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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문제다]"차별"에 반대하는 백석동 장애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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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반대하는 백석동 장애우들
인천시 백석동 ‘사랑의 집’에 살고 있는 장애우 가구 10세대가 명백한 차별 상황에 직면해있다. 지원은 해 주지 않고 공해로 인한 보상에서 제외하는 어처구니없는 차별에 장애우들이 반발하고 있는 백석동 사태의 내막을 알아본다.
이태곤 (함께걸음 기자)

<생각지도 않았던 "집 수리">
 지난 6월 초. 인천시 서구 백석동 187번지 8통 3반 연립주택 "사랑의 집"에 거주하는 장애우 10세대 37명의 가족들은 뜻밖의 상황에 직면해 어리둥절해야 했다. 주민 대표인 홍아무개씨가 "집을 고쳐 주겠다."며 각서에 도장을 찍게 한 뒤 갑자기 인부들이 들이닥쳐 연탄보일러였던 것을 기름보일러로 바꿔주고, 장애우들이 이전해 가 빈 집의 벽을 터주는 등 집 수리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지방으로 장사를 나갔다가 모처럼 집에 돌아온 장애우들은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라 인부들을 붙잡고 "왜 집을 고쳐주느냐? 무슨 이유로 고쳐 주느냐"고 물어봤지만 인부들은 "시키는 대로 공사를 할 뿐이다."라며 상세한 답변을 피했다. 그래서 장애우 들은 "주변에 쓰레기 매립지가 들어섰다고 정부에서 대신 살기 편하게 집을 고쳐주는구나"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공사 금액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장애우들이 인부들을 붙잡고 공사 금액을 물어보자 처음에는 "3천만원 공사다."라고 대답했던 인부들이 얼마 후에는 "5천만원 공사"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1억원 공사이다."라고 시간이 지나면서 공사 금액을 부풀렸던 것이다.
 뭔가 흑막이 있다고 판단한 장애우들은 부랴부랴 관한 구청인 서구청으로 몰려갔다. 서구청에서 알게 된 사실은 장애우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구청 담당 공무원은 "집 수리를 정부에서 그냥 해주는 것이 아니라 길 건너에 김포 쓰레기 매립지가 들어서면서 나온 공해 보상금으로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도 처음에는 사랑의 집 보상금으로 5천 4백만원이 책정됐다가 구의회의 압력으로 1억원으로 늘어났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보상에 있어서의 "차별">
 이때부터 인천 백석동 사랑의 집 사태는 불거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속았다는 판단을 한 장애우들은 서둘러 "사랑의 집 환경 피해 대책위원회" (이하 대책위·위원장 한동열)를 만들었고 곧바로 진상 파악에 나섰다.
 대책위가 파악한 진상은 이렇다. 사랑의 집에서 1천 미터 떨어진 김포 해안에 쓰레기 매립지가 들어선 것은 지난 91년이다. 쓰레기 매립지가 들어서면서 매립지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인 백석동 주민들이 공해 피해를 이유로 반발하자 주무 부처인 환경처에서는 주택 중측비와 소득 증대 명목으로 우선 50억원을 보상해 주고, 앞으로도 매년 10억원을 더 책정해서 지급하겠다는 "보상 카드"를 내놨다.
 이렇게 해서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한 환경처는 약속대로 올해 50억원의 보상금을 내놨는데 문제는 또 다른 반발을 우려한 환경처가 보상 집행을 전적으로 주민자치 기구인 "백석동 공해 대책위원회"(이하 백대위·위원장 이종원)에 맡기면서 일어났다. 환경처에서 권한을 위임받은 백대위는 사랑의 집 장애우들을 배제한 채 주민총회를 열어 가구별로 돌아갈 보상금액을 결정했고, 이 과정에서 장애우들을 명백하게 차별한 것이다.
