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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한 수화통역사 눈에 비친 청각장애우들의 그늘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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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수화통역사 눈에 비친 청각장애우들의 그늘진 삶
소수이지만 범죄를 저지르는 장애우들이 있다. 특히 청각장애우들은 장애 특성상 비장애우와 신체 구조가 다를 바 없어 그만큼 범죄 유혹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 청각장애우는 어떤 환경에서 어떤 범죄를 저지르는가. 한 수화통역사를 통해 청각장애우들의 그늘진 삶을 들어본다.
이태곤 (함께걸음 기자)

 

<수화통역사로 30년 근무>
 현재 청각장애인복지회 복시사 업부에서 상담사로 일하는 김진원(56)씨는 올해로 근무 30여년째를 맞고 있다.
 집안 사촌형이 청각장애우였던게 계기가 돼 수화를 할 줄 아는 비장애우가 드물던 당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63년부터 청각장애우들과 인연을 맺은 그는 반평생이라는 시간 속에 청각장애우 세계의 변천사를 담아온 산증인이다.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할 무렵에는 막 서울 마포 사회복지연합회 건물이 들어서고, 군사정권이 사회단체 통합 명분을 내세우며 강제로 복지단체를 "한국사회복지연합회"라는 한 단체로 묶어 청각장애우 단체가 한국사회복지연합회 산하 "농아분과"라는 기이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을 때였다.
 사무실이 비원 옆에 있었는데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 직원으로 채용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통역만이 아니라 수익사업 일도 해야 했다. 그가 주로 한 일은 미 8군 민사처에서 나오는 구호물자를 얻어다 청각장애우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는데 그는 이 일을 한동안 했다.
 그러다가 한국사회복지연합회가 수익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는 등 통합단체가 부작용을 일으키자 2년여만에 군사정권은 복지단체를 다시 분산시켰고 그는 그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청각장애우들을 일선에서 상대하는 수화통역사로 자신의 전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그가 여타 다른 할 일들이 산적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화통역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가 활동할 당시에는 수화를 할 줄 아는 비장애우가 드물기도 해서였지만 그보다는 그늘진 삶을 사는 청각장애우들의 의사를 통역해서 재판과정에서 올바로 전달해줄 필요성이 무엇보다 절실했기 때문이다.
 소위 범죄를 저지른 청각장애우들은 당시만 해도 인권의 사각지대에 높여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다 보니 경찰 진술과정에서부터 구타를 당하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진술을 강요받기 일쑤였고 재판과정에서도 심각한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실정에서 누군가는 경찰서와 법원을 오가며 청각장애우들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해줘야 했는데 바로 그 일이 그에게 배당된 것이다. 그래서 제도 자체가 없기 때문에 법무부 공식 수화통역사는 아니지만 그는 그 동안 범죄를 저지른 청각장애우들의 수화 통역을 거의 전담해 왔다. 이 때문에 그는 소수에 한하지만 청각장애우들의 어두운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토바이 날치기가 대표적인 범죄>
 그의 기억에 의하면 청각장애우들의 초기 범죄는 주로 절도였다. 소매치기도 있었지만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는 게 주를 이룬 범죄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83년 이후 오토바이 날치기 범죄로 기승을 부렸다고 하는데 이 범죄의 시초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83년쯤 일거예요. 광주 서부경찰서에서 형사들이 올라왔어요. 3백만원을 오토바이 날치기 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무래도 청각장애우들이 저지른 범죄 같으니 협조를 요청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청각장애우인지 알았냐고 물어 봤더니 형사 얘기가 잃어버린 수표 한 장이 목포에서 나왔는데 옷을 사간 사람이 청각장애우였다는 겁니다. 그래도 형사들은 어느 놈이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청각장애우를 이용했구나 생각하고 의심을 안 했는데 혹시나 해서 농아복지회 광주 사무실 앞 다방에 가서 오토바이를 잘 타는 청각장애우들이 여기에 자주 오느냐고 물어 봤대요. 그랬더니 다방 레지 얘기가 청각장애우들이 오토바이를 잘 탄다고 그러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차 청각장애우들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구나 판단하고 수사를 그쪽 방향으로 전개했다는 거였어요. 결국 이 사건으로 청각장애우 대여섯 명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이 사건 이후 오토바이 날치기 범죄가 우후죽순처럼 생긴거예요. 그전에는 이 범죄가 없었어요."
