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이들의 사랑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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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의 위협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나눔의 집 식구들은 느낌으로 알고 있다. 올해 4월에는 완전히 이 곳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또 어디로 떠나야 하는지...
그러나 지금 당장은 나눔의 집 식구들이 옮겨가야 할 장소를 물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 겨울을 어떻게 나야하는지의 문제이다.
▲퇴계원나눔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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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위협 받는 나눔의 집
나눔의 집에 가는 길은 무척이나 한적해서 시골 풍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 사거리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개천이 흐르는 비포장도로를 한참 동안 따라가면 길 끝에 비닐 천막집이 보인다. 현관이 눈에 띄지 않아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알 수 없는 바로 그 곳이 나눔의 집이다.
기자가 나눔의 집을 찾아갔을 때 우연히 비포장도로에서 힘겹게 휠체어에 몸을 싣고 가는 한 장애우를 만났다. 곳곳에 옴폭 패여 있는 구덩이들을 피해 계속 힘겹게 길을 해쳐가는 그는 나눔의 집 식구인 강한석 씨(25)였다. 문방구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활짝 웃는 그의 안내를 받아 15분정도 더 걸어 나눔의 집에 도착하게 됐다.
나눔의 집 실내는 보일러를 깐 온돌방이지만 겉에서 보기에는 영락없는 천막집이었다. 이 나눔의 집은 자원활동자들과 식구들이 함께 지어다고 한다. 그런데 나눔의 집이 서 있는 곳은 남양주시 시유지이기 때문에 무척이나 많은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한눈에 무허가 건물임을 알 수 있는 나눔의 집은 시유지뿐만 아니라 군사보호지역이고, 그린벨트 지역에 세워졌기 때문에 항상 남양주시의 철거 위협을 받으며 살아왔다.
실제로 철거는 매년 일상적인 행사처럼 나눔의 집 식구들에게 찾아왔다고 한다. 1990년 건물을 처음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철거를 당했는데, 허술해 보이는 건물이기는 하지만 정성들여 지은 건물을 모두 부숴버렸을 때 나눔의 집 식구들은 모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당장 갈 곳이 없었던 나눔의 집 식구들은 다시 그 곳에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 이후로도 철거는 계속됐다. 그런데 그 후로는 남양주시가 보낸 철거 용역반들도 철거 당시 나눔의 집 식구들이 처량해 보였는지 절반만 부수고 갔다. 절반만 부수는 것은 형식적으로나마 철거를 했다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나눔의 집 식구들은 이제는 매년 자원활동자들과 함께 무너진 절반의 건물을 다시 세우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남양주시에서 나눔의 집을 철거하려는 것은 단지 나눔의 집이 무허가 건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기에 120ml의 비가 내리면 길옆의 개천 덕에 나눔의 집은 영락없이 물에 잠긴다. 행동이 느릴 수밖에 없는 35명의 나눔의 집 식구들에게 만에 하나라도 인명피해가 있다면 그 책임을 시청에서 져야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철거하려 한다고 한다.
이제는 철거의 위협을 견딜 수 없음을 나눔의 집 식구들은 느낌으로 알고 있다 올해 4월에는 완전히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또 어디로 떠나야 하는지.. 그러나 지금 당장은 나눔의 집 식구들이 옮겨가야 할 장소를 물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 겨울을 어떻게 나야 하는지의 문제이다. 한 달 연료비만도 80여 만원이 들어가는데 돈 마련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바쁜 하루 일과
따뜻한 방에서 훈훈한 온기를 서로 나누는 나눔의 집 식구들은 모두 35명이다. 여자 14명과 남자 21명, 그리고 올해 목사 안수를 받을 예정인 전도사 1명과 교사 2명이, 그리고 남자 직원 2명이 모두 함께 사는 식구다.
나눔의 집 식구들은 근처에 있는 "빛과 소금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루를 시작한다. 그 교회는 장애우가 다닐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혔고, 램프 시설도 돼 있어 다니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새벽기도를 드리고 함께 집에 돌아오면 아침식사를 하고, 그 이후에는 병원행이다. 가족 중의 대부분이 통원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봉고차에 실어 나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식사는 선생님과 자원활동자들이 함께 준비를 한다. 남자 식구들은 예배실에서, 여자 식구들은 여자 숙소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나머지는 자유시간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검정고시반(진학반)과 컴퓨터반으로 나눠 대학생 자원활동자에게 배우거나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소일거리를 잡는다. 모여서 대화를 나누거나 산책을 하거나 자유이다. 그러나 원칙은 있다. 상대방을 귀찮게 하거나 소리를 질러 방해하면 안 된다.
이렇게 자유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식사를 끝마치면 나눔의 집 예배실에서 예배를 본다.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빛과 소금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나면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이다. 뭔가 허술해 보이는 일과지만 나눔의 집 식구들은 나름대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컴퓨터를 치던가, 공부를 하던가, 옆 사람과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없이 하루를 지낸다고 한다.