 보상을 집행하기 전 환경처는 공해 피해 지역을 매립장에서 가장 가까워 피해가 극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은 130%, 그 다음은 100%, 나머지는 70%로 한 동네지만 공해 피해 판정을 따로 책정했다. 이 판정에 따라 백대위는 사랑의 집이 있는, 피해가 가장 심각할 것으로 예상되는 130% 피해 지역의 보상 내역으로 집을 가진 가구주는 한 가구당 4천 6백 5십만원, 세입자는 처음에는 한 가구당 2백만원을 책정했다가 반발이 있자 4백만원을 배정했다.
 따라서 이 기준에 따르면 사랑의 집은 모두 다 독립 가구로 구성된 세대이므로 당연히 한 가구당 4천 6백 5십만원씩 계산해서 합계 4억 6천 5백만원의 보상금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백대위는 사랑의집을 일방적으로 "단체"로 규정하고 "특수지역으로 보아 공동사업비로 보상을 집행한다."는 규약을 만들어 보상금액으로 단지 1억원만을 배정한 것이다.
 사랑의 집 장애우들은 이러한 보상 결정이 주로 마을 유지들로 구성돼 있는 백대위의 기득권을 감독 책임이 있는 관할 서구청이 인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미 8월에 백대위에서 독립세대임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 제출을 요구받고 가옥 등기도 제출한 상태인데 누구보다 사랑의 집이 단독세대로 구성된 연립주택임을 잘 알고 있는 서구청이 주민들보다 앞서 사랑의 집을 단체로 규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보상에 있어서의 차별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 장애우들의 주장이다.
 사랑의 집 장애우들은 그 근거로 지난 8월 항의차 서구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구청 사회국장이 했던 발언을 들고 있다. 당시 김아무개 사회국장은 "사랑의 집을 단체로 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장애우들의 질문에 "설립동기로 보아 사견이지만 단체로 본다."고 대답했다. 장애우들이 "만약 사랑의 집이 단체라면 한 솥에 밥을 같이해 나눠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우리는 각자 밥을 해 먹는다."라고 항의하자 사회국장은 "그건 당신네들 편의상 그렇게 하는 거 아니냐"라며 사랑의 집이 단체라는 견해를 극구 주장했다. 이런 구청의 입장이 백대위에 전달돼 백대위도 사랑의 집을 단체로 규정하게 됐다는 것이 장애우들의 말이다.

<집단 이주 요구해>
 사랑의 집 장애우들이 억울해 하는 것은 "그동안 일체의 지원이 없다가 보상 문제가 발생하자 단체로 규정, 차별을 하고 있다. 만약 장애우들이 아닌 비장애우가 사랑의 집에 살았다면 구청이나 동네 주민들이 그런석으로 보상을 결정했겠느냐."는 장애우들의 말에 잘 함축돼 있다.
 현재 "어렵게 일군 보금자리가 공해 지역이 된 것도 하늘이 무너질 노릇인데 보상에 있어서마저 장애우와 비장애우를 차별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장애우들의 주장은 그러나 백대위와 구청 양측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상을 집행한 환경처에서는 "이미 주민들과 합의를 보고 50억을 집행한 상태이다. 분배에서 잘못된 것이니 가서 주민들과 서구청과 해결해라"고 발뺌하고 있고, 감독 책임이 있는 서구청은 "우리에게는 나중에 정산 보고를 받는 책임만 있지, 보상 과정에 관여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백대위 측과 해결해라."라고 뒷짐만 지고 있다. 보상금을 나눠 가진 백대위 측은 백대위 측대로 장애우들의 잇딴 진정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때문에 복잡하게 얽힌 사랑의 집 사태는 상당기간 그 해결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이다. 하지만 사랑의 집 장애우들이 최근 보상보다는 근본적인 대책인 "이주"를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서구청 및 인천시와 잇딴 접촉을 갖고 있어 사태전개 여부에 따라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도 있다.
 사랑의 집 사태에 관여하고 있는 관계자들은 "이미 사랑의 집이 있는 지역이 인하대 환경평가 조사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만큼 책임이 있는 인천시에서 대토를 마련해 장애우들을 이전시켜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과 상관없이 이번 사랑의 집 사태는 열악한 장애우들의 주거 실태와 이 사회 곳곳에 상존해 있는 장애우들에 대한 차별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줌으로써 장애판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랑의 집", 어떤 곳인가>
 인천과 김포의 경계선인 인천시 서구 백석동에 사랑의 집이 생긴 것은 지난 87년이다.
