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장애우 그 현장을 가다5] 인호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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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호의 하늘
<노숙자들의 천국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도착 이틀째인 3월 18일, 오늘은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대학에서 우주물리학 공부를 하고 있는 뇌성마비 장애우 김인호씨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우리가 김인호씨를 취재대상으로 택한 것은 자신의 조국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는 한 뇌성마비 장애우가 미국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서 어떻게 살고 있으며 또 그런 삶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거기가 거기 같아 보이지만 로스엔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고속도로로 거의 10시간 가까이 달려야 하는 먼 거리이기 때문에 아침 일찍 호텔에 짐을 맡겨 놓고 필요한 장비만 챙겨 차에 올랐다.
가는 길에 청각장애우 언어훈련 기관으로 유명한 "존 트레이시 크리닉"에 들러 닷새 뒤에 있을 취재 약속을 해 놓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안내와 운전을 맡은 곽정인씨는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른다"며 일부러 선셋 해변, 레돈도 해변 등 영화에서나 들어봤던 아름다운 해변가를 택하는 세심함을 보이기도 했다.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며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에 넋을 잃는 것도 잠시뿐 지루하게 끝없이 뻗어 있는 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기기가 일쑤였다. 10시간 이상을 길에서 보내야 하는 억울함을 보상받기 위해 지도를 뒤지던 우리에게 곽저인씨가 추천한 곳은 "솔뱅"이라는 일종의 민속촌과 같은 곳이었다.
"솔뱅"은 미국 땅에 정착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만든 관광지로 자그마한 도시 전체가 네덜란드 풍의 건물로 꽉 들어찬 동화 속의 도시 같았으며 200년이 조금 넘은 자신들의 짧은 역사를 늘 아쉬워하는 미국인들이 네덜란드에서 직수입한 골동품과 기념품으로 옛날의 정취를 흠씬 느끼는 역사를 파는 곳이었다.
길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농장에서는 중남미계통의 고용 농부들이 따가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농작물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그 넓은 농장을 가로질러 파이프를 설치하고 스프링 쿨러로 물을 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뉘엿뉘엿 해가 질 때쯤 도착한 샌프란시스코의 첫인상의 로스엔젤레스와는 다르게 길이 좁고 복잡한 것이 어딘지 동양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항구도시로 일찍부터 외국인의 왕래가 잦아서 그런지 세계 각 국의 풍물이 모두 모여 있는 다양함과 자유분방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열린 도시였다.
그러나 길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슬리핑백을 뒤집어쓴 노숙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가 하면 건너편에서는 화려한 불빛에 쇼핑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의 물결이 넘치는 모습은 얼핏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더욱이 이들 노숙자들은 자신들이 정해 놓은 자리가 있어 자고 난 뒤에는 깨끗이 청소까지 하는 주인의식(?)을 발휘하기도 해 그 터의 주인으로부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트루만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을 비롯 유명인사들이 묵기도 했다는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케슬러호텔에 짐을 풀고 특수교육을 전공하는 박현옥씨 자매의 영접을 받았는데 두 분의 정겨운 태도와, 로스엔젤레스와는 다르게 밤거리를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분위기 그리고 태국 음식점에서 맛본 색다른 음식으로 모처럼 마음 편히 이국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오래 살고 번성하여라…>
다음날 아침 7시 50분 인호가 살고 있는 학생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인호의 아침 담당 "마이클 사라비아"가 우리보다 먼저 와서 아침 식사와 통학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핏 둘러본 인호의 방은 막 지구를 박차고 떠나는 우주선 사진을 비롯 텔레비전 영화 "스타트렉"에 나오는 주인공들 사지이 여기저기 붙어 있어 전공에 걸맞는 우주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공상과학 영화 "스타트렉"의 광적인 팬인 인호는 이 모임의 회원으로 책상 아래 50여개가 넘는 이 텔레비전 방송의 녹화 테이프는 물론 홍보용 티셔츠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 중에 특히 귀가 뾰족한 "맥코이 박사"를 좋아한단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와 입으로 누를 수 있도록 세워진 키보드 그리고 3권의 책을 동시에 펼쳐놓고 빙빙 돌려가면서 볼 수 있도록 자신이 만들었다는 둥근 책받침을 비롯 한쪽 벽면을 온통 꽉 채운 열쇠고리와 침대, 휠체어 등으로 발디딜 틈이 없이 꽉 차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어지럽게 흩어진(?) 인호의 방은 전화기, 전등, 라디오 등 모든 가전제품이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어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입으로 물어서 사용하는 화살촉처럼 생긴 막대기 하나로 모든 것을 작동시킬 수 있도록 된 최첨단의 미래형 주거지였다.
