 조그마한 철제 부품 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한달 정도가 지났을 때 류화 씨가 부품을 자르던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이야기가 손가락을 잘린 부분에 이르자 반핑퐁 씨는 그 당시 류화 씨의 급여 봉투를 보여주면서 상황을 더 설명하기 위해 애섰다.
당시 산재를 당한 류화 씨는 14일간 병원에 입원했고, 급여 봉투에는 70%의 월급이 지급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조치는 산업재해처리가 된 것이 아니라 사장의 돈으로 유야무야 처리된 것이었다고 한다.
광명시에 그 공장은 현재의 안산 공단자리로 이사를 오고 류화씨 부부도 함께 이곳으로 옮겨와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그 후에 류화 씨는 치료비를 겨우 받았을 뿐 장애에 대한 보상금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반핑퐁씨는 최근 류화씨의 급여 명세표를 보여주며 9개월 동안 월급을 올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3만원씩 깎이고 있다고 호소했다.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더운 날씨였는데도 류화 씨는 방문을 꼭꼭 걸어 닫았다. 무엇이라고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려움이 담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속에서 현재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베트남 한국어사전을 뒤져가며 "돈벌어 베트남 가면 집사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 것이다."라고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하는 반핑퐁 씨, 손가락의 일부를 잃고 평생 지울 수 없는 장애를 입은 것보다 이들은 그 일로 인해 잡혀가게 될까봐 더욱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코리안 드림은 꿈이다.
류화씨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공장에는 완전히 어둠이 내렸다.
공장 기숙사를 나서며 박 목사는 경계의 눈빛으로 일행을 바라보는 관리사무실 사람에게 "계속 이런 식으로 피하면 언론을 통해 문제를 풀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꼭 연락을 할 것을 당부했다.
류화씨의 문제는 사장이 계속 피할 경우 고발이라는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평균 임금 65만원에서 70만원, 브로커에게 주는 몇 백만원의 돈으로 그곳에서 그냥 장사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왜 굳이 한국으로 오는 것일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서 "코리안 드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꿈이니까" 박천웅 목사는 좁은 땅 덩어리에 1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어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그들을 더많이 이gogo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안산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 고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이제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한난, 잘린 손가락으로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후세인, 매맞아 팔이 부러졌지만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는 아라나, 아기와 미래의 꿈을 생각하며 현재의 두려움을 떨치는 반핑퐁, 류화 부부, 그들 모두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미국으로 향하던 기억하기 싫은 지난날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하죠. 꼭 그런 차원이 아니더라도 살기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사람들입니다. 이전까지 몰랐다면 이제는 그들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함께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라는 박 목사는 "오늘 취재를 통해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을 한 사람 더 얻은 셈입니다."라며 지소적인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했다.
밤 10시가 지나는 시각 "안산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의 박천웅 목사는 다시금 바삐 걸음을 옮긴다. "스리랑카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기숙사인데 오늘 밤에 가기로 약속을 했어요."
다른 피부색과 언어를 쓰는 사람들. 근본적인 동질감은 없지만 나와 피를 나눈 한국인들에 의해 아픔을 겪는 사람들, 박 목사와 같은 뜻으로 일하고 있는 이들은 온 몸으로 그 아픔을 보듬으며 같은 민족이 저지르는 잘못을 지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쁜 한국인과 좋은 한국인, 외국인노동자들이 언젠가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따뜻한 곳이었다고 기억할 수 있게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글 / 김성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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