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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과 공동체] 제언 - 자선을 베푸는 당신의 손길이 바뀌어야 한다.

본문

[모임과 공동체]

“자선을 베푸는

당신의 손길이 바뀌어야 한다”

 

장애우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의례 후원물품이 많이 들어온다. 그런데 후원물품 중에는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많아 공동체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 글은 바람직한 자선을 위한 제언이다.

 


<생색은 제발 내지 말았으면....>
  우리 공동체는 3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사회에 큰 도움은 못되지만 나름대로 진솔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작은 빛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산다.
  얼마 전 방송을 비롯한 언론은 고베 지진 사건을 크게 다루었다. 내가 보기에 언론의 보도 태도는 그들의 아픔이나 상황을 밀도 있게 끄집어내지 않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성의 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자리에서 나는 언론의 성의 없는 전달에 트집을 잡고 싶은 것이 아니다. 바람은, 점퍼니 라면이니 생활용품을 전달해 주면서 국내에서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라면 상자 갖다 주듯이 유치한 생색(?)은 제발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한국 기자들이 줄줄이 따라가 사진을 찍어대고 악수를 오랫동안 하고 어깨에다 힘주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엇인가를 했다는 생각, 도와주었다는 생각도 말고 그것으로 정치적 계산은 더욱 하지 말자. 지금 그들이 배고프지만 라면으로 허기를 채울 수있고 몸을 따뜻하게 해서 인정을 느끼면 그만인 것이다. 물질 풍요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온정을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며칠 전 같은 동네에 사는 미망인 한 분이 혼자 농사를 지어 반자루나 됨직한 쌀을 보내왔다. 환자들이라 소화가 안된다고 시루떡에다 무를 넣고 효소 음료를 챙겨주는 그 세심한 배려, 방학 동안 우리아이들 서울 구경시켜 준다고 꼬맹이들 셋이나 있는 집에서 우리 아이들 다섯을 초대하는 용기 있는 가난한 목사님께도, 강원도 골짜기까지 찾아주는 모든 분들께도, 이웃을 위해 따뜻한 눈빛을 주는 모든 이들에게 온정을 느낀다.
  누구든지 사람은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채무자도 채권자도 없다. 그래도 살다보면 도움주기보다는 도움을 더 받고 사는 게 우리 인생이 아닌가.
  우리 공동체는 농사도 많이 짓고, 가축도 여러 종류 키워 자급자족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노동력으로 이것저것 얻어먹고, 얻어다 쓰고 있다. 오늘도 보리식품에서 우리밀 국수를 얻어다가 맛있게 끓여먹었다. 세상이 어쩌니 저쩌니 해도 이 깊은 골짜기에서도 먼 곳에서 비추어주는 빛이 비친다.

 

 

