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이웃]결핵환자촌의 건강한 사람들
본문
지금도 한 해에 7천명 이상의 우리 이웃이 "결핵"으로 죽고 있으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단지 "결핵"이라는 병을 앓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버림받고 있다. 은평구 구산동 산 61번지 "산동네"에서 결핵 후유증 그리고 결핵보다 더 무서운 이웃들의 차가운 눈초리 속에 숨죽이고 살아가는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의 고단한 하루를 함께 해 본다.
<산동네의 봄>
녹번역에서 십여분 거리인 서대문 시립병원 앞에 내려 3백여 미터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야 하는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 산 61번지.
시립병원 뒤편으로 팔십여 채의 무허가 판자집이 산꼭대기까지 옹기종기 모여있고 산을 넘으면 경치 좋은 약수터가 있어 평일에도 약수를 뜨러 오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 사람들이 "결핵촌"이라고 부르는 산동네의 정확한 주소이다.
때마침 4월 중순경이라 산에는 진달래가 한창이었다. 빽빽이 자라고 있는 나무에는 잎도 없이 마른 가지만 앙상하고 어두운 판자집만 있는 곳이라 진달래가 더욱 곱게 느껴졌다.
이쯤이면 구산동 산 61번지 주민들도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일하기 좋은 철이라 한 달에 20여일 나가는 취로사업 때문이다. 또 건강이 나빠 취로사업도 못 나가는 주민들은 겨우내 닫아 놓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따뜻한 봄볕을 즐기기도 한다.
은평구에서 "구산동 산동네"로 불리는 이곳은 61년도부터 생겨났다. 현 서대문 시립병원의 전신인 시립중부병원 분원이 전문결핵병원으로 60년에 생겼고 여기 결핵병동을 퇴원한 환자들이 산으로 올라가 무허가 판자촌을 이룬 것이다. 현재는 2백 18세대, 4백 3십 여명이 살고 있다.
시립병원을 들어서서 병원 뒤의 베데스타교회를 끼고 산동네로 올라가니 여기저기 방에서 나와 앉아 햇볕을 쬐는 주민들이 보였다. 취로사업을 나가지 못하는 몸이 허약한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의 "상조회"가 있다 기에 그 일을 맡고 계신 신아길씨(51)를 찾았다. 신씨는 집밖에 의자를 내놓고 물끄러미 시립병원 뒷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조회는 주민 중에 독신세대가 많아 환자가 결핵후유증으로 죽기라도 하면 찾아오는 가족도, 당장 장례를 치를 돈도 없이 곤란한 경우가 많아 한 달에 3천원씩 걷기로 하고 작년 7월에 회원 50여명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결핵이 재발했을 때는 다시 시립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후유증으로 생긴 다른 병의 치료에는 진료비가 들어가서 돈이 여러모로 쓰이기도 한다.
신아길씨는 25년 전에 결핵에 걸렸고, 산동네에 산지는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제 결핵은 완전히 나았지만 후유증으로 기침이 심하고 척추장애까지 겹쳐서 일을 나갈 수 없었다.
오랜 투병생활에도 모습이 정갈하고 표정이 밝아 그 이유를 물었더니 "천주교에 대한 믿음과 스스로 위로하며 사는 마음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유심히 관찰하기 때문인지 나무 한 그루에도 깊은 애정을 보였다. "내가 여기 산지 10년이 되지만 저 나무 이름은 모르겠어요. 올해는 3월 27일에 처음 새순을 보았는데 다른 어떤 나무나 꽃보다 일찍 봄을 알려줘요. 작년에 저 나무에서 "장수하늘소"를 보았어요. 그만큼 귀한 나무지요."
작년에는 뒷산에 올라가 진달래도 보고 라디오도 들으며 놀다 왔지만 올해는 몸이 아파 갈 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가 10분이면 넉넉히 오를 산인데도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아파서 종일 집안에서 생활해도 마음만은 넉넉하다. 앉아서 나무를 바라보는 산과 나무들, 진달래꽃을 보며 "이 앞산이 모두다 내 정원이지요"라고 할 정도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
신아길씨처럼 주민들은 독신이 많고 대부분 가족과 헤어진 아픔을 가지고 있다. 전체 세대 중 절반이 독신세대라 하는데 이들도 옛날에는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
하지만 결핵에 걸려서 서대문시립병원을 찾아올 때는 이미 가정은 깨지고 몸은 심하게 망가져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가 많다.
서대문 시립병원에서 이들은 무료로 1∼2년 간 입원치료를 받고 퇴원하게 된다. 하지만 병이 나았다고 가족이 찾아오거나 사회에 다시 나갈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 중 대부분은 아픈 몸을 이끌고 혼자서 구산동 산동네로 올 수밖에 없다.
봉원초씨(76)는 양로원에서 결핵에 걸려 69세 때 시립병원에 입원했으며 3년 만에 깨끗이 나았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양로원에도 빈자리가 없었고 하나뿐인 딸집에 가기도 망설여진 것이다. 유일한 혈육인 딸은 지금 오류동에 살고 있는데 봉원초씨가 첫 부인을 잃고 둘째 부인과 결혼한 뒤 집을 나가 버린 딸이라 깊은 정은 없었다.
