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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장애우들이 모여사는 곳

부활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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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선교회 식구들 대다수에게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없다. 이들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건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는 것이다. 이 작고 허기진 소망마저 버거울 수밖에 없는 현실, 그 냉혹한 현실에 우리 이웃 장애우들은 방치돼 있다. 

 

"수세미장사" 장애우들이 서립한 공동체

  경기도 하남시 동·중부고속도로와 인접해 있는 한적한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부활선교회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장애우 공동체가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말 그대로 기면서 살아야 했던 장애우들이 설립했고, 지금도 소수지만 바닥을 기어서 먹고 사는 장애우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시장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역 부근이나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이들 장애우들을 사람들은 뭉뚱그려 구걸 장애우로 파악한다. 하지만 장애우들이 모두 구걸만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세계에서는 역이나 거리에서 바구니를 놓고 구걸하는 장애우들을 "앵벌이" 혹은 "꼬지" 라고 부르고, 시장에서 바닥을 기며 고무장갑과 수세미 등 생필품을 파는 장애우들은 "수세미장사" 혹은 "기바리"라고 부른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의 동정에 기대 고단한 삶을 이어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들의 세계에서 "꼬지" 보다는 "기바리" 가 상대적인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그냥 구걸만 하느냐, 아니면 물건을 파느냐로 대별된다. 즉 어차피 동정에 기대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냥 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작지만 동정의 대가로 간단한 생필품을 건넨다는 데서 "기바리"를 하는 장애우들은 자신들이 "장사를 해서 돈을 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알기 쉽게 편의상 "기바리"라고 칭했지만 이들은 "기바리"라는 호칭보다는 "수세미장사"라는 호칭을 더 선호하고 있다. 이제는 이들을 "수세미장사"라고 부르자.

  1987년 5월 어느 날, "수세미장사"를 하는 한 아무개씨 셋방에 서로 장사를 하면서 알게 된 12명의 동료 장애우들이 모였다. 모두 기독교인이었던 이들이 모인 목적은 다름 아닌 예매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모두 휠체어를 타는 등 중증의 장애를 갖고 있었던 이들은 간절히 교회 다니기를 원했지만 기존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아 교회를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인 것이었다.

  그날 한 씨 집에서 시작된 이들이 예배는 그 후 동료장애우들 셋방을 옮겨가면서 1년여 계속됐다. 그러다가 한 장애우가 "장애가 심해 옮겨 다니기가 불편하니까 예배도 드리고 친목도 나눌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그때는 한창 주로 기독교 계통에서 장애우 공동체 설립 붐이 일던 때였다. 이 붐에 편승해 그 장애우도 장애우 공동체 설립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제안에 장애우들은 찬성했다.