<헌 옷이 너무 많아요>
  우리 공동체는 남의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자립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책은 안쓰고 사는 게 대책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에게도 우리는 새옷, 좋은 물건 사지 말고 수도하는 마음으로 살자고 눈빛 교환한다. 무릎 떨어진 바지에다 사과 모양을 붙여서 수를 놓아주면 아이들은 새 옷을 사 준 것보다 더 좋아한다.
  (이것도 멋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안쓰고 사는게 대책이긴 하지만 남의 도움 없이는 살수 없다. 그래도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성의 없이 갖다 주는 옷이 너무 많다고 불평을 하고 싶다. 이쪽 의사는 들어보지도 않고 회비가 모아졌다고 국수 50상자를 사다주어 5년이 지난 지금도 창고에 남아있게 하는 일방적인 호의에 약간의 분노를 느낀다.
  일년의 반인 6개월을 기름보일러를 돌려야 하는데 먹지도 않는 음료수, 과자, 라면에 사용하지도 않는 각종 세제, 심지어는 치약, 칫솔도 한 상자씩 인심 좋게 갖다 주면 이건 분명히 낭비가 아니겠는가. 누구 돈이 되었든지...
  10여 년 전 이곳에 오기전, 나는 인가 난 사회복지 시설에도, 무인가 시설에도, 판자촌에서도 조금씩 생활을 해보았었다. 그 당시 우리는 비 맞은 간장 버리기 아깝다고 보내주면 없기 때문에 먹어야했고, 정육점에서 변질된 고기를 갖다 주면 버릴수가 없어 씻어서 먹었다. 과자, 사탕, 라면을 듬뿍듬뿍 사다주어 쌀을 두고도 우리는 밥 대신 라면을 더 많이 먹었다. 그래서 나는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려 그 곳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지만 그 곳의 아이들이나 어른들 대부분이 폐병에 걸려 있고 폐병이 늘고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심으로 이웃들을 돕고 싶다면 내가 못먹고 먹기 싫은 것, 내가 못입고 입기 싫은 것은 갖다주지 말자는 것이다.
  소외된 이웃들이 진정으로 사회에 감사 할수 있는 마음이 새겨지도록 자선을 하자. 사람 잘 방도 부족한데 옷이 집 한채를 차지하고 있고, 옷이랑 잠을 같이 자기도 했다. 버릴수도 없고 다 입을 수도 없어 그야말로 대책이 없었다. 지금 우리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방마다 옷들과 불필요한 물건으로 쌓여 있다. 자원 하나 없는 우리가, 또 이지구가 끊임없이 자원을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고 시간과 정성을 다해 이 산골까지 갖다 준 옷들을 태워서 오염시키고 싶지 않아 나는 입을 만한 옷을 갖다 줄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불편한지 모른다. 지금도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다(가난할수록 남의 옷 안 입으려는게 우리네 인심이다). 나는 이 헌옷을 입으려는 이들에게는 화물로 부치기도 하고, 집에 보관해두었다가 오는 사람들과 같이 입기도 한다.
  이렇게 저렇게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쌓여있는 물건과 옷을 나우어 주었다. 때로는 정말 짜증이 나기도 했다. 이런 일로 먼지 퍽퍽 뒤집어쓰면서 할 일도 많은데 이일을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쓰레기로 버리자니 내 양심이 허락지 않았고, 하늘이 무섭다.
  그런데 문제는 쓰레기 종량제로 밀려오는 옷 아닌 쓰레기 때문이다. 오늘도 승합차로 옷과 이불을 인심 좋게도 가득 싣고 왔다. 정리를 하고 보니 입을 만한 옷은 스웨터 한장, 점퍼 한 벌뿐이었다. 이 잠바와 스웨터는 누구를 줄까 나는 고민이다.
  요즘 옷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서랍 한켠이면 사철옷이 다 들어간다. 누가 도대체 이많은 옷을 사입고 또 버릴까? 그들이 우리 주려고 옷을 사입는 것도 아닐텐데...이걸 보고 우리나라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단면적으로 평가해도 되지 않겠는가.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고 갖다 주는 옷이 얼마나 많고 또 짐이 되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옷이 이렇게 필요치 않다고 거절하는 단체가 아직까지는 없었다. 불필요한 것을 주어도 거절하지 않았다. 왜? 그것은 곧 밥줄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라면 갖고 와서 사진을 찍던 시대는 지났다>
  나는 아이들에게만이라도 청빈한 생활을 가르치려고 한다. 새 양말을 두고도 구멍난 양말을 신게 하고, 새옷을 두고도 헌옷을 입힌다. 남이 갖다주는 것들만 사용하고 자랄 수밖에 없는 고아원의 아이들이 물건 귀한 줄 모르고 경제를 배우지 않아 커서는 생활력이 없어 사회문제가 되어 문제가 문제를 낳고 있는데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바로 보호만 했지 교육을 하지 않은 운영자의 무관심과 짜임새 없이 마구 갖다 준 독지가들 때문이다. 학용품이 창고에 쌓여 있는데 아이들이 절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까? 성의 없이 갖다주는 물건들을 성의 없이 사용하다가 없어지면 그만이다.
  어쨌든 복지시설에 갖다주는 물건은 양이 많아야 한다는 방문객들의 사고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부피 많은 과자, 부피 많은 학용품, 부피 많은 선물, 의례히 곁들여지는 옷. 나의 솔직한 심정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이들과 의논해서 돈 쓰는 요령과 물건을 고르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경제적 대책없이 어쩔수 없이 복지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운영방침이나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후원자들과 의논해서 살림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복지시설의 살림은 개인의 것이 아닌 구성원 모두의 것이다. 기득권자도 피기득권자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해야할 일이다. 주는 사람들이라고 이쪽 의사를 알아보지도 않은채 마구잡이로 가져와서 필요없는 것은 버리든지 태우라고 하는 성의 없는 행위는 하지 말자.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내게 있는 마음과 정성이 함께 묻어가야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공동체에는 명절 여러 곳에서 떡을 해온다. 전화로 떡을 해가도 되겠냐고 물어주기라도 하면 적절하게 조절을 할텐데...이 떡도 그렇다. 매일 떡만 먹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어쩌란 말인가? 오늘도 그릇에 떡을 담아 먹을지 안 먹을지도 모르면서 아이들이 동네를 돌았다.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호흡이 안 맞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집 살림살이는 엉망이다. 정갈하고 짜임새 있게 살림을 할 수가 없다. 창고에는 우리가 필요한 것보다는 불필요한 것으로 멋지게 진열되있다. 싸구려 구멍가게처럼....
  매사 인간관계가 일방적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라면 갖고 와서 사진을 찍어대던 시절도 지났고, 잠깐이라도 우리 기분을 즐겁게(?)했던 포장된 라면 상자등장도 지났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환자들에게 털장갑, 목도리, 털바지를 나누어주며 따뜻하니 좋지 않냐고 어벌쩡거리던 시절도 지났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이웃(고아,과부,병든 자, 버림받은자..)을 돌보는데 있어서 달라져야한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데 있어서도 사막에서 물 한모금 주는 것과 수도꼭지에서 떠다주는 물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편집자 주/이애리(시골집 공동체 식구) 씨가 몸담고 있는 장애우 공동체"시골집"은 강원도 화천에 있다. 양지바른 곳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시골집은 장애우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쉼터 역할도 수행하고 있는 보기 드문 공동체이다.

 

이애리/ 시골집 공동체 식구

 

 

작성자이애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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