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 자활 공동체 "한우리 집"
본문
장애우 자활공동체 한우리집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성경말씀에 띠리 소외되고 버림받은 영혼들과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노점상 정용기씨
" 팔다리에 힘이 없어 똑바로 설 수도 걸을 수도 없습니다. 손이 구부러져 물건을 제대로 잡을 수도 없고, 혀가 굳어져 말도 정확히 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할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장사를 하는 것이 남들에게 추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나는 절대로 남들에게 동정을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창피하지도 않습니다. 나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올 해 나이 스물 여섯, 뇌성마비 2급 장애우인 정용기씨는 인천에 있는 한시장에서 인형과 악세서리를 파는 노점상이다. 그는 전라도 고흥의 조그만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기가 잠도 자지 않고 밤낮으로 울기만 해 이상하다고만 여겼는데 그가 태어난지 한달 후에야 비로소 뇌성마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자식의 병을 고쳐보려고 좋다는 약은 다 먹여 보았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마을의 전도사가 대구에 있는 한 권사님을 찾아가 보라고 해서 찾아가 그분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일어나 앉지도 못했던 그가 일어나 앉고 기어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저는 그 때 주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기어서 바라본 주님이 저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아마 제가 장애를 가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그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몸이 온전치 못해 남들보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오직 믿음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참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용기있는 사람이다.
그는 무엇인가 일을 하고 싶어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가 장사를 하는 시장에는 다른 장애우들도 많이 장사를 하고 있어서 서로 도와가며 장사를 하고 있다. 그는 시장어귀에 파라솔 하나를 치고 평사 위에 손으로 만든 인형과 머리핀, 귀걸이, 목걸이 같은 악세서리를 펼쳐놓고 하루종일 장사를 한다. 가지런히 물건을 차려놓은 모양이 그의 눈엔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만 화려한 상점들 사이를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기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평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요리조리 옮겨 놓기도 하고, 바구니에 담아 놓기도 해보지만 초라해 보이기는 매한가지인 것 같다.
노점상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지만 근래에 와서 그는 자주 기운이 빠진다. 단속반의 철거압력이 거세지고, 설상가상으로 날씨도 더워지는데 장사가 잘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가족들과 주위 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점을 시작할때는 기대한 게 많았는데....
"품종을 한번 바꿔볼까, 아니면 목이 좋은 곳으로 장소를 옮겨볼까....다른 사람들은 전부 쌍쌍이 나와 장사를 하는데 나만 혼자구나. 나도 빨리 돈벌어서 장가가야 할텐데...."
그는 요즘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그가 몸담고 있는 한우리 선교회 전도사와 부인을 생각하면 얼른 고개가 숙여진다. 아침저녁으로 그를 데려다 주며 장사를 하게 도와주는 그 분들의 고마움도 모르고 자신만 생각하는 것 같아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다. 어렵지만 선하게 사는 정용기씨, 그는 한우리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한우리 집에서 그와 비슷한 처지의 장애우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일곱식구가 사는 한우리집
현재 한우리 선교회는 인천 광역시 북구 부평2동에 있는 조그마한 구옥을 세얻어 사무실 겸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곳에는 일정기간 동안만 머물러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직장을 얻어 나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식구들 수가 항상 일정하지는 않으나 지금은 모두 일곱 식구가 산다.
한우리 선교회 회장 김정기 전도사(38세)와 부인 김주은(34세)씨, 선교회 간사 김미희씨(28), 그리고 최철희(36세)씨와 정용기씨, 승정일씨(26세), 김수근씨(18세)등이 한우리집 식구이다. 이들은 모두 지체장애와 뇌성마비장애를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 민순기씨가 집앞에 있는 화원을 운영하다 직장이 취직이 되어 나갔는데 며칠 있으면 다른 장애우가 들어와서 계속 화원을 운영할 것이라고 한다.
김미희 간사는 지난3월에 강원도 속초에서 올라온 새식구이다. 그녀는 여자로서는 김주인씨가 유일한 홍일점이었던 한우리집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며 선교회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최철희씨는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정상적인 분별력이나 사고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승정일씨나 김수근씨도 장애가 심해 아직 바깥활동이 어려운 상태이다.
한우리 선교회 회장인 김정기씨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관절염을 심하게 앓았다.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의 아픔만이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군대를 제대하고 신학대에 입학하면서 그는 장애우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상담과 봉사활동을 해오다가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장애우를 돕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다.
