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예비 비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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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비장애인(?)
비장애인을 말할 때 "예비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종종 쓰고 있다. 썩 좋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하도 불의의 사고가 많이 일어나서 후천적 장애인이 갈수록 크게 늘어나기 때문에 흔히 쓰여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의학의 발달로 장애인도 "예비 비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그만큼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이 덜해 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948년에 나온 [장애인을 위한 희망]이라는 책에서 "복지 수당을 받아서 의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하기 어려운 장애인에게 일할 수 있도록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시켜서 오히려 세금을 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국가적으로 크게 이익이 된다."고 한 내용을 읽으면서, 우리 정부는 언제나 손익 계산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될까 생각했다.
1992년에 나온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례로 우리들이 장애인을 어떻게 취급해 왔는지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장애인은 타고 난 근시나 사시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악의에 희롱 당한 인간으로, 일생 그 핸디캡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간주 받아 왔다. 그렇지만 현재의 미국사회는 그들의 육체적 장애 뿐 아니라 그 존엄에 가해진 상처의 치료에도 진력하고 있다.
많은 정부기관과 대학이 몰두하고 있는 장애인 원조의 수단은 다양한 면에서 필요이상으로 돈이 드는 것이었다. 많은 자치단체가 장애인 전용의 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에 장애인이 이용하기 쉽도록 모든 공영버스를 개조했다.
공공시설에 휠체어용의 다른 입구를 확보하는 대신 정면 현관에 경사면 설치를 의무화 시켰다. 더 간단하고 돈도 들지 않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시책에 쏟아 넣은 비용과 노력은 장애인의 물리적인 불편함을 경감한다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켜져야 하는 것은 장애인의 "패기"이고 그것을 위해 자연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사람과 같이 버스에 타거나 건물의 정면현관을 출입하거나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쯤이면 선진국과의 거리는 점점 더 아득해진다. 그럴수록 지금 우리 사회에서 깊이 음미해야 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특수교육진흥법이나 장애인고용촉진법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놓고 생색만 내고 있는 우리 현실을 보면서 장애인에 대해 인식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어렵게 만들어 놓고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보완해야 할 고용촉진법을 오히려 개악시키려 한다는 것은 정부 스스로 의식의 후진성을 드러내 놓는 것이다. 이 사회와 정부는 더 이상 장애인을 부담스러운 폐품으로 방치해 두거나 감추어 두려고 하지만 말고 재활용을 위한 투자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이홍익 (뇌성마비 장애우·서울시 양천구 목 2동 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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