인호의 책가방을 챙겨주던 "마이클"은 역시 버클리대학 학생으로 인호와 함께 일한 지 1년 반 됐으며 한시간에 6달러 60센트(우리 돈으로 약 5,500원 정도)를 받고 아침식사에서 등교준비까지 1시간 30분동안만 일하는데 인호가 "착하고 똑똑할 뿐 아니라 친구도 잘 사귄다"고 칭찬했다.
인호가 필요로 하는 보조원의 숫자는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밤에 잠자리를 챙겨주는 4명뿐이지만 침대 머리맡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12명의 보조원 명단이 붙어 있었는데 이들은 언제든지 인호가 필요한 시간에 전화를 하면 달려 올 수 있는 대기자들이었다.
인호가 살고 있는 학생아파트는 너와지붕 같은 나무판자로 벽을 댄 옛스런 3층 건물이었는데 지진이 작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집들은 콘크리트보다는 이처럼 나무를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과 목련 사이로 배낭을 맨 학생들이 손에 책을 들고 빵을 씹으며 등굣길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걷거나 자전차를 타고 있었다.
아파트 앞 게시판에는 필요 없는 물건을 팔거나 물물교환을 요구하는 광고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게중에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가벼운 비판을 담고 있는 것도 있었다.
특히 인호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스스로 자신의 집 앞을 청소하고 잔디를 깎아야 하는 규칙이 있는데 예외는 없어 다른 친구가 집 앞 청소와 잔디를 깎아주는 대신 인호는 컴퓨터를 이용해 필요한 서류를 뽑아주는 상부상조를 하고 있다.
아침식사를 마친 인호는 전동휠체어를 몰고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강의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학교로 향했다.
<장애우의 천국, 그리고 환상>
"매튜 김". 이제는 컴퓨터로 전화를 걸고 유창한 영어로 필요한 부품을 주문하는 인호의 성공(?) 뒤에는 한국의 모든 장애우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좌절의 어두운 터널이 있었다. 그리고 그 터널은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여전히 "현실"로 남아있는 것이다.
1983년 삼육재활원 중학교 졸업반인 인호는 까닭 없이 아파오는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마지막 학기를 그만 쉬어버렸다. 하지만 정작 아픈 곳은 몸이 아니라 "어차피 한국에서는 고등학교에 못 갈 것"이라는 앞날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상처받은 마음이었다.
인호가 11살 때 간암으로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인호와 두 동생을 키우던 어머니 이성화씨는 이즈음 부쩍 방황하는 아들의 장래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했으며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인호에 대한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이민"이라는 최후의 수다을 선택하게 된다.
간신히 중학교 졸업장을 손에 쥔 인호와 어린 두 동생을 데리고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한 이성화씨는 특수학교 보조교사와 피아노 강사 등으로 낯선 미국생활에 적응해 갔으며 다른 가족과 마찬가지로 인호도 스스로의 방법으로 미국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두 동생이 동네의 다른 한국인 아이들과 우리말로 노는 동안 인호는 보조자로 나온 미국인들에게 몸을 맡겨야 했는데 오직 영어만을 사용하는 보조자와의 만남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우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됐다.
1년간의 특수학교와 제임스 먼로 고등학교를 마친 인호는 장애우의 전략종목인(?) 컴퓨터 프로그램을 권하는 담임의 제의를 거절하고 손으로 계산하고 푸는 수학보다는 "앉아서 생각만 해도 되는" 물리학으로 전공을 결정하고 버클리 대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아들을 늘 곁에 두고 돌봐주려는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특히 미국에서는 대학진학에 부모의 도장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버클리가 너무 멀다"고 반대하는 어머니에게 인호는 버클리와 그보다 열배도 더 먼 동부지역의 대학 중 택일하라고 고집을 부려 하는 수 없이 버클리를 선택하도록 하는 재주(?)를 부리기도 했다.
장애에 대한 몰이해는 미국이라고는 예외는 아니어서 대학입학 후 프랑스어를 신청한 인호에게 교수는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느냐"는 상식 밖의 질문을 해 "나에겐 이미 영어가 외국어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했으며 물리학 시간에는 중국인 교수로부터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느냐"는 말을 듣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호의 학교 생활이 이렇게 괴로움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주정부에서 나오는 장애우 보조자임금은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 일도 재미있고 임금도 높은 편에 속해 인기가 있어 신청자들이 많아 때로는 "면접"까지 봐서 파트너를 뽑을 정도였다.