" 시각장애우 선배의 소개로 처음 집사람을 만났을 때 저는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람이 그 일의 길잡이로 주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부인 김주인 씨는 19세 때부터 양쪽 하반신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까 갑자기 다리가 구부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아직까지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고, 회복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현상은 그녀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크고 엄청난 일이었다. 그녀는 대학입학을 포기하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 방황해야 했다. 그러던 그녀는 김정기씨를 만나고 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다.
이들 부부는 처음 경기도 광주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살림이라야 새것이라곤 강아지를 팔아 산 전화기 한 대 뿐이었다. 김정기 씨는 먹고살기 위해 막노동을 했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에 다녔다. 그러다가 직장을 다니기 위해 대학을 휴학하고 인천으로 집을 옮겼다.
김정기씨가 한우리 선교회를 설립한 것은 1991년 3월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장애우들을 위한 선교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다.
"선교회 활동을 하면서 처음에는 복지관에서 장애우들의 주소를 알아다가 편지를 보내고 성경이나 생활수기, 재활정보 등을 담아 한우리 회지를 만들어 장애우들에게 보내주었어요. 그리고 재활이나 병원 같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전도활동도 하고 노방전도도 하면서 장애우들을 많이 만났지요. 그러다가 작년부터 연수동에 있는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장애우들과 함께 살다가 12월경에 지금 이 곳으로 이사온 거예요"
김정기씨는 그동안 저축해 온 돈에 퇴직금을 보태서 지금의 한우리집을 마련했다고 한다. 새로 이사온 곳은 부평역에서 마을버스로 한정거장 정도의 거리에 있는 주택가라 교통도 편리하고 동네 인심도 아주 좋은 편이다. 주변에서 장애우 단체나 집단이 들어서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동네 사람들은 음식도 나누어주고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 그리고 아직 간판도 없는 조그만 화원이 "장애우 화원"이라며 일부러 멀리서도 찾아와 화초를 사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집은 좀 낡았지만 식구들에게는 이곳이 왠지 더 정감이 간다. 방도 전보다 훨씬 넓어졌고 화장실도 방안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마당을 마루로 개조시켜 유용하게 쓰고 있고 휄체어를 탈수 있도록 문턱에도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김정기씨의 눈에는 아직 미흡한 것들이 더 많아 보인다. 생각 같아서는 장애우들이 저마다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할수 있도록 다양한 기술을 배울 수 이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싶고 장사를 하는데도 좀더 좋은 조건을 마련해 주고싶다.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아 보인다.
컴퓨터도 5대나 기증 받아 놓았는데 아직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있다. 모든 일이 생각만큼 잘 따라 주지 않는다. 가끔 자원활동자들이 와서 식구들에게 한글도 가르쳐주고 가사일도 도와주곤 했는데 그 일도 꾸준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재정난 때문일 것이다.
인형, 사탕부케 등 만들어 팔아
"차가 없어서 식구들 장사하는데도, 그리고 외출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아요. 좀더 좋은 시설을 갖추어 놓고 장애우들 운동기구도 마련해 놓아야 하는데 형편이 그렇지 못해요. 저희 자체 내에서 생활비를 충당하려고 인형과 사탕부케를 만들어 팔고,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팔기도 하고 가끔 일일찻집도 여는데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생활하기가 어려워요.
지금은 이웃 교회와 선교회 회원들이 김치도 담가다 주고 후원금도 보태주시고 해서 근근히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어요. 저희 집사람이 몸이 불편한데도 식구들 뒷바라지하느라 제일 고생이 많지요"
김정기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주인 김주인씨는 "식구들이 세탁기도 돌려주고 설거지며 청소도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식구들에게 공을 돌린다.
"내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을 도와준다는 것이 참 가식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 저는 실상 전도사로서,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이 집의 주인이 아니라 심부름꾼인데 어느때 보면 제가 주인 노릇을 하고있는 것 같아 가족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지요. 그리고 저와 식구들이 같이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장애우들 스스로가 일어서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 때는 정말 저도 힘이 들어요. 식구들이 오늘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고통이 지금은 견디기 힘들어도 그 힘든 만큼 내일은 두걸음 걸을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김정기 씨는 김미희 간사와 함께 인천 성서신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동안 선교회 일을 하느라 신학대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 시작한 신학공부에 열심이다. 내년쯤엔 장로교신학대에 편입해 앞으로 목회자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라고 한다.
장애우 자활공동체 한우리집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성경말씀에 따라 소외되고 버림받은 영혼들과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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