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장애우 그 현장을 가다6]세계와 함께하는 노르웨이 장애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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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함께 하는 노르웨이 장애우들
<노르웨이의 숲>
3월 23일 로스엔젤레스에서 살고 있는 친구와 함께 비디오 테이프 등 우편물을 서울로 부치고 비버리힐즈와 로데오 거리를 차에 탄 채 그저 한바퀴 휘 둘러보는 것으로 미국사회의 탄탄한 빈부격차(?)를 확인하고는 톰 브래들리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운임초과로 1백달러를 더 내라는 영국항공사 직원에게 비행기 시간이 다 되도록 이것저것 시시콜콜 물어 본 덕에 뒷사람들이 아우성을 쳐 그만 요금 받는 것을 잊게 만드는 쾌거(?)를 올리면서 영국항공에 몸을 싫었다.
유럽의 첫 관문인 영국항공은 지금껏 탔던 다른 비행기와는 달리 위험시 대피상황을 설명하는 기내 방송 한 귀퉁이에 수화통역자의 모습까지 집어넣는 수준 높은(?) 모습을 보여 유럽의 장애우복지 수준을 미루어 짐작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오슬로로 직접 가는 비행기가 없는 탓에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는데 날짜 변경선을 넘어가면서 그곳 시간을 착각해 한시간을 더 빠르게 조정해 놓고는 갈아타는 비행기를 놓질까 봐 뛰고, 차를 갈아타고 내려서 또 뛰는 한바탕 소동을 벌였는데 이 때문에 시간이 남아 면세점에서 엽서 몇 장을 고를 수 있었다.
런던에서 오슬로까지는 3시간 남짓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취재일정의 반을 넘어서면서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하는 피로와 종횡무진 날짜와 시간을 뛰어넘는 일정으로 이번 여행 전체를 통 털어 가장 길고 지루했다.
"땡, 땡" 안전벨트를 매라는 경고음에 놀라 눈을 비비며 내다 본 창 밖으로 점점이 흩어진 호수와 숲 그리고 푸르스름하게 얼어붙은 눈너머 저멀리 지평선이 하얗고 둥그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알록달록 동화 같은 오슬로 시내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맑고 깨끗하기는 했지만 하와이에서 느꼈던 밝고 조금은 들떠있는 모습과는 달리 왠지 탁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노르웨이에 대한 이런 편견(?)은 "포네뷰" 공항에 내리면서 백팔십도로 바뀌고 말았다. 시골 역처럼 작고 아담한 "포네뷰"는 다른 곳의 거대한 공항에 받았던 압박감이 아니라 이웃동네에 다니러 온 듯한 훈훈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대합실을 나서자 맑고 쌀쌀한 공기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과 헝클어진 머릿속을 시원하게 씻어내며 새로운 만남,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흥분과 기대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열흘간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은 이희숙씨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특별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노르웨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그와 뭉크 그리고 입센을 꼭 알아야 한다"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하며 카세트에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꽂았다.
바닷가를 따라 마치 목장에 말을 매놓은 것처럼 가지런히 묶여 있는 새하얀 요트와 찰랑이는 바닷물,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솔베이지의 노래" 뭔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환상은 늘 깨어짐으로 그 진가를 발휘하듯 이 노래가 앞으로 열흘간 우리들이 겪게 될 "사랑과 진실"의 서곡이 될 줄이야.
<난센센터에서 만난 "사회적 장애우">
이번 여행에서 만난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 하나 하나가 어느 것 하나 새롭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가졌던 곳이 바로 노르웨이와 독일이었다.
노르웨이나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전통적으로 일본이나 미국처럼 장앵우복지를 비롯한 복지정책의 상당부분을 민간에 떠넘기는 "자유방임형"이 아니라 국가가 거의 모든 책임을 지는 "국가책임형"이며 특히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정책 수준은 세계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직접 보고싶기도 했다.