특히 여름철에는 여행을 즐기는 미국학생들이 장애우와 함께 공짜로 여행할 수 있다는 일거양득을 노리고 몰려드는데 인호는 이왕이면 대하기도 쉽고 부드러운 여학생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말하며 킬킬거렸다.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영주권을 가진 장애우에게 월 생활비 640달러(50만원 정도)를 비롯 아파트비용으로 한 학기 1천4백달러(110만원 정도), 보조자 임금을 월 1천달러(80만원 정도)와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버클리 대학에서는 전액 장학금과 한 해 2천달러(160만원)의 책값을 지급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인호는 이처럼 막대한(?) 재정 지원에도 "주 정부의 예산은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탁상공론"이라고 투덜거리며 한 달에 집에서 2백달러 정도의 용돈을 받아야 생활이 가능하다고 자신의 딱한(?) 사정을 하소연했다.
일부 사람들의 장애와 유색인종이라는 이중적인 몰이해에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실력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믿은 인호의 피나는 노력과 그런 인호를 이해하는 더 많은 주위 사람들이 어우러져 빚어낸 결과였으며 그 마지막 결실을 위해 인호는 지난 9월 대학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우주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인호는 혹시 자신의 이런 특별한 경우를 미국 사회에서는 으레 그런 것인 양 오해할지 모르는 한국의 다른 장애우들에게 "미국은 절대 장애우들의 천국이 아니다"라고 경고하고 "오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라고 미국에 대한 일부 장애우들의 무조건적인 동경에 일침을 가했다.
<민속음악, 펑크족, 휠체어…>
학교 어느 곳에서 보아도 눈에 띄는 "캠프 벨"을 중심으로 울창한 숲과 옛스런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버클리 대학은 특히 동양계 학생들이 많아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으며 특히 "장애우학생프로그램(DSP)"을 운영하고 있어서 그런지 교내 곳곳에서 휠체어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버클리 대학이 운영하고 있는 "장애우대학프로그램"은 입학전의 상담에서부터 학업, 주거, 취업문제 등 장애우 학생이 학교생활을 통해 겪게 되는 모든 문제를 상담하고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을 "평등하게 교육받을 기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버클리 대학은 약 7백여명이나 되는 장애우 학생을 위해 20여년 전부터 "골든베어(황금 곰)센터"라는 장애우 학생 전용회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휠체어 수리와 보험업무(전동휠체어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보험에 들어야 한다)는 물론 동아리, 학교생활 상담 등을 위해 25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손을 전혀 쓰지 못하는 인호는 "골든베어센터"로 들어가면서 휠체어에 탄 채 발끝으로 문을 여닫는 장치와 층별 표시까지 모두 발로 조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엘리베이터를 소개하며 "다 내가 학교측에 요구해서 만든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인호가 수업을 받는 강의실 뒤편에는 학교 안내지도가 2개 서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장애우 학생을 위한 것으로 거기에는 휠체어로 이용가능한 학교내의 모든 길이 표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밤에는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도 있다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어 버클리의 장애우 프로그램이 그리 만만치 않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점심시간 배고프고 주머니 가벼운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 대학광장은 환경운동 관련 집회와 "선"과 "명상"등 각종 모임에 대한 회원모집 안내, 남미의 민속음악을 직접 연주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테이프를 파는 아마추어 연주가들 그리고 색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늘어뜨린 펑크족 사이로 씽씽 달리는 휠체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리는 그야말로 인종박물관이었다.
저녁을 마친 인호는 친구들과 함께 영화구경을 가기 위해 이제 막 네온사인이 켜지기 시작한 거리로 나섰는데 친구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어둠 저편으로 자유롭게 나아가는 인호를 바라보며 비 온 뒤의 맑은 햇살 같은 개운함을 맛볼 수 있었다.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오는 길에 지구상에서 가장 커다란 생명체라는 "메타세쿼이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왕의 계곡(킹스캐년)"에 들러 사람들 사이에서는 겪지 못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100미터가 넘는 높이의 거대한 나무들이 채 녹지 않은 눈밭에 마치 화석처럼 우뚝우뚝 솟아있는 광경은 인간이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이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깨닫게 해준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밤중을 달려 돌아오는 길에 길가 공중화장실에서 장애인과 안내자가 서로 성(남녀)이 다를 경우에도 화장실을 함께 이용할 수 있다는 재미있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가끔 자원활동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장애우와 안내자가 서로 다른 경우 화장실 출입이 어려웠다는 얘기를 들어왔던 터라 고속도로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 표지판이 더욱 섬세하게 느껴졌다.
