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장애우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3]르뽀-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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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장애우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3]
르뽀/서울 청계천 8가의 장애우 노점상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떠밀리는 장애우들, 그들은 벅차지만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매서운 바람이 부는 청계천 8가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빠는 왜 동전뿐이야?
"올해는 작년보다 훨씬 더 춥다. 조그만 난로를 갖다 놓았지만 겨울을 나기에는 다 틀린 것 같다. 애들 학비도 벌어야 하고, 집도 장만해야 하는데 이렇게 푼돈 벌어 언제쯤이나 떳떳하게 살아보나..."
성장장애를 가진 김영환 씨(44세)의 하소연이다. 김영환 씨는 청계천 8가에서 다른 장애우 동료들과 함께 노점을 하고 있다. 몹시 쌀쌀한 날씨 때문인가? 김영환 씨는 오늘도 땡쳤다. 오후 4시가 되도록 수중에 들어온 돈은 겨우 5천원 뿐이다. 주머니 사정이 김영환 씨를 춥게 만들지만 거기에 아스팔트 밑에서 올라오는 한기까지 겹쳐 뼈만 남은 김영환 씨의 다리를 더 오그라들게 한다. 추위가 심하면 손까지 오그라들어 물건도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김영환씨는 "재작년까지 구걸을 했어요. 그때는 수입이 꽤 괜찮았지요. 그런데 하루는 일을 마치고 집에 갔더니 국민학교에 막 입학한 우리 아이가 "아빠. 우리 친구 아빠들은 회사 갔다오면 만원짜리가 많은데 아빠는 왜 동전하고 천원짜리 뿐이야?" 라고 묻잖아요."
김영환 씨는 걱정이 됐다. "아빠는 지하철이랑 도로에서 사람들에게 적선 받는 것이 직업이야."라고 솔직하게 얘기해 줘야하나?. 지금 당장 아이에게 거짓말을 한다 해도 언젠가는 알게 될텐데... 아이가 얼마나 실망할까? 김영환 씨와 그의 부인은 중증의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단지 구걸만이 머릿 속을 맴돌 뿐이었다.
김영환 씨는 8살짜리 자식한테 그 질문을 듣고 난 후로는 살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고 한다. "지방으로 옮겨 다니며 구토가 나올까봐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하고 엎드려서 남의 발 밑을 쫓아 기어 다니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어. 그러나 어쩔 수 있나. 우리 세 식구 입에 풀칠하고 살려면..." 그래서 김영환 씨는 꼬박 일주일을 술과 씨름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환 씨는 강변역 근처에서 장애우들이 노점을 차려놓고 장사를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그들은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이하 전장협) 전국노점상연합회(이하 전노련)가 논의해 만든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이하 장자추)의 회원들이었다. 순간 김영환 씨는 "왜 노점을 생각 못했지?" 하며 무척이나 기뻤다고 한다. 당장에 장자추 회원으로 가입하고 청계천 8가에 오게 됐다.
그런데 막상 노점상으로 나서려고 하는 김영환 씨에게 생각보다 어려운 점이 많이 밀어닥쳤다. 김영환 씨가 상상했던 것처럼 일이 수월하게 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근처 노점상들의 텃세가 굉장히 심했다. 김영환 씨가 조금이라도 비집고 들어갈라치면 언제 왔는지 떼구름처럼 노점상들이 몰려와 김영환 씨가 자리 펴는 것을 방해하곤 했다. 그러나 주변 상인들과 한 달 정도를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김영환 씨는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그만 몸집의 김영환 씨였지만 끈기로 버티자 노점상들은 나중에는 질렸는지 더 이상 훼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김영환 씨는 소원대로 청계천 8가의 노점상이 됐다.