짐을 풀고 노르웨이 내무성 관리와 시청 뒤편 부둣가가 내려다보이는 고풍스런 식당에서 점심을 들었는데 "사회복지에 관한 모든 책임은 정부에 있다"며 민간부분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는 미국이나 일본의 사회복지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재정적자 등 어려움을 겪는 상태에서 이런 정도의 사회복지 수준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냐는 질문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해 복지정책의 내용이 곧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우리 일행이 짐을 푼 호텔은 시청과 국회의사당 등이 밀집해 있는 오슬로 시내 중심 가였는데 시청 앞 광장은 화강암 대리석 위로 전차들이 다니고 곳곳에 서 있는 노동자조각들 사이로 비둘기 떼가 한가롭게 놀고 있어 한 나라의 중심지치고는 너무도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다음날 우리가 노르웨이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오슬로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정도 거리인 로센버그에 있는 "난센 청소년센터"로 1969년 탐험가인 "난센"의 이름을 따서 처음 문을 연 이곳은 부모의 이혼, 성폭행 등 정신적인 고통으로 가출을 하거나 약물중독에 빠져 "일탈행위"를 하는 13살에서 19살까지 청소년들이 사회적응 훈련을 하는 곳이다.
산비탈에 마치 개척시대처럼 바람에 휘날리는 노르웨이 국기와 검붉은 목조건물 몇 채가 달랑 있는 쓸쓸한 풍경이 "멋진 그림"을 생각했던 우리 일행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지만 6명의 청소년을 사회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12명의 직원이 자유분방하면서도 꽉 짜여진(?)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챙이 달린 모자를 뒤로 돌려쓰고 장난스런 표정을 짓던 "휘키리"는 올해 16살로 중학교 3학년이다. 12살 때 모로코에서 가족과 함께 이민을 온 휘키리는 모로코와 노르웨이간의 문화적 충격 속에서 아버지와 갈등을 겪다 가출했으며 사회복지사무소의 소개로 이곳에 오게됐다.
"휘키니"는 우리 일행을 마굿간으로 데려가 자신이 말먹이를 먹이고 마굿간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곳에서는 이런 식으로 "자기억제"를 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다시 사회로 돌려보내기 위해 한사람 앞에 한 해 6천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고 있다.
"난센 청소년센터"는 이 돈으로 청소년들에게 학교공부는 물론 세탁, 요리 등 가정생활에서부터 여행, 등산, 스키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지켜나갈 수 있는 사회성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곳에서 일정한 과정을 마친 청소년들은 시내 아파트 등에서 살면서 학교나 직장으로 출퇴근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독립할 만한 여유가 있는 경우 따로 나가 혼자 살도록 해 사회 속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하고 있다.
계단이고 복도고 아무데서나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은 물론 누가 선생이고 누가 학생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말투 속에서도 교사들은 자신이 맡은 청소년들과 일대 일로 얘기를 나누고 생활을 함께 하면서 "사회치료"를 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청소년복지를 공부하고 이곳에서 일 한지 8개월이 됐다는 "이레네"는 음식 만들기, 운전, 동물 기르기 등을 맡고 있는데 주급은 5백크로나(약 6만원정도)지만 "먹고 자는데 돈이 들이 않아 충분하다"고 말하고 "덴마크에 돌아가 아동복지 쪽의 일을 하고 싶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10째 "난선 청소년센터"의 책임자로 있는 텁석부리 "젤 토레센"은 "이 이상 더 의미 있는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열의를 가지고 있으며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미용사나 목재상 등으로 성공해 돌아오는 것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인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인 것까지도 지역사회나 국가가 해결해야할 장애"라고 말하고 "이곳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그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54살인 "젤 토레센"은 자신이 이 일에 만족하는 것과는 다르게 가족들은 "언제 이곳을 떠나느냐"고 재촉을 하고 있다고 또 다른 가정불화(?)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모두 함께 준비한 점심식사를 마친 뒤 밖으로 나오자 원장의 어린 딸들이 작은 식탁 위에 사탕이며 과자, 쵸크시럽 등을 놓고 간이 매점을 벌여놓고 있어 동전을 하나 꺼내주자 익숙한 솜씨로 사탕 몇 개와 쵸코시럽 한 잔을 내 놓고는 "많이 준 것"이라고 제법 장사꾼 티를 내기도 했다.
늘 사람들 사이에서 북적거리며 살고 있는 우리와 다르게 차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만 또래 구경을 할 수 있는 노르웨이의 아이들은 차디찬 바람 속에서도 이런 놀이를 통해 스스로 사회를 배워나가고 있었다.
