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히말라야, 그 아래의 현실 네팔의 척수장애인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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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 살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히말라야를 떠올린다. 아름다운 설산을 배경으로 싱그러운 자연속의 삶을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네팔의 척수장애인들을 위한 국제개발사업을 맡아 일하고 있다고 하면, 예의 바른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한다며 칭찬해준다. 분명 여러모로 아름다운 일일 것이나, 매일의 일상은 아름답지 않다.
구체적이고 치밀한 불평
매일 냄새나는 누런 물로 씻고, 생수를 사서 끓여서 필터에 걸러 먹어도 이따금 배가 살살 아프다. 도로 위의 자동차들은 10년도 넘어 인도에서 폐기된 엔진을 가져와 조립해서 쓰기에 이제는 좀 놓아달라고 끔찍한 신음을 내곤 하며, 가는 곳마다 새까만 연기를 토해낸다. 그 연기로 가득한 카트만두는 세계에서 미세먼지와 대기오염이 가장 심한 도시 중 하나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 때문에 우기가 되면 무릎까지 흙탕물인지 버팔로 똥인지로 범벅이 되는 일상, 그건 애교다. 속 터지게 너무도 느리고 느린 사람들이 오히려 더 건강에 해롭다고 느낀다. 집에 인터넷 연결하는 데만 해도 한 달 반이나 걸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불평하다가도 뜨끔해 목소리가 작아지는 건, 나는 그나마 부유한 국가에서 온 외국인이라 물이라도 걸러 먹고 힘들면 차라도 타고 다니지만 가난한 현지인들은 더욱 나쁜 환경에서 지내고 있고, 척수장애인들에겐 더욱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이골이 나서 네팔의 안 좋은 점을 이것저것 말하는 것도 지겨운 일이 돼버렸다.
그러나 불평할 지면이 생겼으니 좀 더 구체적이고도 치밀하게 불평해 보고자 한다. 특히 척수장애인에게 네팔이 어떤 곳인지,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다. 제3세계의 빈곤을 그려내는 뭇 모금방송들처럼 절망으로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고 싶지도 않고, 실제보다 아름답고 희망찬 곳으로 꾸미고 싶지도 않다. 슬퍼하지도 위안 받지도 말고 날것 그대로 보시길. 나는 이 칼럼을 통해 당신을 출구 없는 세계로 초대해 최대한 오랫동안 찝찝하고 불편하게 하고 싶다.
네팔 사람들은 어떻게 척수장애인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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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그러한 것처럼, 네팔에서도 다양한 이유로 척수손상을 입는다. 특수한 것은 낙상의 비율이 크다는 것이다. 망고나무에 올라가 망고를 따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산속 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옆집에 가다가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기도 한다. 이따금 도시에 갈 일이 생겨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장거리 버스에 자리가 없어서 지붕에 타곤 하는데 거기서 졸다 떨어져서 다치기도 한다. 흔치는 않지만 짐승의 공격으로 다치는 일도 있다.
2015년에는 진도 7.9의 지진이 있었고 400명이 넘는 척수손상 환자들이 그때 생겨났다. 나도 그때 네팔에 있었는데 콘크리트 집에 살던 터라 다치지는 않았다. 그때 다친 사람들은 대개 시골 흙집에서 살던, 그래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집에서 고스란히 흙더미의 무게를 받아낸 사람들이다. 신두팔촉이라는 지역에서는 아예 산사태가 일어나서 마을을 뒤덮었고, 많이들 죽고 다쳤다. 대개 네팔의 척수손상 환자들은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많이 공부했다고 해봤자 중학교 수준이다. 생계를 위해 망고를 따던 아낙네나 흙집에 살던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무슨 교육을 받았겠는가. 의무교육제도가 없는지라 초등학교도 채 안 마치고 집 안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열여섯에 덜컥 결혼하고, 열일곱에 애를 낳고, 그렇게 가난을 대물림하는 사람들이다. 가방끈이 뭐 대수인가 싶다가도 대화를 나눠보면 안다. 자기 이름도 겨우 적는 사람들은 ‘종이를 반으로 접으세요’라는 간단한 지시도 금방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소먹이 꼴을 베거나 모내기를 하는 데는 전문가일 테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무척 힘들다. 그래서 네팔의 척수장애인이 어딘가에 취직하거나 경제활동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수는 적지만 대학을 마친 사람들도 있다. 도시에서 교통사고로 척수손상을 입은 사례 중 몇몇이 그렇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부유해도, 네팔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척수장애인은 무수한 어려움에 부딪힌다. 빈부와 교육수준을 막론하고, 어쩌면 네팔에서는 척수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일지 모른다. 꼬불꼬불 아찔한 산악지형이고, 병원은 멀고, 교통상황도 극악이라,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적절한 치료를 받기란 어렵다. 그러니까 수술을 받을 때까지 살아있었다는 것, 그리고 회복했다는 것은 기적이다.