그럭저럭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장사 경험이 없다는 것이 어려움으로 떠올랐다. 기본적으로 노점상이 라면 어느 물건이 잘 팔리는지 줄줄이 꿰고 있어야 손해를 안 본다. 그러나 김영환 씨는 아직 경험이 없어 기를 쓰고 떼어온 물건이 고스란히 남아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도 "나도 장사를 하며 산다"고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은 김영환 씨에게 큰 기쁨이라고 한다. 하루 수입이 겨우 천원짜리 몇 장이지만 장사를 한다는 자신감에 단돈 몇 천원도 김영환 씨에게는 대단한 희망이다.
"우리 애 학교에서 가정형편 조사 같은 것을 시키면 이제는 자영업이라고 쓸 수 있고, 우리 아이에게 속이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요. 그리고 내 물건을 파는 것인데 구걸하는 것보다 속이 백배 편하죠." 라며 김영환 씨는 환희 웃는다.
장애우 노점상 시련 속에 자리잡아
현재 청계천 8가에는 김영환 씨 같은 장애우 노점상이 12명 정도 있다. 이들이 청계천 길바닥에 자리를 펴게 된 것은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지난해 3월 8일 노점상 강제 철거에 분신으로 항의한 고 최정환 씨의 죽음을 계기로 모였던 각 시민 단체 중 전장협과 전노련은 최정환 씨 장례가 끝나자 장애우와 빈민의 생존권 보장에 대한 대안으로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게 됐다. 야시장과 구걸을 전전하며 살아가던 장애우들에게 떳떳한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자는 게 장자추의 목적이었다. 장자추의 조직부장인 정태수 씨는 "장애우가 기본적으로 생활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장자추가 필요했다."며 현재 청계천 8가와 강변역, 그리고 인천의 아암도를 중심으로 예비회원까지 30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기본적인 생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노점을 하는 장자추의 청계천 8가 입성은 생각대로 그리 쉽지 않았다. 8월 9일 처음으로 청계천 8가에 발을 들여놓은 장자추 회원 들은 일단 빈자리 1군데서 장사를 시작했다. 이 단 한군데의 자리를 얻어내기 위해 장자추 회원들 20여명은 한 달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회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20여 명씩이나 뭉쳐 있었던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기존의 노점상들이나 주변 상가 사람들의 실력행사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예상대로 주변의 기존 노점상들은 폭력까지 휘두르며 장자추의 청계천 8가 입성을 저지했다. 주변 노점상들이 새로운 노점이 들어서는 것을 극력 반대한 이유는 기존의 노점상들은 행정당국과 묵계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장자추에 따르면 그 묵계는 기존 노점은 단속을 안하는 대신 새로운 노점이 들어올 경우 함께 철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존의 노점상들에게는 장자추 회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만이 자신들의 장사 터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행정당국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불신을 조장하는데 적극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계속되는 기존 상인들의 훼방과 그에 맞서는 장자추 회원들의 싸움에 결국 경찰까지 동원됐다. 지난해 8월 26일 청계천 8가에서는 큰 다툼이 벌어졌고, 그 다툼의 여파로 장자추 회원 26명 전원은 성동경찰서에 연행됐다. 그리고 그 중 3명의 장애우는 업무방해 협의로 구속까지 됐다. 그런데, 기존의 노점상들과 주변 상가 상인들은 단 한 명도 연행조차 안됐던 사실에 비춰보면 형평에 어긋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억울하고 고난에 찬 투쟁 과정을 거쳐 장자추는 청계천 8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지금 청계천 8가에는 장자추 회원들의 노점 6군데가 있다.
편견 견디기 어렵다
그중 한 곳. 청계천 8가가 끝나는 곳에서 가방 노점을 하고 있는 조성남(29세) 씨는 기자에게 대뜸 소리부터 버럭 지른다. "우리 같은 장애우가 어느 직장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뜬금없는 항의지만 그의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항변이다.