<베트남, "당 반 티", 노르웨이>
노르웨이 도착 사흘째 되는 날 우리는 이번 여행을 통해 가장 인상 깊었던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올해 40살로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에 그의 그림이 걸려있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 "당 반 티"가 바로 그 사람이다.
"당 반 티"와 노르웨이는 단순한 장애우의 성공담을 넘어서 암울했던 베트남 역사의 한 구석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희생자"로서 그리고 언어와 인종 그리고 장애라는 장벽을 넘어서 스스로 삶을 가꾸어 나가는 "개척자"로서 삶의 두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무대라는 점에서 숙명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1953년 베트남과 캄보디아 접경지역인 타이난에서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의 9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당 반 티"는 14살 때 고향 타이난에서 밤에 낚시를 하다 정부군에게 베트공으로 오인돼 총아 맞아 척추와 콩팥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말았다.
전쟁 중이라 변변한 약하나 제대로 없는 타이난 병원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몇 달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티"에게 손을 내민 것은 뜻밖에도 "테레스 데스 홈메스(인간의 대지)"라는 노르웨이의 전쟁구호단체였다.
1961년 스위스에서 결성된 "인간의 대지"는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월남전에서 부상당한 어린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대상자를 모집하고 있었는데 "티"는 월남 전역에서 뽑힌 12명의 다른 전쟁 부상자들과 함께 제2의 고향인 노르웨이와 인연을 맺게 됐다.
처음 1년 동안 치료를 받기 위해 순노스 병원에 입원한 "티"는 당시 책표지 등을 그리던 화가이며 "인간의 대지" 회원인 "오드 후베스텐달"을 만나 그의 양자로 입양해 노르웨이에서 살게 됐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노르웨이에서 "티"는 양아버지 "후벤스텐달"과 자신이 살았던 동네며,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가면서 서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1년 간 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평생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노르웨이에 남게 된 "티"는 시계기술을 배울 것을 권유하는 직업학교 교사의 말에 공부를 시작했지만 흥미를 잃어 그만두고 노르웨이 공립 예술공예디자인학교에서 5년 간 미술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았다.
공예학교를 마치고 순수미술로 유명한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유화와 그래픽을 공부한 뒤 마침내 화가로 정식 등단을 했으며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과 노력이 합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폴란드, 프랑스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 정도로 이제 노르웨이에서 인정받는 예술가로 성장한 "티"지만 단 한번도 자신을 낳아준 조국베트남을 잊지 못해 82년 자신이 직접 그림까지 그려 "베트남에서의 어린 시절"과 86년 고향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느낀 여러 가지 기억들을 적은 "집으로의 여행"이란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런 "티"의 향수병(?) 때문에 고향에 사는 가족들이 그동안 여덟 차례나 노르웨이를 다녀가기도 했다.
더욱이 "티"는 가족들과의 만남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의료시설이 부족해 변변히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노르웨이로 와야만 했던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를 잊지 않고 자신이 전시회 등으로 모은 돈을 모두 모아 남베트남에서 가장 큰 어린이 병원인 "벤 비엔 니동" 병원을 짓는데 보내기도 했다.
"카지네토"란 노인과 장애우 전용주거지에 사는 "티"의 집에서 모처럼 잔치가 벌어졌다. 무릎 위에 도마를 올려놓고 능숙한 솜씨로 파를 썰던 "티"는 "맛있는 저녁을 먹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해 우리 일행도 팔뚝을 걷어 부치고 부엌에서 당근을 씻는다, 계란을 푼다 하면서 한창 법석을 떨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얇은 만두피에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넣고 동그랗게 말아 기름에 튀기는 "월남만두"에 맥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는 "티"의 꾸밈없고 소박한 인간미 그리고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노르웨이에서 만난 동양인이라는 형제애까지 가세해 순식간에 맥주를 넘어서 장롱 안에 감춰둔 그리이스 위스키까지 바닥을 낼 정도로 모두가 흠뻑 취해버리고 말았다.