  그렇지만 가진 것이 없었던 장애우들이 별도의 건물을 마련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때 이들을 돕겠다고 나선 사람이 바로 지금은 고인이 된 김갑순 전도사였다. 이 여 전도사는 당시 장애우 공동체의 대명사였던 신망애 재활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신망애 재활원을 그만두고 나와 이들과 손잡은 김갑순 전도사는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그린벨트지역인 지금의 부활선교회 부근 야산에 비닐하우스 한 동을 치고 "부활교회" 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런데 부활교회를 설립하면서 애초 김갑순 전도사가 생각한 것은 신망애를 본뜬 장애우 수용시설이었다. 그럴려면 간판을 선교회나 공동체로 달아야 했는데 장애우들이 수용시설 보다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을 원했기 때문에 결국 간판은 "부활교회"가 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부활선교회는 부활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공동체가 교회 명패를 달고 있는 것은 설립 취지가, 다시 한번 강조하면 "기존 교회를 다닐 수 없는 중증장애우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갑순 전도사는 장애우들의 뜻대로 부활교회라는 명패를 달았지만 그렇다고 장애우 공동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김 전도사는 비닐하우스에 기거하면서 오갈 데 없는 장애우들을 받아들였다. 그 수가 늘어나면서 부활교회는 점차 누가 보기에도 장애우 공동체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렇듯 사실상 교회 운영권이 김 전도사에게 넘어가게 되자 초기 교회 설립에 참여했던 장애우들은 떨어져 나갔다. 그중에 몇몇 장애우들은 여건이 호전돼 사는 곳 근처의 교회에 다닐 수 있게 돼 더 이상 부활교회에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떨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김 전도사의 독주에 불만을 토로하고 떨어져 나간 장애우들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느 곳에나 있는 이러한 내부 진통을 겪으며 부활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라기보다는 완연히 장애우 공동체의 틀을 갖춘다. 큰 교회의 후원을 받아 땅을 마련하고, 비닐하우스 대신 번듯한 건물을 짓고, 기거하는 식구를 30여 명 가까이 늘린, 완연한 공동체로의 정착은 모두가 김갑순 전도사가 주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김 전도사 1인에 의해 주도되던 공동체 운영이 김전도사가 암으로 사망하면서 초기 설립 취지에 근접하게, 이번에는 수세미장사를 하는 장애우들이 아닌 수용돼 있는 장애우지만, 다시 장애우들 공동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특성상 운영을 주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해체되거나 우왕좌왕하는 기존의 장애우 공동체에 비하면 모범적이 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부활선교회는 27명의 장애우가 투표로 선출한 3명의 운영위원이 공동체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운영위원은 외부 사람이 아닌 공동체 식구들임은 물론이다. 이 운영위원제는 부활선교회가 외부에 유난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즉 다른 공동체와는 달리 부활선교회는 식구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부활선교회의 자랑이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이 민주적인 운영은 운영자 1인에 의해 공동체가 좌우돼 폐해가 많은 소쩍새마을 같은 공동체를 대비시키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장애우들은 위한다는 사람이 장애우를 등쳐먹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이 뼈아픈 경험을 부활선교회 식구들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운영위원제에 집착하는지 모른다. 공동체 식구 김숙희(가명) 씨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이 곳이 처음이 아니라 네 번째예요. 90년에 장애우 공동체에 처음 들어가서 네 군데의 시설을 거쳐서 여기 왔어요. 제가 시설을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장애우 단체가 장애우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장애우를 돈벌이의 도구로 이용해서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거의 전부 다였기 때문이예요.

 

백 번 양보해서 돈벌이의 도구로 이용하는 건 좋은데 장애우를 인격적으로 보호하면서 돈벌이를 하면 좋은데 사람을 인격적으로 짓밟으면서 인권을 유린하는 시설이 거의 다였어요."    구체적인 인권 침해 사례를 묻자 그녀는 "정신지체 장애우들을 쇄지팡이로 후려 팬다든가, 원생들이 실수하지 않아도 원장이 스트레스가 쌓이면 원생을 패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던가, 그러면서 장애우들을 짐승들이라고 불렀어요." 라고 고발한다.

 

이어 "운영자들은 후원자들 앞에서는 천사같이 행동해요. 하지만 원생들은 인간 이하로 취급하죠. 원생들이 먹는 것도 형편없어요. 원생들이 먹는 부식은 주로 시장에서 얻어오는데 야채는 그렇지 않지만 생선은 상한 것을 얻어 와서 장애우들에게 먹여요. 그러면서 운영자 자기는 그걸 먹기 싫으니까 따로 생선을 사와서 먹더라구요. 그런 모습을 목전에서 목격하게 되니까 못견뎌서 시설을 나온 거예요."라고 울분을 토로한다.
  부활선교회는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운영을 책임지니까 적어도 인권 침해 사례는 없어 이 곳이 마음에 든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가족들에게 버림 받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녀처럼 부활선교회 식구들은 거의가 세상풍파에 시달려 짙은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다. 현재 부활선교회에서 살고 있는 27명의 장애우들은 하나같이 가슴에 아픈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다. 장애는 각각 다르지만 마음의 상처는 이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다.