취침시간, 나눔의 집 숙소는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다 남자들의 숙소는 천막집이지만 여자들 숙소는 온전한 집 한 채이다. 그리고 칸칸이 나뉘어져 있는 남자 숙소에서는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어 식사시간마다 예배실로 이동해야만 한다. 그래서 남자 식구들의 불만이 높다고 한다. "남자 식구들도 배려해 달라"고 말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세상을 잊어버린 듯 바쁜 하루를 보내는 나눔의 집 식구들은 저마다의 뼈아픈 기억을 가슴 저 밑에 묻고 있다. 그렇지만 항상 웃는 얼굴이다. 기자는 식구들의 한을 하나씩 들어보았다.
나눔의 집 식구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신용주 할머니(66세)는 출가한 2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 어머니였다. 2년전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뜬 할머니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일어나려해도 자꾸만 넘어지는 것이었다. 파출부 아줌마에게 계속 일으켜 보라고 하는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흔히 중풍이라고 부르는 뇌졸중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때부터 자식들은 나 몰라라 뒷짐을 졌고, 결국 뇌졸중에 걸린 어머니를 버렸다.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한 교회의 소개를 받아 나눔의 집에 오게 된 할머니는 젊은 사람들 틈에 늙은이 혼자 주책 맞게 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이 집같이 좋은 곳은 없을거야. 그런데 늙으면 죽어야 된다는 얘기 있잖아. 망령이 들었나봐, 심심하니까 애들 먹고 있는 껌이나 사탕 달라고 조르고, 오늘도 아무 일도 아닌데 애들한테 막 화를 냈어,, 좋은 애들인데 말이야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맞아."
계속 죽음을 얘기하는 할머니는 몇 주 전에 딸네 집에 다녀왔다고 한다. 나눔의 집 대표인 박영진 전도사를 졸라 겨우 가보게 된 딸네 집. 그런데 큰 딸 집에서 이틀, 작은 딸 집에서 하루를 대문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대문 밖에서 문 열어주기만을 기다리며 보냈다고 한다. 자식들한테까지 문전박대를 받은 할머니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다시 나눔의 집으로 기어들어왔다는 것이다.
긴 한숨을 내쉰 할머니는 "양로원이라도 알아봐야겠어. 늙은이가 있으니까 애들이 불편해 할 것 같아."라고 마지막 말을 힘겹게 내뱉었다.
할머니만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눔의 집의 막내들 또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국민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는 지혜, 현정이, 경미, 그 중 현정이와 경미는 비장애우이다.
경미는 어느 날 갑자기 엄마에게 장애가 생기자 아빠가 온다간단 말도 없이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생계도 막막하고 살 길이 없어지자 엄마는 경미를 데리고 나눔의 집에 다시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래도 엄마가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하루 종일 "엄마, 이 건 뭐야?", "엄마, 나 숙제 다 했어."하며 엄마를 졸졸 따라다닌다.
이 땅 위에 엄마, 아빠가 버젓이 살아있는 현정이는 혼자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다. 장애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현정이는 그냥 버림받은 아이인 것이다. 현정이의 부모는 이혼을 했다 서로 갈라지면서 현정이를 책임지지 않겠다고, "너 가져라, 너 가져라"하며 물건처럼 취급 받다가 졸지에 현정이를 부모 없는 아이로 만들어 버렸다. 현정이는 가슴에 난 상처는 깊을 텐데도 친구들과 어울리며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가슴 아픈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 지금의 나눔의 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가슴에 묻어둔 슬픈 사연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 식구들은 하나같이 미소를 띠며 웃고 있었다.
야외나들이로 사회와 관계 맺어
나눔의 집에서는 아주 특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일주일에 몇 번씩이라도 바깥세상을 구경하지만 한 달에 꼭 한번씩은 "야외나들이"라는 특별한 날을 가진다. 그 날은 영화도 보러가고, 연극도 보고, 장도 보고, 공원으로 놀러 다니기도 한다.
나눔의 집 대표인 박영진 전도사는 다른 무엇보다 영화나 연극을 볼 때 신경을 더 많이 쓰게 된다고 한다. 아직 사회적인 문화나, 생활을 접해보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 만 생활했던 사람들이기에 사회적인 이해도가 낮다고 한다. 그래서 주로 오락물, 무술 영화를 선택해본다. 그러나 연극은 대부분 어려운 내용들을 다뤄 관람할 생각을 감히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눔의 집 식구들이 조르고 졸라 연극을 보러갔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머리도 빗고, 답답해서 싫다던 넥타이도 매고 차가 오기도 전에 미리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극장 측에서도 휠체어가 들어와서 잘 볼 수 있도록 앞의 의자를 모두 치워주는 고마운 배려도 해주었다. 막이 오르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맨 앞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들 고개가 하나둘씩 땅바닥에 떨어졌다. 연극이 끝나고 눈을 비비며 나오는 식구들은 그 후로 연극보자는 얘기는 절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화나 연극 관람 외에 나눔의 집 식구들이 유독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장을 보러 시장에 갈 때 이다. 이때는 자기가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곁에 있는 자원활동자는 식구들이 어떤 물건을 얼마나 비싸게 주고 사든지 절대 참견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기에 더욱 신이 난다.
