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지원이 있다면 발달장애인의 자립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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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예산제도 기획연재⑤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2014년부터 3년간 ‘개별유연화서포트서비스’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개인예산제의 취지와 내용을 그대로 살려 맥락을 같이하는 이 사업은 발달장애인의 기능적 측면을 중심으로 획일화된 기존 서비스에서 벗어나, PATH·I CAN 등 사람중심접근계획 기반 도구를 활용해 당사자의 삶을 스스로 기획하고 주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올해는 2월부터 7월까지 총 21명의 발달장애인이 이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스물세 살 발달장애인 수빈 씨가 그 중 한 명이다. ‘과연 될까?’라는 주변의 우려와 함께 본격적인 서포트서비스를 시작한 지 한 달. 짧은 기간이지만 수빈 씨는 그 걱정들이 편견에서 비롯된 기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달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개별유연화서포트서비스’
일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홍재희 간사는 ‘개별유연화서포트서비스’ 참가자 모집 소식을 듣고 수빈 씨를 떠올렸다. 센터에서 지원하고 있는 여러 발달장애인 중에서도 능동적인 자기표현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수빈 씨에게 가장 필요한 지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홍재희 간사의 연계로 이 시범사업에 참가하게 된 수빈 씨는 PATH와 I CAN 도구를 이용해 욕구를 측정하고 목표를 확인했다. 당사자의 흥미와 꿈을 찾는 PATH 과정에서 수빈 씨가 가장 강하게 보인 욕구는 춤과 노래. 센터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았던 경험 때문인지 자전거를 배우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어진 I CAN 과정에서는 당사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수빈씨의 경우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문장을 만드는 데는 어려움이 있어 단어 위주로 언어를 구사한다. 또 중복장애가 없어 신체적으로 자유롭지만 요리, 청소, 씻기 등 일상적인 일은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다. 이와 같은 정보를 I CAN 도구에 입력하면 개인에 따라 적정한 지원금이 산정된다.
자립을 위한 계획 세우기
요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배가 고플 때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던 수빈씨. 서포트서비스 이후 컵라면 정도는 스스로 해먹을 수 있게 됐다. |
흥미, 상태, 지원금 등 결과를 바탕으로 수빈 씨와 그의 가족 그리고 홍재희 간사 등은 월 단위 지출계획을 세웠다. 지출계획은 인건비, 학원 등의 서비스 비용, 물품 구입비 등의 항목별로 세분화돼 매겨졌다. 수빈 씨는 일주일에 3일 댄스학원에서 강습을 받고, 일주일에 한 번 노래방에 간다. 주 2일은 집에서 간단한 요리실습을 하는데, 이는 홍재희 간사의 의견이다. 자립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활동이지만, 당연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기회를 준 적이 없으니 요리에 관심이나 흥미를 보이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과 칼 등의 위험성을 고려해 이 둘을 사용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요리법을 먼저 시도해보기로 했다. 이외에도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카페에서 마시고 싶은 음료 주문하기 등 일상생활에 기본적인 활동 위주로 계획을 짰다.
수빈 씨의 참여도가 높고 그림 작업 위주로 진행되는 PATH 과정과 달리 I CAN은 대부분 복잡한 서류 작업으로 이루어지고 당사자가 직접 답변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아 가족과 지인들의 참여도가 더 높다. 때문에 시작 초반 대부분이 수빈 씨가 2시간이 넘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I CAN 과정을 함께했던 홍재희 간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별다른 이동 없이 2시간을 꼬박 앉아있었어요. 마치 그곳에 모인 가족, 지인, 일산자립센터 관계자 등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어요. 내가 이 자리에 주인공이라는 것. 한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걸 느낀 거죠”
서포트서비스를 통해 처음 만난 수빈 씨의 모습
개별유연화서포트서비스는 아직 시범 단계에 있어 발달장애인의 자립을 조력하는 전문 서포터 인력이 체계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다. 때문에 기존에 수빈 씨 활동보조를 담당하던 한경희 활동보조인이 서포터의 역할을 동시에 병행하기로 했다. 본격적인 활동에 앞서 홍재희 간사와 한경희 서포터는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실시하는 전문 교육을 받았다. 이후 한경희 서포터는 자신부터 수빈 씨를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했다고 한다. 더 이상 무조건적인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존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이야기도 나눴다. 이후 수빈 씨는 부쩍 성숙해진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제는 시리얼에 우유 붓기, 컵라면 끓이기, 젓갈비빔밥 만들기 등 간단한 조리는 혼자 할 수 있게 됐어요. 처음에는 누구나가 그렇듯 서툴렀죠. 