<낙서, 그 저항의 문화>
미국을 여행하면서 받은 여러 가지 느낌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뭐니뭐니 해도 "그립피드"라고 하는 "낙서"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조차 정확한 영어 스펠링을 모르고 있는 이 낙서는 미국사회의 복잡하고 헝클어진 단면을 잘 드러내는 문화적 싸움의 현장이었다.
특히 로스엔젤레스의 경우 공터, 건물 벽은 물론 심지어 시내버스 지붕꼭대기까지 스프레이를 이용해 낙서를 할 정도로 낙서는 하나의 새로운 문화, 그것도 백인들의 지배에 짓눌린 흑인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저항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또 하나 이런 낙서는 단순히 불만을 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갱들의 세력권을 결정하는 경계표시와 마약거래를 위한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알림판의 역할까지 하는 등 다목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물론 이론 낙서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만약 현장에서 발견될 경우 수백달러의 벌금과 구류를 살아야 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더욱 대담하게 위험한 지역으로 진출하거나 새로운 형태를 개발해 내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15살짜리 흑인소년이 학교도 그만둔 채 1년 반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샌디에고까지 스프레이 하나만 들고 낙서를 하고 돌아다니다 잡혔는데 그 피해액이 1백30만달러(10억원 정도)나 되는 것으로 밝혀져 미국 전체가 떠들썩하기도 했다.
이처럼 낙서 족들이 극성을 부리자 경찰은 이들의 작품 필체(?)를 컴퓨터에 입력해 낙서 광들을 추적하고 있는데 낙서 족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적어도 한 사람이 서너 가지 이상의 필체와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낙서에 대한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낙서에도 등급(?)이 매겨져 더 위험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여자 친구나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데 이 때문에 차들이 1백킬로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고속도로 표지판에 매달려 낙서를 하거나 지하철과 함께 달리며 낙서를 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또 게중에는 자신의 작품을 증명하기 위해 현장에서 자신을 찍어놓은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로스엔젤레스 시는 이런 낙서 족들 때문에 한해 1백만달러(8억원 정도) 이상의 예산을 쓰고 있다고 한다.
단순히 "낙서금지"에서부터 자신의 이름, 욕설 등 천차만별의 내용을 감고 있는 낙서가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낙서를 통해 반항적인 젊은이의 심리상태와 흑백간의 갈등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하는 등 낙서는 미국사회의 복잡하고 헝클어진 단면을 드러내는 사회현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고 있다.
<희망, 보호 그리고 격려>
3월 22일 오전 9시. 로스엔젤레스 웨스트 아담스 거리 "존 트레이시 크리닉"의 하루는 아이들을 데려오는 부모들의 자동차 행렬과 차에서 내리며 서로 나누는 인사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50년 전 영화배우 "스펜스 트레이시"의 아들인 청각장애우 "존"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청각장애우 언어훈련 기관은 태어나서 6살까지의 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며 일반 가정과 꼭 같은 모양의 방을 만들어 아이들이 생활 속에서 "말"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부모들이 반드시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청력과 연령 그리고 언어습득 정도에 따라 단계별로 자신에게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언어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음향전문가가 참여해 아이들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크기와 높이 등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그 진행상황을 점검하는 등 "말"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조사를 꼼꼼하게 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50여명의 전체 직원 중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 15명 모두가 해당분양의 석사학위 이상 학력을 가진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으며 이런 독특한 운영방식 때문에 미국내의 다른 장애우 기관과는 달리 이곳에는 자원활동자들이 참가할 수 없다고 한다.
교사와 어린이가 일대 일로 만나 수업을 하는 언어훈련실은 책상 하나와 몇 가지 소도구가 놓여 있는 아주 작은 방이었으며 수업을 받는 어린이를 위해 사진촬영도 못하게 할 정도로 신경을 썼는데 이날 수업을 받은 "존"은 이곳에서 3년째 언어훈련을 받고 있는 4살짜리로 처음에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으나 이제는 위, 아래 등 추상적인 개념을 제외한 사물의 이름 등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고 한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수업을 진행하던 교사 "케이트"가 "존"에게 얘기할 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채지 못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으며 보청기를 낀 "존"은 게임 같은 수업을 통해 사물의 이름과 말하기 훈련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일반 가정의 구조를 그대로 재현한 "모델 홈"에서는 부모와 교사가 어린이와 함께 말하기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교사는 부모와 아이가 나누는 대화 내용을 듣고 가끔씩 칭찬을 해줄 뿐 교육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부모와 아이들이었다.