  이들의 상처는 식구들 몇몇을 빼놓고 모두 가족들이 살아있지만 있어도 가족과 상관없다고 혈연관계를 부인하는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족들한테 버림받고, 버림 안 받았다고 해도 가정에서 구박받아 어쩔 수 없이 모여 사는 이들, 그렇다보니 모두들 자신의 얘기를 하기를 꺼린다. 겨우 설득해 들어본 몇 명의 장애우들 얘기는 다음과 같다.

  세 명의 운영위원장의 한 사람인 이옥금 집사(49),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대구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어려서 척추를 다쳐 장애우가 됐어요. 그래도 곧바로 치료를 받아 학교 다니고 생활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그런데 16살이 되던 그 해 겨울부터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어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니까 뇌막염이 겹쳤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계속 건강이 나빠졌죠. 나중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35살 때까지 집에서 있다가 동생들이 크고 그러니까 식구들이 뭐라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형제들한테 짐이 되는 것 같고, 동생들이 결혼할 때 내가 있으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동생들 만류를 뿌리치고 죽어도 혼자 죽겠다고 마음먹고 집에서 혼자 나왔어요.

 

부모님한테서 방 얻을 약간의 돈을 얻어서 나왔는데 혼자 살면서 먹고 사는 건 영세민 혜택 보고 집에서 약간 도와주서 살았죠. 내가 부활교회를 찾을 때는 몸이 굉장히 안 좋았어요. 그렇다고 집에다 다시 들어가자니 내 마음이 허락지 않았고, 그래서 언니가 서울에 살았는데 언니에게 부탁해 장애우 공동체를 알아봐 달라고 그랬죠. 소개를 받아 처음 간 곳은 신망애 재활원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사람이 다 찼다고 받지 않아 이곳에 오게 됐어요. 이 곳에 올 때는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래도 언니 옆에서 살겠다고. 그래서 집에 연락도 안 했어요. 첫날 와서 옷을 정리하는데 내 인생이 불쌍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또 다른 식구 이석형(가명 47세)씨, 그는 열관리 기사로 일하던 15년 전, 암벽을 타다가 목뼈가 부러져서 하반신마비 장애를 가지게 됐다. 장애를 가진 게 죄가 돼 어쩔 수 없이 부인과 이혼하고, 딸은 부인에게 넘겨주고, 두 군데 장애우 공동체를 거쳐서 부활선교회에 오게 됐다.

 

그는 얼마 전, 욕창 제가 수술을 받아 지금 꼼짝없이 누워서 지내고 있다 수술을 받기 전 돌아다닐 수 있었을 때에는 서울 거리를 무작정 쏘다니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다. 그렇게 쏘다니다가 혹시 헤어진 딸아이를 만날 수 있었으면. 아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딸 생각 때문에 미칠 것 같아, 그렇게 하염없이 서울 거리를 헤메고 다녔다고 한다.

 이석형 씨 얘기를 하면서 말끝에 이옥금 씨는 "생전 이석형 씨를 찾아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붙잡고 한 식구가 거든다. "그래도 저 아저씨는 나은 편이에요.  핏줄한테 버림받는 사람도 많은데요 뭘. 형제가 있어도 찾아옵니까, 전화가 옵니까. 대부분 식구들이 그래요." 식구들이 먼저 연락을 하면 될 거 아니냐고 물어보자. "우리가 연락 안 하는게 아니예요. 연락하면 그쪽에서 외면을 하니까 연락을 못하는 거죠. 심지어는 오지 못하게 해서 어머니의 장례식에 못 나간 식구들도 있어요."라고 강조한다. 

 

생계 걱정 심각

 부활선교회에 있는 식구들을 성별로 나누면 남자가 17명 여자가 10명이다. 연령층은 20대에서 50대까지 있는데 30대가 가장 많다. 식구들 중에는 결혼해 나가선 교회 근처에 방을 얻어 살면서 잠은 밖에서 자고 생활은 선교회에서 하는 식구들도 있다. 27명의 대식구들을 돌봐주는 사람은 따로 없다. 운영위원들이 식구들을 돌보고 있다. 다만 운전기사와 주방일 보는 아주머니 건물을 관리하는 집사, 이 세 명은 불가피하게 월급을 주고 고용하고 있다.