 그 전 해인 86년 6월, 인천시 북구 부개동 속칭 "곤센마을"(해방 전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자여서 그렇게 부른다.)에 흩어져 세를 살고 있던 20여 세대의 장애우들은 동네가 개발붐을 타면서 집 주인들이 방을 비워달라고 해 집단으로 이삿짐을 꾸려야 할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장애우들 대다수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주로 수세미 장사 등 행상일을 나가 생계를 이어가는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에 방을 늘려갈 처지가 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당시만 해도 집 주인들이 장애우들에게는 세 주기를 꺼려해 장애우들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래서 이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몇몇 장애우들이 생각해낸 것이 집단이주였다. "인천시에 한적한 곳에 있는 시유지를 불하해 달라고 부탁해서 그곳에다 천막이라도 치고 살자." 이렇게 결정을 본 장애우들은 진정서에 서명을 했고, "우리에게 시유지를 불하해주면 10년 내에 땅값을 갚겠으니 선처해 달라."는 이들의 진정서는 인천시를 거쳐 해당 구청인 북구청으로 전달됐다.
 진정서를 접수한 북구청에서는 뜻밖에도 이들의 진정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사정이 그렇다면 너희가 적당한 시유지를 찾아라."고 회신했다. 힘을 얻은 장애우들은 한적한 곳에 있는 시유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어느 곳이 시유지인줄 알 수 없었던 장애우들은 토지대장만 잔뜩 떼고 결국 시유지를 찾는데 실패했다.
 무산 일보직전에서 사랑의 집이 생길 수 있게 된 것은 86년 당시 구청마다 신설됐던 "위민실"의 역할이 컸다. 북구청장을 만나러 간 장애우 대표가 비서의 안내로 당시 인천 북구청 위민실장인 윤아무개씨를 만나면서 건립이 급진전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장애우들이 사정을 설명하자 윤아무개씨는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 한 번 노력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윤아무개씨는 며칠 후 장애우들을 대신해 위민실 자원활동가들을 동원해 한적한 곳에 있는 시유지를 찾아 나섰다.
 장애우들은 장애우들대로 회의를 열어 집단 이주 해갈 15가구를 추린 다음 "우리가 빈손으로 땅을 달라는 것을 있을 수 없다. 우리도 형편 닿는 데까지 돈을 내놓자."라고 결의를 하고 세들어 있던 방세 보증금을 미리 받아 1천 6백만원을 마련했다. 장애우들이 돈을 마련해 내놓자 땅을 찾는 작업은 더욱 가속화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8차례의 시도 끝에 87년 여름 인천의 가장 외진 지역인 현재의 백석동 8통 3반 녹지 302평을 평당 4만원에 계약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장애우들의 "출애굽"은 마무리됐다. 이들이 땅을 사는 과정에서 계약 일보직전에서 무산되기를 거듭한 것은 땅 주인과 주변 주민들이 "장애우 주택이 들어서면 땅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그해 8월 26일 기공식을 가진 사랑의 집은 위민실 자원활동가들과 북구청의 도움에 기대 대부분의 건축비를 충당하고 그 해 11월 13일 연립주택의 형태로 지어져 준공식을 가지고 완공됐다.
 비록 6평 공간에 방 하나 부엌 하나의 작은 구조지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문패에 걸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장애우들은 감격했다. 실제로 당시 입주했던 장애우들에 따르면 "곤센마을에 세들어 살 때는 자포자기하며 장사 나가 돈 몇 푼 생기면 술 먹고 그랬는데 이 보금자리가 마련되고 나서는 장애우들이 하나같이 의욕을 갖고 나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랑의 집이 완공되고 얼마 후 북구청 관할 구역이던 백석동이 서구청 관할 구역으로 바뀌었고 현재 사랑의 집은 서구청의 묵인아래 설립과정의 우여곡절을 안은 채 생각지도 않았던 "차별" 상황에 직면해 외롭게 홀로 서 있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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