안내를 맡은 홍보담당 "카렌"은 "이 훈련은 아이들보다는 오히려 부모들에게 더 중점을 두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자녀와 부모가 함께 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청력검사"등 간단한 진단을 포함해 일주일에 적어도 70-80 가정이 이곳을 찾으며 지난해만도 9천여 가정이 이곳을 거쳐갔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보내오는 각종 청각장애에 관한 물음과 부모교육 등도 실시하고 있는데 매년 여름에 열리는 여름학교에는 세계 전역에서 청각장애와 부모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기관이 미국전역을 통털어 로스엔젤레스 오직 한곳 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주에 사는 청각장애아와 부모들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오거나 부부가 별거를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일단 진단이 끝나면 집에서 부모가 적절히 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통신교육을 강화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런 내용의 비디오 테이프를 제작해 나눠주는 등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또한 운영책임자인 "산드라 메이어" 여사는 "이곳의 모든 교육과정은 전 세계 어디서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고 소개하고 "한국의 애화학교와도 교류를 하고 있다"고 말하며 자료실에서 한국어 교재를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모든 아이들은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는 교사 "주디"의 말처럼 이곳에서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언어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면 어떠한 청각장애아라 해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원칙만을 고집하지 않고 부모들과 상의해 수화교육을 원할 경우 다른 교육기관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조기진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카렌"은 "영국이나 이스라엘이 법적으로 모든 신생아들에게 청력검사를 하는 것에 비해 미국은 청각장애아 진단이 평균 30개월로 너무 늦어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미국의 장애아 진단 방식에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전 세계 144개국의 청각장애우들을 대상으로 지금까지 10만여 가정("어린이"라고 하지 않고 꼭 "가정"이라는 표현을 한다)에게 "말"을 돌려준 "존 트레이시 크리닉"은 올해 50주년을 맞아 2백만달러(16억원 정도)를 들여 센터 전체를 새롭게 단장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단 한푼의 정부보조도 받지 않고 후원자들의 힘으로만 꾸려지는 "존 트레이시 크리닉"의 진정한 힘은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교사들이 미국의 일반교사 봉급정도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전문가"라는 자부심과 그러한 자부심에 걸 맞는 "성실한 자세"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선생님들을 믿고 기꺼이 교육에 참여하는 부모와 아이들 모두가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직원들이 차댈 곳은 없어도 부모들을 위한 주차공간은 반드시 준비되어 있을 뿐 아니라 1백년도 더 넘은 아름드리 나무를 차마 잘라 낼 수 없어 그 나무 모양대로 둥그스름하게 정원을 꾸민 "존 트레이시 크리닉"에서 아이들은 놀고, 즐기면서 잃어버린 "말"을 찾기 위한 힘들고 먼 길을 떠나고 있었다.
청각장애우 조기교육의 산실 "존 트레이시 크리닉"
창시자 "루이스 트레드웰 트레이시"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청각장애아 "존"의 어머니 "루이스" 역시 아들의 장애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영화배우 "스펜스 트리이시"의 부인이기도 한 "루이스"는 1942년 당시 제 2차 세계대전으로 급격히 늘어난 청각장애우들을 위해 "남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열린 모임에서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고 청각장애 가족을 위한 부모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날 "루이스"의 강연이 끝나고 모인 12명의 어머니들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요구를 하고 모임을 가질 것을 제안하고 대학에서 이들 부모들이 모일 수 있도록 방 하나를 내줌으로써 청각장애우와 부모교육기관인 "존 트레이시 크리닉"의 문을 열게 되었다.