 식구들은 뇌성마비에서 전신마비, 그리고 정신지체까지 다양한 종류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일일이 식구들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식구들은 서로 도와가면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 가령 빨래를 내놓으면 세탁기를 돌릴 수 있는 식구들이 대신 빨래를 해주고, 정신지체 장애우들은 움직일 수 없는 식구들의 휠체어를 밀어준다든가 옷을 입혀주고 목욕을 시켜준다. 식구들 중에서 환자가 생기면 움직일 수 있는 식구가 병원에 데리고 가 간호를 한다. 이렇게 어렵지만 서로 돕고 산다. 이들에게 재정적인 어려움만 없다면 사는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다른 공동체도 마찬가지겠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은 부활선교회 식구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식구들의 한 달 생활비는 대략 500만원이다. 이 돈에는 생활비 외에 식구들에게 주는 한 달 3만원의 용돈도 포함돼 있다. 다른 수입이 없는 부활선교회 식구들은 이 돈을 전적으로 교회나 후원자들의 후원금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지금 들어오는 한 달 평균 후원금은 200만원에서 300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가계부는 늘 적자이다. 그러면 나머지 적자는 어떻게 해결할까?

 뚜렷한 해결방안이 없다는 것이 부활선교회의 고민이다.
 "식구들이 능력이 없는 거죠. 오른쪽 손이 성하다고 해도 왼손을 못 쓴다든가. 하반신마비라든가. 그나마 몸이 성한 사람들은 지능이 모자라고. 지능이 정상인 사람들은 몸을 마음대로 못 움직이니 부업거리라도 찾아서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우리가 시도를 안 해 본건 아니예요. 재작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식구들이 여름 한 달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했어요. 악세사리 만드는 일이었는데 그 일을 해서 생긴 수입이 식구 1인당 2만원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 일을 계속하려고 했는데 이 일도 일거리가 없어 그만두어야 했죠."

 궁여지책으로 식구들이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외부에서 김갑순 전도사 같은 운영자를 영입하자는 것이다.  아무래도 운영자가 있으면 지금보다는 낫겠지 라고 식구들은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마땅한 적임자가 없어 이 안도 제대로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 운영자가 되려면 장애우에 대한 관심과 장애우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있어야 하고. 선교회 발전을 위해서 외부로 다니며 후원자를 끌어 모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적임자를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고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식구들은 한숨을 내쉰다.
 그렇다고 부활선교회 식구들이 모두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활선교회에는 현재 수세미장사를 나가는 식구들이 있긴 있다. 다만 그 수는 세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 한 사람 김호성(35) 씨. 그는 "수세미장사도 많이 변했어요. 예전에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했는데 요즘은 한군데 시장에 붙박혀서 하는 추세지요. 사람들은 우리가 돈을 많이 버는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장사 나가면서 기사 월급으로 20만원을 떼주고. 물건값 내고. 일이 힘드니까 며칠 나가 장사해서 벌면은 며칠은 놀게 되죠. 그러고 나면 버는 돈도 별로 없어요."라고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다.

 수세미장사는 아니지만 또 한 사람 조명필(32세) 씨가 있다. 그는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아 무릎으로 기어 다니는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요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울 신설동 고려학원에 나간다. 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맹이었던 그는 3년째 고려학원에 다니면서 국민학교와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지금 대입 검정고시를 앞두고 있다.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신학대에 가서 목회자가 돼서 자신처럼 어려운 장애우들을 돌보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조명필 씨처럼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고 사는 장애우들도 있지만 부활선교회 식구들 대다수에게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없다. 이들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건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는 것이다. 이 작고 허기진 소망마저 버거울 수밖에 없는 현실. 그 냉혹한 현실에 우리 이웃 장애우들은 방치돼 있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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