컵라면의 경우 ‘전기포트의 불을 누른다, 컵라면 겉의 비닐을 뜯는다, 컵라면의 뚜껑을 연다, 스프 2개를 꺼낸다…’ 이런 식으로 수빈이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과정을 세분화해 정리하고 반복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배고프다”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곤 했는데 그 버릇도 사라졌어요. 이제는 배가 고플 때 스스로 시리얼 등을 챙겨 먹는 모습을 보면 놀랍기도 하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수빈 씨는 특히 댄스학원과 노래방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노래방은 일주일에 1시간으로 계획을 세웠지만 어쩌다 2~3시간씩 부르는 날에도 지치는 법이 없다. 홍재희 간사는 댄스학원이나 노래방에 가는 날은 유독 수빈 씨의 표정이 하루 종일 밝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자주 전해 듣는다. “이렇게나 좋아하는 일을 그동안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장애인든 비장애인이든 억압되면 힘든 건 똑같잖아요. 주체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을 느낀다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개별유연화서포트서비스는 흔히 문제행동이라고 말하는 도전행동 혹은 돌발행동의 완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지만, 서포트서비스 지원 이후 그러한 행동들이 상당부분 사라졌다는 사례가 많다. 수빈 씨의 아버지 역시 이에 공감했다. “통제하기 곤란했던 특정 돌발행동들이 많이 줄어든 걸 몸소 느껴요. 수빈이가 오전시간 재활센터에서 단순노동식 작업을 하는데 예전에는 재활센터에 가기를 거부하는 날이 많았어요. 신기하게 서포트서비스를 진행한 이후부터는 급격하게 그런 말이 줄었어요. 매일 일을 하는 아빠와 센터 선생님처럼,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일종의 의무감을 느낀 거죠”
수빈 씨 스스로도 이 과정을 즐기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경희 서포터와 글 쓰는 연습을 꾸준히 해오던 어느 날,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서포트서비스 한 달 일정을 도식화해 종이에 적어 한경희 서포터에게 떡하니 보였다. 이미 있는 표를 그대로 베낀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었다. 수빈 씨는 자기가 하고 있는 활동들과 스케줄을 완전히 이해하고 표현했다. 수빈 씨의 아버지는 이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워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다고 한다. 서포트서비스를 통해 아버지는 수빈 씨의 진짜 모습을 23년이 지나서야 처음 만난 것이다.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건 개인의 상황과 성향에 따른 적절한 지원이다
지역의 각종 장애인지원센터에도 요가, 사물놀이, 뜨개질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모임이 다양하지만 결국 센터 임의의 선택이기 때문에 발달장애 당사자는 본인에게 진짜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개별유연화서포트서비스는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낭비되는 예산을 개개인의 필요에 따라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장애운동의 어쩌면 마지막 과제라고 볼 수 있는 발달장애인의 자립이 과연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에 홍재희 간사는 “적절한 지원이 있다면 가능하다”고 답했다. “예를 들어 다리를 쓸 수 없는 지체장애인에게 혼자 걸으라는 요구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휠체어 등을 지원해 지체장애인들의 이동권을 보장하듯 발달장애인은 발달장애인에게 맞는 적절한 지원이 필요해요. 여기서 적절한 지원이란 무조건적으로 일거수일투족을 돕는 지원이 아니라, 발달장애인이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지역사회에서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의미해요. 그것이 바로 ‘개별유연화서포트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활동보조 서비스의 부정적인 면들이 대두되고 있어요. 특히 발달장애인 지원에 있어서는 활동보조서비스에 지원되는 예산이 개별유연화서포트서비스로 점차 옮겨가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보고 있어요. 발달장애인은 지원금을 활동보조인에게 지출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필요한 지원을 받을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해요. 이렇게 발달장애인 개개인에게 적합한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발달장애인의 자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봐요”
수빈 씨의 아버지는 장애인 지원 정책을 보다보면 진정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고 한다. “대부분의 지원은 장애 당사자가 아닌 기관 중심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당사자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개개인의 상황과 성향에 따른 적절한 지원이에요. 이 좋은 제도를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이제라도 알아 다행이라는 마음이 교차해요. 앞으로 이 활동이 지속됐을 때 보게 될 수빈이의 모습이 기대되지만, 이 시범사업은 올해 10월이면 완전히 종료됩니다. 수빈이야 방법이라도 알아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내용을 전혀 모르는 다른 발달장애인 당사자와 가족들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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