산동네로 와서 천막집을 빌어 살다가 이년 전에 백만원을 주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샀다. 너댓평밖에 안 되지만 이곳에서는 큰 편에 속하는데 부엌에는 남이 버린 개를 자식처럼 키우고 있었다.
봉원초씨는 방안 벽에다 큰 글씨로 또박또박 오류동 딸이 살고 있는 집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후면 병원을 퇴원하고 산동네로 갈지, 어쩔지 고민하고 있는 서대문 시립병원 3병동에 있는 이정길씨(47)도 찾아오는 가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22살에 결혼해서 35살 때 가족과 헤어졌어요. 아니, 헤어진 게 아니라 두 아이를 놔두고 애기엄마가 집을 나간 거죠. 그때는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를 하거나 노점상을 하면서 전농동에서 살았어요. 아홉 살 난 남자애는 전농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몸은 아파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벌어야 했어요. 집나간 뒤 며칠 뒤 부인이 와서 네 살난 딸애를 데려가더라구요. 다시 5개월 있다 큰애는 내 고향 상주에 데려다 놓고…. 지금 작은애는 엄마랑 청주서 살고 큰애는 스물 세 살인데 공장 다니며 신촌에 살지요. 근데 작은애도, 애엄마도 그 후로 본적이 없어요. 큰애도 신상서류에 필요할 때나 찾아오지 오지도 않아요."
<결핵에 대한 잘못된 인식>
지난달 "폐병"이니 "피병"으로 불리 우기도 했던 결핵은 가난했던 우리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무섭고도 두려운 병이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이 나아지고 결핵협회와 국가의 결핵퇴치 노력으로 그동안 결핵인구의 수는 전체 인구의 5%(65년)에서 1.8%(90년)로 현격히 낮아졌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결핵은 이미 "정복된 병"이라고 우습게 여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핵은 우리나라의 10대 사망원인 중 8위에 올라 91년에는 4천62명이 결핵으로 죽었으며 결핵환자도 72만 여명으로 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다른 나라에 비해 오히려 발생률이 높다.
이처럼 "결핵"은 아직까지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정복되거나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라 영영 낫지 못할 "피병"이고 실제로 나을 가망이 없는 난치성 환자만도 5천명이 넘는다.
서대문 시립병원의 결핵전문의 조영수씨(30)는 "결핵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빨리 고치고 이들에 대한 사회복지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꼬집었다.
"보통 주부가 결핵에 걸렸어도 같이 음식을 먹거나 식기를 쓴다고 전염되는 것은 아니에요. 결핵은 공기 중에 떠도는 결핵균이 호흡기를 통해서 전염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부가 병에 걸렸다면 그 균은 집안 공기 중에 있는 거지요"
하지만 이때도 주부가 격리될 필요는 없다. 2주간만 약을 먹으면 일단 전염성은 없어지고 착실히 6∼12개월 약을 먹으면 완전히 낫는다고 한다. 이때 다 나았다고 중간에 치료를 그치거나 심한 노동을 하여 몸을 혹사하면 재발하기 쉽고 반복되다 보면 불치병이 되는 것이다.
"이런 중환자가 되기 전에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다는 생각이 많았겠죠. 결핵균 자체보다 인간적 냉대에 고생한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비영리로 병원을 설립하고 하루 빨리 국가가 충분한 예산을 들여 사회복지 차원에서 이런 병을 없애고 환자들을 돌본다면 갈 곳 없는 구산동 주민들이 생기진 않겠죠."
<한달 생계비보조 4만원>
결핵에 걸려 입원한 환자들은 퇴원 후에 몸은 허약해지고 "만성호흡기 질환"이나 "호흡부전증"등의 후유증을 남겨 다른 사람처럼 힘든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산동네 주민 중 140여 세대가 생활보호대상자로 동사무소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이중에 백십여 세대가 거택보호자로 한 달에 쌀 10㎏, 보리쌀 2.5㎏, 생계보조비 4만원, 의료비 교육비 전액 무료 혜택을 받고 있다.
하지만 생계비가 턱없이 모자라 일할 수 있는 주민들은 모두 취로사업을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벽보 뜯는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과 같이 사는 한춘숙씨는 취로사업 하루 일당 1만 3천원, 동사무소 보조비 4만원, 베데스타 교회의 구호금 5∼7만원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서른 여섯에 결혼해서 생활능력이 없고 불성실하기만 했던 남편과 7년 만에 이혼하고, 84년에 입원했으며 이년간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산동네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병들고 지친 자신의 몸을 추스르는 것과 함께 무책임한 아버지 밑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들을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앞으로 자식이 살아가는데 글이라도 터줘야 되지 않소. 힘이야 들지요. 양부모 역할도 해야 하고, 천식이 심해 헉헉거리며 벌어먹으려니 힘들고… 하지만 힘이 돼주는 주님 사랑, 자매님 덕분에 용기를 얻고 힘있게 나간다"는 한춘숙씨.