 "광주 사건"은 청각장애우들만 저지른 게 아니라 비장애우 조직에 청각장애우들이 끼어 범죄를 저지른 경우였다. 그런데 이 사건이 터진 후에 청각장애우들이 범죄 수법을 배웠고 한탕 하면 많은 돈이 생기니까 그 후에는 청각장애우들로만 조직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한창때는 3개파가 있어 활동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일반인이 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은행 앞에서 기다렸다가 날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에 들어가서 돈을 얼마 찾나 탐문까지 마친 후에 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지능화 되고 있다는 이 범죄는 한번에 2억원이 넘는 돈을 날치기하고, 7년 전에는 진주 사천 비행장에서 4천만원이 넘는 공군 월급을 턴 적도 있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래서 지금도 경찰에서는 오토바이 날치기 사건이 일어났다 하면 80%는 청각장애우들이 저지른 범죄라고 단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옛날에는 청각장애우가 저지른 오토바이 날치기 사건에 대해서 법원도 장애우인걸 감안해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거의 초범일 경우라도 1년의 실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버렸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청각장애우들은 주로 각 시도마다 있는 청각장애우 휴게실에 모여 범죄를 모의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장애우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데 선배들 꼬임에도 빠지고 오토바이를 잘 타면 스카우트되기도 한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이렇게 범죄를 저지르다 사망하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등 심한 중상을 당하는 장애우들이 많다는 것이다.
 "도망갈 때 시속 1백킬로가 넘게 속도를 내다보니 차에 부닥치면 그대로 사망하는 겁니다. 굉장히 위험해요. 생명을 내 놓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 다리가 부러진 청각장애우도 많이 봤어요."
 재범율도 심각한 편이다. 전과 14범∼15범도 있고 심지어는 보호감호소에 간 청각장애우들도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청각장애우들로 하여금 생명을 내 놓고 이런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것일까? 그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자신이 한때 청각장애우들에게 한말을 상기해 냈다.
 "제가 청각장애우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막 돌아다녀라. 사회를 시끄럽게 하면서 막 돌아다녀라. 왜 그랬냐면 정부에서 대책을 세워주지 않으니까 안타까워서 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청각장애우들이 살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줘야 하는데 쇠귀에 경 읽기니 오죽하면 제가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의 경험에 따르면 비장애우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범죄를 저지르는 청각장애우들은 대개 성장과정이 불우한 장애우들이다.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서 많은 상처를 받고 그러다 보니 사회에 대한 반발심과 저항의식이 싹터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경우가 대다수다.
 "제가 이런 일 하지 말라고 타이를 거 아닙니까. 그러면 뭐라는 줄 아세요. 내가 벙어리로 태어나서 어디가서 과장이 될 거요, 부장이 될 거요, 한 세상 살다 가면 그만이지 선이고 악이고 어딨느냐 이거예요. 난 살 만큼 살다가 가면 된다 이거지요."
 범죄를 저지른 청각장애우들의 사후 대책 문제도 심각한 문제라고 말한다. 청각장애우들이 교도소에 들어가면 일반 범죄자들과 같이 수용되는 경우가 많고 그러면 말이 통하지 않아 바보 취급을 당하는 등 이건 교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혹독한 징역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그래서 청각장애인복지회에서 "교도를 수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가서 해야지 목사나 스님이 가서 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취지로 법무부에 건의를 해 지금은 복지회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안양 교도소로 청각장애우들을 몰아주고 있지만 여전히 분리 수용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교육의 필요성 절감>
 그는 일반적인 통역이 서로간의 의사를 전달해 주는데 그치는 것에 비해 수화통역은 청각장애우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파악하고 되도록 그 욕구가 충족될 수 있도록 통역을 이끌어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지론을 가지고 통역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는 먼저 자신이 있는 데서 청각장애우를 때리면 수화통역을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겠다는 다짐을 받고 통역에 들어간다. 어떤 때는 형사들과 다툼을 벌일 때도 있는데 그건 그에게까지 형사들이 고압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그는 "이 사람아, 나는 협조하러 왔지 피의자가 아냐"라고 얘기하지만 씁쓰레한 심정은 지울 수가 없다.
 청각장애우들이 저지르는 범죄 한 건을 가지고 경찰 수사과정에서부터 검찰 조사, 심지어는 재판까지 참가해야 하는 그는 변호사도 상대해야 할 때가 있어 족히 7∼8번은 관을 들락날락 거려야 한다. 그래서 "점장이들 말로 관재수를 항상 끼고 다닌다."고 말하고 있다.