그는 버젓이 대학도 나왔다. 그만한 학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지체장애 때문에 취직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조 씨는 단 한번 취직 해본 경험이 있다. 스프링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 공장은 장애우에 대한 문턱을 낮추었으며. 누구든지 일할 수 있도록 공장문을 활짝 열었다고 홍보해서 당장 살 길이 급한 그는 아무 의심없이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공장측 홍보대로 장애물은 없었지만 일이 너무 고되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6시까지는 정규 근무였고, 10시까지 무조건 야간 근무, 일요일마저 쉬지 못하고 특근으로 이어지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만 해야 했다. 재충전 할 여유는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받은 월급이 월 평균 60만원 정도였다. "비장애우도 견디기 힘든 노동 조건이었습니다. 쉽게 피로를 느끼고 무거운 것을 잘 들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배겨날 수가 없었죠." 그러나 고된 노동보다 그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비장애우의 편견이었다. "비장애우들이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내가 느꼈던 시선은 결코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가 일을 잘 못한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이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지쳐버리는 조 씨 스스로는 심한 자격지심을 느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공장을 그만뒀다.
어쩌면 이런 조 씨의 고용 환경은 공장에 고용 돼 있는 많은 장애우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조 씨는 현재 장애우가 취업할 수 있는 곳은 비장애우가 자기 공장은 개방돼 있다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실제로 일하며 적응하는 과정 속에서 장애우는 자의건, 타의건 간에 사회의 턱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조 씨는 주장한다.
"그래도 노점은 남의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춥고 더운 날씨에 적응하는 것 외에는 별 어려움이 없어요. 주변 상인들이 조금만 양보 해주고 서로 도우며 산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죠."
우리는 거리로 내몰렸다
현재 청계천 8가의 장자추를 제외하더라도, 성인장애인협회와 생활이 어려운 장애우들이 거리로, 거리로 나오고 있다. 전국노점상연합회에 따르면 서울만 해도 전노련 회원 중에서 1백명은 장애우들이라고 한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장애우의 취업을 보장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재정된 장애우고용촉진법이 시행된 지도 올해로 6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고용촉진법과 무관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만 있다. 노점상을 하고 있는 장애우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을 가리켜 "거리로 내몰렸다"고 강조하다. "우리는 비장애우 1/3정도의 노동 능력밖에 가지지 않았는데 기술 교육마저 받을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며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한다. 또한 비장애우들의 "이 사람은 일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편견 또한 그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고 싶지만 결국 이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은 노점밖에 없다는 것이 장애우 노점상의 일반적인 현실인식이다.
전노련의 서선정 사무차장은 "노점상을 하는 대부분 사람들의 공통점은 나이가 들었거나, 농촌에서 올라와 할 일이 없는 사람이거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막노동이나 노점상밖에 없는데 대부분이 돈이 조금 들더라도 막노동보다 조건이 조금은 나은 노점을 택한다고 한다. "몸이 불편한 장애우가 막노동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노점을 하면 노점상인들 서로가 도우면서 사니까 막노동보다는 낫겠죠." 서선정 사무차장은 장애우가 노점상으로 나서는 이유를 나름대로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서 사무차장에 따르면 노점상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당국에서 환경미화라는 명목으로 노점상을 무차별적으로 철거하는 것이다. "정부에서 대책을 세워주지도 않고 무조건 철거로 환경미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라고 서 사무차장은 강조한다. 서 사무차장의 지적대로 거리 환경을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환경미화와 장애우의 생존권 보장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돼야 하는 것인지는 생각 해봐야 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아직은 장사가 미숙해서 물건 떼어오는 것을 다 팔지도 못해 항상 적자이지만 청계천 8가의 장애우 노점상들은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언젠가는 진정 그들을 위한 효율적인 법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또한 환경미화보다 빈민노점상 장애우의 생존권이 더 존중되는 그 날을 고대하고 있다. 장애우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 매김 될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것이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떠밀리는 장애우들, 그들은 벅차지만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매서운 바람이 부는 청계천 8가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글/ 김수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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