방 한구석 조그만 밥상 위에는 성경책과 두꺼운 노트가 있었다. 한춘숙씨가 시간 날 적마다 옮겨 적은 성경인데 벌써 열한 권 째가 된다고 한다.
오늘도 첫 새벽에 일어나 아들학교 보내고 아침예배 드리고 9시까지 취로사업 나가고, 저녁에는 돌아와서 성경공부를 하는 한춘숙씨는 찾아갈 때마다 대접할 것이 없다고 미안해하면서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 찾아왔다"고 고마워했다.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시련>
이곳 주민들은 오후 2∼3시면 베스타 교회에 나가서 매일 예배를 드린다. 천주교를 믿고 있는 주민들은 저녁에 산동네에 있는 "구산동 기도의 집"에 모인다. 매달 두 번 연세대 의예과 학생들과 "참길공동체"라는 자원활동단체가 나와서 쓰레기도 치우고 보수공사, 진료봉사를 한다고 한다.
종교가 없었더라도 산동네에 와서 종교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여러 주민들은 자신의 고통이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주는 시련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사회기관이나 정부의 도움이 거의 없는 대신 베데스타 교회나 천주교 성당에서는 수건, 비누, 치약서부터 달걀, 돼지고기, 김치에서 결핵약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이들 종교단체의 도움이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이곳의 어려운 생활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이처럼 가족과 헤어져서 어렵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이곳 주민들의 꿈과 바람은 의외로 소박했다.
신아길씨는 결핵환자에 대한 인식을 꼭 바꿔 달라고 당부했다. "보통 결핵환자들은 대할 적에 감염을 중요시하거든요. 무조건 결핵을 앓았다고 환자가 아니라 약을 먹고 균이 안 나온 상태면 감염 우려는 없거든요. 그런 사람은 감염 우려가 없으니까 환자 취급하지 말고 일상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어요. 결핵환자라면 무조건 음성, 양성 안 가리고 전부가 감염되는 줄 알고 있어요."
잘못된 사회인식도 바뀌어야 할 뿐만 아니라 쾌적한 환경과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생계대책 또한 시급하다.
<진달래처럼, 민들레처럼>
지난 85년에 천주교를 믿는 주민 20여 명이 강원도 원주에 가서 자활촌을 건립하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곳 주민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88년에는 산동네 앞의 구산연립 주민들이 환자들과 같이 못살겠다고 구청에 청원을 넣는 바람에 산동네 주민들이 똘똘 뭉쳐 철회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한때 대통령이 되기 전에 노태우씨가 구산동 산동네를 찾아와 "걱정 없이 살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말만 무성했을 뿐이다.
계속되는 이웃의 거부와 압력에 견디다 못한 주민들은 88년 봄, "현지개량추진위원회",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불량건물은 뜯고 깨끗한 환경을 만들어 살기 좋은 부락을 만들겠으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의 청원을 구청에 했다.
하지만 구청측은 이러한 주민의 요구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팔장만 끼고 있었다.
마을 한구석 쌓아놓은 쓰레기더미에서 악취가 나고 파리가 끓어 구청에 몇 차례씩 전화해도 치워가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집들은 다 무허가 판자집인데 구청에서 지어 놓은 두 개의 화장실만 멀쩡한 벽돌집으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산동네에 깨끗한 환경 속에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거리가 보장되는 자활촌이 건립된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래서 베데스타 교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여러 뜻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활기금을 모으고 있지만 가까운 시일에 건립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완치돼도 반겨주는 가족도, 생활보장도 없는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자활촌 건립은 마땅히 국가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자활촌보다 더 급한 것은 언제 집이 헐릴지도 모르는 막막한 현실이다. 지금 구산동 산동네 주민들은 2∼3평 좁은 공간을 월세 4∼5만원씩 내면서 살고 있다. 그나마 자식들이 커서 방 한 칸이라도 더 지으려면 철거될까 두렵고 영구임대아파트를 얻자니 독신자에게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
가양동, 성산동, 상계동 등l의 영구임대아파트를 얻고 나간 십여 세대도 일반인과 생활하려니까 어렵고 그곳에선 한 달에 12일 밖에 취로사업을 나가지 못해 생계가 어렵다고 한다.
요즈음 이 산동네 주민들은 "요즘 민간 대통령이 정치를 하고많은 부정과 부패를 없애고 사회의 민주화를 이루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며 여기 또 한번 기대를 걸어본다.
산 61번지 아랫동네에 사는 박영식씨(52)는 20년 넘게 이곳에서 살아온 터주대감으로 오랜 소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중에 철거되면 이 아픈 사람들, 다 어디로 갑니까? 특히 혼자 사는 사람들은 영구임대아파트도 못 가니 여기서 아파트 지어 살게 해주면 좋겠어요. 방법은 있다고 봐요. 서로 맘 맞는 사람끼리 두 사람한테 집 하나씩 주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려운 생활도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가난하고 어두운 산동네를 환하게 밝혀주는 진달래처럼 그리고 밟혀도 소리지르지 않고 참고 견디는 민들레처럼 구산동 산 61번지에는 "우리가 버린 또 다른 우리들"이 골짜기마다 "건강하게"피어 있었다.
글/오숙민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