수술비는 적게는 백만 원에서 천만 원까지 척수손상의 경중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대졸자 신입 평균 월급이 15만 원인 나라에서, 한 달 8만 원을 겨우 벌어 가족 입에 풀칠하는 사람들이 이 수술비를 감당할 수는 없다. 예컨대 한국에서 한 달 180만 원으로 4인 가족을 겨우 건사하는 가장이 덜컥 척수손상을 입었는데, 수술비만 일억 원이 넘는다고 생각해 보라. 정부에서 지원하는 건 10%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부쳐 먹던 얼마 되지도 않는 밭뙈기를 팔고 고금리로 사금융 대출도 받아야 한다. 그야말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네팔의 척수손상 환자에게 이건 겨우 첫 번째 고비일 뿐이다.
재활,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간 후
수술 후, 그는 재활병원으로 옮겨진다. 척수손상재활센터(Spinal Injury Rehabilitation Centre, 이하 SIRC)는 네팔에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척수손상 환자를 위한 재활병원이다. 이곳에서 그는 적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동안 의료진과 재활운동, 그리고 심리상담을 지원받는다. 무척 큰 도움이지만 충분치는 않다. 물론 가난 때문이다. 재활치료를 받는 동안 간병인을 따로 고용하는 건 생각도 못하고 대개 가족 중 한 명이 와서 함께 지내며 대소변을 받아내고 침대 시트를 빨래한다. 그동안 가족의 수입은 없고 지출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게 마련이다. 극소수의 경우지만 가족이 그를 돌보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경찰이 가족을 잡아 와서 간병하게 한다. 하지만 재활이 끝난 다음엔 방법이 없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2평 남짓한 방이 내 세계의 전부가 될 거예요”라고 말하던 환자가 있었다. 실제로 네팔의 많은 척수장애인이 집 밖에 나오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네팔의 가옥구조에는 가파른 계단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워만 지내다가 욕창이 생긴다. 그런데 병원으로 데려가는 비용만 한 달 가족 생활비가 드니, 그대로 앓다가 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다. 결혼한 여성 척수손상 환자의 경우, 대개 남편이 두 번째 부인을 들인다. 불법이지만 왕왕 일어나는 일이다. 두 번째 부인이 그녀를 제대로 간병할 리는 없으니, 대부분은 친정으로 돌아간다. 소박맞는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경우라면 형제들이 그녀를 돌보게 된다. 어쨌거나 대부분 여성 척수손상 환자는 경제적 자립능력이 없기에 애물단지가 되곤 한다. 한편 남성 척수손상 환자는 여성보다 교육수준이 높지만, 경제적 능력이 있는 경우는 극소수다. 그래도 대개의 부인은 그를 버리지 않고 돌보며 가정을 꾸려나간다.
한국척수장애인협회의 지원
한국척수장애인협회는 2014년부터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와 SIRC와 함께 척수장애인들을 위한 가옥구조개선 사업을 해왔다. 굽이굽이 시골로 찾아가 척수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램프를 만들고, 화장실과 부엌을 개조해 혼자서라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 2015년에 지진이 났고, 척수손상 환자 수가 급증하면서 재활병원은 그야말로 미어터지게 됐다. 게다가 지진으로 인해 돌아갈 집도 없어진 가족이 많았다. 한국척수장애인협회는 사업 방향을 틀어 환자와 가족이 지낼 수 있는 쉘터를 지었다. 덕분에 환자들은 어려움 속에서 잠깐이나마 쉬어갈 수 있는 곳을 갖게 됐다.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잠시 의탁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것만으로도 네팔의 척수장애인들에겐 큰 도움이 됐지만, 빈곤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은 모두 미봉책일 뿐이었다.