며칠 뒤 양부모를 만날 수 있었는데 거실 벽에는 "티"와 양아버지가 처음 만나 서로 얘기 대신 그렸던 그림이 가지런히 정리된 채 걸려 있었다.
우리 시골할머니 같이 푸근한 인상의 양어머니 "엘자"는 "티가 항상 낙천적이고 부모에게 순종하면서도 자신이 베트남 사람이라는 뿌리를 잃지 않아 사랑스럽다"고 말하며 "우리들도 티를 통해 아직 가보지 못한 베트남의 풍습과 문화를 배울 수 있어서 매우 좋다"고 티와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 날 저녁 "티"는 베트남에서 자신과 함께 배를 타고 왔으며 지금은 설계감리 공무원으로 일하는 "카오 푸" 그리고 자신을 노르웨이에 데려왔던 "인간의 대지" 회원 가족인 "유르게 고레" 가족 등과 함께 저녁시간을 가졌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녀린 베트남 민요를 부르며 아련한 향수에 젖는 "티"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노 바디 러브스 미(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라고 말하며 싱긋 웃었다.
<"리더 렌넨"에서 배우는 산 교육>
몽고사람들이 말에서 태어나 말에서 죽듯이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키 위에서 태어나 스키 위에서 죽는다고 할 정도로 노르웨이 사람에게 스키는 마치 신발처럼 뗄레야 뗄수 없는 생활의 한 부분으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어 지금도 겨울에는 오슬로 시내 한복판 회사까지 스키로 출·퇴근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오슬로에서 북쪽으로 3시간 남짓 94년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릴리하머 근처 "바이터스텔"은 노르웨이에서도 유명한 스키장이 있을 뿐 아니라 스키가 일상화된 노르웨이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스키축제 "리더 렌넨"이 열리는 노르웨이 장애우 스포츠의 산실이다.
오슬로에서는 그저 쌀쌀하기만 하던 날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추워지기 시작했는데 바이터스텔이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경치도 바뀌어 얼어붙은 피요드르와 울창한 침엽수림 그리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과 바람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태고의 정적 속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저녁 무렵 도착한 바이터스텔은 창문까지 눈이 덮힐 정도로 온통 눈 천지였으며 모터로 움직이는 눈썰매와 스키 사이로 휠체어와 장애우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어 대회전야의 긴장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프레스센터에 등록을 하면서 물어보니 일본과 중국에서 선수는 물론 기자들도 왔다고 하면서 자랑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자랑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이날 저녁 노르웨이 하랄드 국왕부부가 전야제에 참석해 대회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바이터스텔 문화관에서 열린 전야제는 간소하지만 위엄이 있는 근위병의 행진을 시작으로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치며 국왕 내외를 맞는 것으로 시작 3시간이 넘도록 노래와 웃음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특히 이 대회를 맡아서 운영하고 있는 시각장애우 "알링 스투달"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단순히 찬사를 넘어서 존경까지 받고 있었는데 그는 아코디온 연주자로 전 세계를 다니며 5천회 이상의 공연을 한 것을 비롯 시각장애우를 위한 소리 조각품이 있는 스토달 문화센터와 바이터스텔 스포츠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는 노르웨이 시각장애우의 대부이며 특히 왕실과의 돈독한 친분관계를 이용 장애우 스포츠 활동에 왕실의 지원과 참여를 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전야제에 참석한 국왕부처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대부분 시각장애우들로 구성된 연주자들의 연주와 노래를 함께 즐겨 장애우에 대한 왕실의 애정과 관심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내리는 눈 속에서 휠체어 스키 등 장애우 스스로 자신의 체형에 맞게 만든 온갖 장비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리더렌넨"은 하랄드 국왕의 대회선언과 함께 시작됐으며 대회진행 일체를 군인들이 맡아 더욱 이채로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날 대회를 가장 빛낸 것은 뭐니뭐니 해도 소냐 왕비로 스키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올해 56살의 왕비는 시각장애 소녀 "안네 모테"와 함께 선수로 출전해 2시간 4분의 기록으로 550명의 선수 중 170등을 했다.