 여태까지 통역해준 장애우가 줄잡아 1천명이 넘는다는 그는 어려운 점을 묻자 "범죄를 저지른 청각장애우가 경찰에서는 범죄를 시인해 놓고 법원에서 자신의 범죄를 부인하는 경우도 있어 이럴 때면 통역한 사람도 거짓 통역으로 처벌받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이런 어려움이 있는 반면 그래도 청각장애우들이 자신을 기억하고 수화통역사로 자신을 찾아주는 것을 하는 것을 그는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의 수화통역은 범죄를 저지른 청각장애우에 한하지 않는다. 청각장애우 집안의 대소사 상담을 비롯 가정불화와 결혼한 장애우의 고부간 갈등 그리고 심한 경우 친자확인 상담까지도 처리한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가슴 아픈 사연 한 토막,
 "아주 오래 전 일인데 부유한 집에 사는 20대 청각장애우 장남이 찾아와서 통역을 의뢰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한테 가서 그 분이 나를 낳아준 친어머니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해달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내 밑에 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동생이 용돈을 달라고 그러면 주든 안 주든 인상을 쓰지 않는데 내가 달라면 주든 안주든 어머니가 인상을 쓴다 이거예요. 자기는 시각으로만 판단하는데 이런 일을 여러 해 겪다보니 의심이 생긴다 이거지요. 그래 그 집에 가서 어머니와 얘기했더니 어머니가 놀라 자빠지는 거예요. 나는 이놈 때문에 내가 죽어도 눈을 못 감을 텐데 친자식이 아니라니 이게 무슨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냐는 거예요. 결국 오해가 풀어져 친자 확인은 됐지만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어머니에게 충고했죠. 자식에게 애정을 가졌으면 자식과 의사를 통할 수 있는 수화는 왜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제서야 어머니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더군요."
 이렇듯 가족간에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도 문제지만 이웃간의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도 커다란 문제이다.
 여러 해 전 그는 강원도 산골에 사는 한 농촌 청각장애우가 음료수에 독극물을 탔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붙잡혀간 사건을 맡아 통역에 나선 일이 있다. 그 청각장애우는 세상에 청각장애우가 자신밖에 없는 줄 알 정도로 무지했고 따라서 전혀 수화를 할 줄 몰랐다. 할 수 없이 그가 손짓 발짓을 통해 들어본 사건의 내용은 이랬다.
 이웃간에 샘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청각장애우는 그 샘물을 먹고 아이들이 배가 아프다고 그래서 깜짝 놀랐다. 그래서 샘물을 보니 물에 벌레가 있었다. 청각장애우는 샘물을 깨끗하게 치울 목적으로 논에 벼를 심고 와서 물을 퍼냈다. 물이 진흙탕이 되자 옆집에 사는 비장애우가 달려와 "왜 물을 못 쓰게 만드느냐"며 삿대질을 했다. 청각장애우가 온몸으로 설명을 했지만 비장애우인 이웃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멱살잡이까지 하고 나서 청각장애우는 벌레를 죽일 목적으로 이번에는 바가지에 농약을 풀어 샘물에다 탔다. 그 모습을 보고 이웃은 "아 이 사람이 나랑 싸우고 난 뒤 나를 죽일 목적으로 물에 농약을 타는구나" 생각하고 그를 고소한 것이었다. 청각장애우는 경찰에서 "농약을 타니 벌레가 다 죽고 샘물이 깨끗하게 치워졌다"고 설명했지만 경찰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통역을 하자 경찰은 알아들었고 그 청각장애우는 무죄로 풀려나올 수 있었다.
 이 사건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수화를 모르는 청각장애우가 많아 그는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일반 교육을 받지 못하고 농아학교도 가지 못하고 청각장애우들과 사귀지도 못한 채 집에만 있는 장애우들은 필연적으로 상실감을 더 맛보게 된다. 이 들이 범죄 유혹에 약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청각장애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범죄를 막으려면 우선 사회복지보장제도가 완벽하게 이루어져서 청각장애우들의 생활기반이 열린다면 당연히 범죄야 축소되겠지만, 이 사회와 같이 호흡 할 수 있도록 교육도 겸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청각장애우들을 교육시켜서 비장애우 수준까지 올려주면 청각장애우 복지사업은 끝난다고 봅니다."
 그는 오늘도 그늘진 삶을 사는 청각장애우들을 만나고 있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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