그래서 한국척수장애인협회는 2016년부터 척수장애인의 경제활동 비율과 소득을 늘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직업재활 훈련을 통해 취직 혹은 소규모 사업을 하도록 한 것이다. 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직업재활센터를 건축하고 직업재활 훈련 프로그램을 초기 세팅하기 위해 이곳으로 파견됐다. 직업재활센터는 4월에 완공될 예정이다. 그러나 완공 전부터 현지 매니저와 트레이너들을 채용하고, 쉘터 공간을 활용해 척수장애인들을 훈련하고 있다. 피클 제조, 옷 수선, 사무직 기초 훈련이 진행 중이고, 센터 완공 후에는 제빵 기술도 가르칠 예정이다. 훈련을 완료한 훈련생 중 80%는 성공패키지와 사후관리를 지원받아, 자본이 없어도 개개인이 소규모로 사업을 일굴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무수한 고비가 있었다. 현지인과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갈등, 네팔과 한국의 행정 시스템이 다른 데서 오는 어려움 등.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데 무시무시한 괴물과 싸워야 하는 그런 악몽을 꾸는 것 같은 순간들이 꽤 있었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기에는 1억6천만 원 정도가 부족해서 곤란한 사정이기도 하다. 참, 나는 전신마취 수술도 한 번 받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것들은 자랑스럽기 그지없고, 나를 이해하는 현지인 동료들도 많이 생겼다. 오랜만에 할 일이 생긴 훈련생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는 것도 보람 있는 일 중 하나다. 이제 이것이 개인적인 자랑스러움과 보람에서 끝나지 않고 눈부신 성과를 창출하길, 그래서 많은 척수장애인이 빈곤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끊임없이 네팔의 환경과 구조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당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라거나,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다. 한국에는 한국에서의 불편함이 있고, 그게 때로는 불편함을 넘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네팔도 좋은 점이 많은 나라다. 네팔인 특유의 여유로움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성정은 어쩌면 세계 제일인 것 같다. 만약 아이를 낳아 기른다면, 한국의 경쟁사회보다는 이처럼 여유롭고 따뜻한 사람들 틈에서 기르고 싶다는 생각도 이따금 한다. 거기서 고등교육을 받고 좋은 시설을 누리는 당신보다 이곳에서 기본 교육도 받지 못한, 나쁜 환경에 사는 척수장애인들이 더 행복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높은 영아사망률에서 벗어나고, 사고에서 살아남고,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 욕창으로 죽지 않았으며, 소소하게나마 경제활동을 하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라는 전제 하에 말이다.
다만 나는 당신이 여기 네팔에 이런 삶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부디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살다 가는 것을, 결코 ‘어쩔 수 없지’라는 말로 간단히 이해하지 말아 달라. 나는 훈련생들의 첫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한국은 1980년대까지 네팔에서 쌀을 보내주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당신들도 지금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이 훈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한 사람이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 중 하나입니다. 여기 당신들도 그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칼럼의 처음에 썼듯, 나는 지금쯤 당신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좋겠다. 그래서 이따금 네팔의 척수장애인에 대해 떠올린다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준다면 더욱 좋고, 조금이라도 이 프로젝트를 지원해 생면부지의 타인을 돕는 고귀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 이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전에 이곳의 우리를 한 번 더 생각해주기를 부탁한다. 교육도 재산도 건강도 미래도 없는 우리는 이 나락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오늘도, 지금 이 시각에도 말이다.
*(사)한국척수장애인협회는 네팔 척수장애인 직업재활훈련 프로젝트를 위한 지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주실 분은 kscia@kscia.org 혹은 02)786-8483으로 연락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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