이미 70년대부터 장애우기금 만드는 일에 관여했을 정도로 장애우 문제와 관심이 많았던 소냐 왕비는 노르웨이 적십자사 부회장으로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장애우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아 짐바브웨 등에 장애우재활센터를 설립하는 등 장애우와 관련된 활발한 활동을 해왔으며 94년 릴리하머 동계올림픽의 문화위원회 명예회장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적극적인 성격으로 소냐 왕비는 평민이라는 신분적 차이를 극복하고 노르웨이를 떠들썩하게 만든 8년 간의 열애 끝에 68년 마침내 결혼에 골인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이날 행사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가족과 함께 나와 장애우들과 함께 어울리는 왕실의 모습을 보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국기를 흔들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삶의 모든 자리에서 장애우들과 함께 하는 노르웨이 어린이들의 모습이야말로 어떤 시설이나 제도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산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적인 연대에 나서는 장애우들>
사실 노르웨이는 시설 그 자체만으로는 평범한 나라였다. 계단을 없앤 에스컬레이터라든가 순노스 병원에서 본 복잡하게 생긴 휠체어 같은 것들이 특별히 눈에 뛰었을 뿐 오히려 버스나 시내 곳곳에서 만나는 모든 시설은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처럼 별로 신통치 않은 시설에도 노르웨이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장애우"의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보장해 주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장애우들의 노력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정부지출의 40퍼센트 가까이를 보건·사회복지 분야에 투입하고 있는 노르웨이는 25년 전부터 "국법에 의하면 모든 국민은 1년까지 질병급여를 받을 수 있으며 만성적인 직업병과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경제적인 원조를 요구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장애우들이 받을 수 있는 연금은 두 종류로 직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장애를 입었을 경우 수입의 60퍼센트 정도를 받을 수 있으며 어려서 장애를 입었거나 전혀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의 경우 의사의 진단서를 첨부해 "장애연금"을 청구할 수 있으며 의학적으로 상태의 변화가 없을 경우 노인연금으로 이어져 재정적인 원조를 계속 받을 수 있다.
노르웨이의 장애우는 모두 70만 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1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정부는 이들 장애우에게 한 달에 최하 6천 크로나(약 70여만원)와 거동이 불편한 사람에게 추가되는 보조자 임금을 주고 있다.
이처럼 잘 발달된 연금제도 때문에 노르웨이 노동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장애연금"을 받고 있으며 이 숫자는 지난 20년간 2배 이상이나 늘어난 것이다. 오슬로의 경우 노인, 노동자의 경우 세 사람에 한 명 꼴로 장애연금을 받고 있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 의회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노르웨이 장애우협회 관계자는 이런 노르웨이의 장애우정책에 대해 "아직도 멀었다"고 말하며 장애우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를 불식시키기 위해 데모와 집회 등을 통해 사회문제화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장애우협회 "유데가드" 회장은 특히 노르웨이의 경우 임신 8주부터 장애아인지 아닌지 가려내 장애아를 가졌을 경우 12주까지는 임산부가 낙태여부를 결정하고 21주까지는 임산부가 사는 고장의 병원에서 위원회를 열어 낙태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밝히고 "이런 식으로 나갈 경우 장애우는 이 사회의 짐으로 생각돼 말살 당해 버리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 문제가 최근 정치쟁점이 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1931년 정부에서 구호물품을 나눠주기 위한 조직으로 만들었던 노르웨이 장애우협회는 장애우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1970년 장애우들이 조직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으며 2억 크로나(240억원)나 되는 전체 운영비의 70퍼센트를 복권사업 등 자체사업 수익으로 충당하고 있다.
더욱이 "독립생활"과 "완전참여, 평등한 삶"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노르웨이 장애우들은 자국내의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우간다, 모잠비크, 팔레스타인 등 제3세계 장애우들과의 연대활동을 위해 지난해 1천만 크로나(12억원)를 지원하기도 했다.