재단을 만들 때 남편의 유명세를 십분 활용해 "월트 디즈니"등 굵직한 인사들을 대거 참여시켜 재단의 재원을 마련해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치료를 중심으로 운영했던 "존 트레이시 크리닉"은 점차 조기교육 센터로 바뀌었으며 수화를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썩어 들어가는 "공룡">
미국에서의 취재 일정을 거의 마무리짓고 시내관광에 나섰다. 로스엔젤레스 바닷가 언덕 위에 세워진 한국공원은 "이곳에서 일직선으로 달리면 한국이 나온다"는 말처럼 고국을 그리워하는 이민자들의 염원이 담겨진 곳이었으나 웬지 엉성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더욱이 전직 대통령들이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는 푯말을 세워놔 그곳 교포들에게까지 비웃음을 사고 있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웬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공원을 떠나 헐리우드 영화산업의 산실인 유니버설 스튜디오로 향했다. 들어가는 길에 유명 영화배우들의 대형 초상화가 즐비하게 걸려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그래서 그런지 "유니버설 시티 스튜디오"라고 한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영화제작 현장을 그대로 재현해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이곳 스튜디오는 "트램카"라는 전기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컸으며 중간중간 자신들이 제작한 영화 "조스" "킹콩" "이티"등이 직접 나와 관광객을 즐겁게 하기도 했는데 단순히 영화를 파는 것뿐만 아니라 영화제작 현장을 관광지로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이들의 철저한 상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장애우에게는 모든 시설 이용에 있어 최우선 권을 준다는 점이다. 장애우와 그 가족에게는 아무리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도 가정 먼저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고 있으며 또 이러한 특권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없었다(대전 엑스포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취재의 마지막 일정은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된 시내버스와 청각장애우를 위한 전화기였는데 이 마지막 취재에서 우리 일행은 죽을 뻔한(?) 고비를 맞기도 했다.
3월 22일 로스엔젤레스 시내버스 "알티디"를 취재하기 위해 벨플라워 고등학교 1학년인 김지원양과 함께 시내버스 여행에 나섰다. 오후 1시쯤 버스가 도착하자 자칭 "멜 깁슨"을 닮았다는 운전사가 뒷문으로 와서 문 옆에 설치된 박스 뚜껑을 열고 스위치를 작동시키자 계단이 움직여 휠체어가 탈 수 있도록 바닥으로 내려왔다.
지원이가 타자 운전사는 차에 설치된 무선전화를 이용 본사에 장애우가 탔음을 알렸는데 만약 중간에서 다른 차로 갈아타야 할 경우 서로 무선 연락을 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기도 한다.
차를 탄 지 10분쯤 지나 한 고등학교를 지날 때쯤 흑인 청소년들 10여명이 우르르 올라와서는 뒷자리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등 버스 안은 갑자기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그중 하나가 밖에 있는 다른 청소년들과 말다툼을 하는지 한참 떠드는데 갑자기 "탕" 소리가 나면서 차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려 운전사에게 빨리 가자고 아우성을 쳤다.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하고 있는 우리에게 광정인씨는 "밖에서 누가 총을 쏜 것 같다"며 빨리 엎드리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차가 급히 떠나면서 한바탕 소동은 가라앉았는데 알고 보니 학교 앞에 서있던 아이들과 차안에 있던 아이들이 서로 욕설을 주고받다 밖에 있는 아이가 품에서 권총을 꺼내 차창을 두드렸다는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곽정인씨는 "미국에서 여러 해 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하며 "시내버스의 경우 흑인이나 멕시코 인들이 주로 이용하지 백인이나 한국인들은 위험해서 잘 안 탄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처럼 고등학생들이 학교에 각종 총기를 가져와 사고를 내는 바람에 교문 앞에 금속탐지기를 설치하고 일일이 등교하는 학생을 검문(?)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의 소동얘기를 들은 지원이의 중학교 다니는 동생은 한술 더 떠서 자기도 권총이 두 자루나 있다고 자랑을 하면서 보여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저녁, 청각장애우를 위한 전화서비스인 "티디디"의 사용법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조그만 워드프로세서처럼 생긴 기계에 수화기를 올려놓고 사용하는 청각장애우 전화기는 화면에 글자가 나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중간에 교환원이 음성과 문자 어느 것이든 원하는 대로 바꿔준다고 한다.
따라서 상대방은 일반전화를 사용해 청각장애우와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며 청각장애우는 대화내용을 프린트해서 문서로도 볼 수 있었는데 이 전화기와 전화요금은 모두 정부에서 부담하고 있다.
낮과 밤이 다른 세계, 장애우에 대한 사회참여 방안과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공존하는 날, 그 속에서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장애우들, 미국은 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그리고 제 몸이 커서 어느 한쪽이 곪고 썩어 들어가는지 조차 모르는 "공룡"과 같은 나라였다.
글/전홍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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