장을 본 그 날 저녁 시간에는 모두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자기가 사온 물건을 펼쳐놓고 얘기를 한다. 오늘 자기는 어떤 물건을 샀으며, 무엇 때문에 필요해서 샀는지를 말이다. 처음 그 일을 시작했을 때는 가관이었다고 한다. 지능이 낮은 어떤 장애우는 머리핀을 똑같은 것으로 20개씩이나 사갖고 왔다. 그 날의 얘기는 "머리핀이 그렇게 많이 필요했는가"부터 시작됐다.
그렇게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은 물건 사는 모습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첫 번째 변화는 필요한 것을 필요한 양만큼 살 줄 알게 되었고 장을 보기 전에 사야할 물건들을 생각하는 계획성이 생겼다고 한다. 또, 장을 보면서 물건 값도 깎고 그러면서 사회적인 관계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계속 누워만 지내는 식구들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식구들이 필요한 것을 다 사주는 나눔을 실천하게 됐던 것이다. 점차 나눔의 집 식구들이 함께 산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며 박 전도사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지방 장애우들과 함께 하는 봄나들이
지금 나눔의 집에서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는 다름 아닌 "봄나들이"이다. 다가오는 4월에 지방에 사는 장애우들을 초청해 함께 서울로 나들이를 떠날 계획이라고 한다. 이 행사는 3백명 정도가 모이는 대규모 행사인데, 나눔의 집에서 매년 주관해 치르고 있다. 이 행사를 통해 나눔의 집은 지방에 살면서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못했던 장애우들을 세상 속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봄나들이는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다.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이 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장애우가 그 대상이다.
23살의 어떤 전신마비 장애우는 어머니와 단 둘이 전남 여수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23년 동안 집 밖에 나가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일 나갈 때 고무 함박 속에 들어가게 되고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그 속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그제 서야 고무 함박에서 꺼내어져 그의 몸은 씻겨지고, 그리고 어머니 옆에서 자는 것이 그의 하루였다. 지난해 그는 나눔의 집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봄나들이를 함께 가자는 제안이었다. 그는 대단한 결심으로 봄나들이를 다녀오게 됐고 그 이후 그의 삶에는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친구들이 생긴 것이다. 더 이상 고무 함박 속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일생동안 바깥세상을 구경 한번 못했던 사람들이 봄나들이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이다. 갇혀 있는 사람들 인생의 첫 외출은 4박 5일 동안 서울을 돌아다닌다. 첫째 날, 용인 자연농원이나 과천 대공원에 나들이를 나가고, 둘째 날은 명동과 백화점에서 쇼핑도 하고, 창경궁에 가며, 그 다음 날은 63빌딩에서 서울 시내를 전망하고 고수부지에서 즐거운 운동회를 진행하고, 한강 유람선을 타고, 한국연기자기독신우회와 합동예배를 본 후 그 다음날 아쉬운 작별을 한다고 한다.
나눔의 집 대표 박영진 전도사는 91년부터 시작한 이 행사에 참석했던 지방 장애우에게 매번 안부 편지를 보낸다. "세상으로 나가라. 세상에 나가서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다. 박 전도사는 "장애우 스스로가 자신의 벽을 넘고 나오게 하는 것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생전 처음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모험이죠. 그러나 세상에 나와서 자기가 해야 할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올해 봄나들이는 어김없이 4월에 있을 예정이다. 그래서 나눔의 집은 벌써부터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지방의 장애우들에게 연락하고, 참여하기를 권한다. 이렇게 일찍 연락을 시작하는 것은 집을 떠나 세상 구경을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 끈기 있게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 속으로 나가라
봄나들이에 참석할 장애우들을 설득해 바깥출입을 가능하도록 유도하는 박 전도사는 2살때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 휠체어에 기대어 살아야 했다. 박전도사의 가족은 그가 장애가 있다고 해서 다른 형제들보다 잘 해준다든가, 배려해주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모두 평등하게 대해줘서 박 전도사도 자신의 일은 스스로가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이불을 개고, 방청소도 혼자서 스스로 했다고 한다.
그의 그런 추억이 나눔의 집에도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었다. 나눔의 집에서는 각자 해야 할 책임이 정해져 있다. 그것을 못할 경우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는 일은 절대 없다. 설사 그 일이 조금은 늦어지더라도 그가 일을 모두 끝낼 때까지 참고 기다려준다. 그리고 그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져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스스로 살아있는 생명임을 깨닫고 세상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비장애우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박영진 전도사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이렇듯 어렵지만 희망을 가지고 사는 나눔의 집 식구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하며 나눔의 집을 나섰다. 겨울 햇살이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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