유데가드 회장은 전국 440개 콤뮨 가운데 아직 350 정도 밖에 지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말하고 440개 모든 콤뮨에 지부를 설치하고 정부의 장애우정책을 감시하는 장애우복지 정치단체로 키울 생각이라고 앞으로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장애우협회의 지부가 이처럼 많은 것은 노르웨이의 경우 25명 이상의 장애우들이 모여 조직을 만들고 정부에 조직 운영에 필요한 인건비 등 예산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르웨이의 밤>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몇 가지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가장 이상했던 것은 고속도로 건 시내 건 모든 차들이 대낮에도 전조등을 환하게 켜고 다니는 것이었다. "낭비 아니냐"는 우리들의 질문에 안내를 맡은 "스탄 홀트"는 극지방인 노르웨이는 낮이 짧고 태양이 낮게 떠 지역적으로 어두운 곳이 많아 하루종일 불을 켜고 다니도록 되어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고속도로 휴게소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꼭 눈에 띄는 적십자 모금함으로 유리창 안쪽으로 동전이 탑처럼 쌓여 있어 모금함이 아니라 꼭 "돈 놓고 돈 먹기"하는 야바위 기계처럼 생긴 이 모금함은 잔돈을 넣고 스위치를 눌러 재수가 좋으면 자신이 낸 돈의 5배에서 10배까지도 딸 수(?)있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번번이 지면서도(?) 즐거운 표정으로 동전을 넣곤 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해만 떨어지면 꼼짝할 수 없었던 것과 달리 노르웨이에서는 밤 외출이 자유스러웠으며 또 그만큼 "밤 문화"가 발달돼 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근처에 "엔데스 팝"이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우리의 호프집 같은 이 술집은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9시쯤부터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해 새벽 2-3시까지 흥청대는 곳으로 특히 여자들이 많아 이채로왔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것은 50여명이 넘는 손님이 북적거리고 피아노 연주와 노래 소리로 시끌벅적한 이 술집의 모든 일을 단 한 사람의 종업원이 농담까지 해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손님이 가져온 빈 술잔에 술을 채워주고 담배를 내주면서 인사말을 주고받던 젊은 종업원은 우리일행을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먼저 말을 걸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손님들이 남기고 간 빈 술잔을 나무상자에 거꾸로 담아 솟구쳐 오르는 물로 씻어낸 다음 스팀상자에 넣어 증기소독을 해 말려 놓느라 잠시도 손을 놀릴 새가 없으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밝은 모습, 그리고 낯선 외국인에게 서슴없이 말을 걸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까지 해주는 당당하고 침착한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노르웨이의 밤은 이처럼 술집뿐만 아니라 극장, 오페라 등이 밤늦게까지 공연을 계속해 밤 시간이 오히려 성업 중이었으며 대목(?)을 노리고 나온 거리의 악사들까지 합세해 출근시간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동성연애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서명을 받던 한 아가씨는 노르웨이 어를 모른다고 하자 "너희 나라말도 괜찮으니 서명을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아직도 남은 문제>
노르웨이를 생각하면 잊지 못할 또 한 사람은 91년 오슬로 시장에 당선된 "새보너스 앤 마리"로 오슬로시 사상 처음 여성으로 또 장애우로 시장에 당선 돼 "우먼파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노르웨이를 비롯해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여성들의 역할과 결정권이 크기로 유명해 집권당인 노동당의 당수 즉 수상을 비롯 내각에 상당수의 여성 각료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은 물론 집안에서도 경제권을 장악할 만큼 "여성상위시대"를 구가하고 있는데 그 전통은 수세기 전 바이킹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자들은 한번 전쟁에 나가면 몇 달씩 심지어는 몇 년씩 집에 돌아올 수 없어 집안 일부터 나라 일까지 모든 것을 여자들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여성들의 정치참여와 사회참여가 시작되었다고 하며 이런 전통은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여성들이 경제사회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3월 29일 아침, 마치 박물관에 온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노르웨이 역사에 관한 벽화가 즐비한 오슬로 시청 시장 집무실에서 아침회의를 주재하던 시장은 반갑게 우리일행을 맞고는 일하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하자 커다란 의전용 목걸이를 꺼내 "필요하면 끼고 일하겠다"고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이날 오후 오슬로 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노인요양시설 시찰에 나선 시장은 수행원 한 명만을 데리고 나와 택시를 불러 타고는 현장으로 떠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 다시 한번 우리를 즐겁게(?) 했다.
오슬로 시 차원의 손님을 맞을 때를 빼고는 늘 택시나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일을 하는 시장답게 우리의 노인정과 같은 "묑겔스 가든"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점심을 들면서 시설운영에 필요한 얘기를 나눴으며 일을 마치고 나서는 버스를 타고 시청으로 되돌아갔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시장과 그런 시장과 한자리에서 자유스럽게 얘기를 나누는 시민들, 이런 열린 사회, 열린 분위기가 자칫 행정편위주의나 규제, 감시로 흐를지 모르는 시 행정의 경직성을 막기 위한 노력이라면 배워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5년 포스그룬에서 태어난 "앤 마리"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약물중독으로 손과 발이 자라다만 것처럼 짧았으며 왼쪽 다리 역시 무릎 윗부분부터 의족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전혀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고된 농사일을 시켰으며 이때의 경험이 자신을 장애우로 차별 지우기보다는 그저 남과 다름없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자신의 수많은 이력 중에서 87년 스톡홀름 유엔 장애우전문가 모임의 대표와 지난해 뱅쿠버 유엔장애우회의 사무국장을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앤 마리"는 84년 노르웨이 장애우연합회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당시 수상의 경제자문관이던 "토레 에릭센"과 결혼했다.
시장선거 당시 상대편을 지지하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장애우는 시장 일을 할 수 없다"는 비방이 있었는데 당시 이와 관련해 벌어진 논쟁은 노르웨이 국영방송인 "엔알코(NRK)"에 방송되기도 했다.
당시 그녀를 비방했던 사람이 지금도 여전히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어 "왜 제제조치를 취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선거 철에 한 얘기를 가지고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남편과 단둘이 살고 있는 그녀의 집에는 "사회주의자"였던 과거 경력을 말해주듯 마르크스, 레닌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북한에서 나온 "김일성 전집"까지 있었다.
"장애우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같은 학교,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우나 정신지체장애우들이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흩어져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앞으로의 정책방향을 밝힌 앤 마리는 오슬로시 안내 책자에 서명을 해 하나씩 나눠주면서 "노르웨이의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척추장애 종합병원 "순노스">
오슬로에서 약 45분 거리인 네소덴 반도에 있는 척추장애전문병원 "순노스"는 1975년 처음 문을 열었으며 130여명의 환자와 자원활동자를 포함 450명의 직원이 일하는 노르웨이 척추장애우 정보센터로 유명하다.
순노스 병원은 척추장애(교통사고나 산재환자 전문, 34개 병실), 복합부상(척추 이외의 부상. 20개 병실), 뇌손상(17개 병상), 뇌일혈·뇌출혈 장애(40개 병상)의 4개 구역으로 나눠져 있으며 14명의 의사가 현재 약 950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오슬로 콤뮨은 이 병원의 운영을 위해 매년 2천만 크로나(2억 4천만원)를 지원하고 있으며 다른 주에서 오는 환자를 위해 오슬로외의 다른 콤뮨으로부터 6천만 크로나(7억 2천만원)를 지원받고 있다.
순노스의 특징은 다른 나라의 재활병원과 달리 응급환자 처리 시설이 잘 되어 있으며 단순한 치료가 아닌 심리치료사, 언어치료사 등이 참여하는 종합적 전문가 조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순노스는 휠체어 장애인의 운동을 위해 복도를 길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음식 만들기, 직물짜기, 운전 등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기능을 치료과정에 포함해 의료 적인 재활뿐 아니라 사회적인 재활까지 담당하고 있다.
특히 장애우들이 2주정도 병원에 머물면서 자신의 장애와 극복 방법 등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주고받는 그룹 모임(8명이 한조)인 "티 알 에스(TRS)"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장애인 재활훈련은 지역사회, 주, 전국적 트레이닝센터(순노스와 같은)의 3단계 구조를 갖고 있으며 트론하임에 순노스와 같은 병원을 하나 더 세울 예정이다.
하지만 병원까지의 거리가 멀어 응급환자 수송에 어려움이 있으며(아주 급할 경우 헬리콥터 이용한다), 최근에는 예산이 점차 줄고 있어 적절한 사용처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직원들의 평균 임금은 17만 크로나(약 2백만원) 정도로 다른 곳에 비해 다소 높은 편이다.
글/전홍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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