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재/세계장애우 그 현장을 가다(1)]맹도견과 함께라면 언제나 즐거운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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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장애우" 연재를 시작하며, 일본에서, 미국에서, 그리고 노르웨이, 독일에서 우리와 같은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난 3월 1일부터 40여 일간 물설고 낯설은 이국 땅에서 이 소박한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눈다.
지구촌 장애우의 삶이 서로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흡사한지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고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낯설지 않은 일본 그리고 다와다 소장>
3월 1일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오사카행 대한항공 701편에 앉아 있으면서도 지금 내가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 것인지 영 실감이 나질 않았다.
연초에 서울방송 측에서 "장애우 관계 해외취재 프로그램이 있는데 같이 갈 수 있겠느냐"는 얘기를 꺼내 마음 속으로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어 "결국 안 되는 모양"이라고 잊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함께걸음" 원고마감 때문에 바쁘게 돌아가던 2월 중순 기획특집부 윤동혁 부장의 "여권 있느냐"는 전화는 단조로운 일상의 리듬을 깨는 충격이었다.
"드디어…"하며 여행사로 미대 사관으로 허둥대며 쫓아다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미 몸은 1만미터 공중을 날아 생전 처음 가보는 새로운 세계를 향하고 있으니 "세상일이란 게 참 알다가도 모를 것"아닌가.
김포공항 출국 검사소에서 태연하게 액스레이 투시기에다 필름가방을 집어넣는 실수(결국 이 때문에 감도 400이상의 필름 일곱통을 고스란히 버릴 수밖에 없었다)로부터 사십여일간 대장정(?)의 막을 열었다.
영화한편 볼 시간밖에 안 되는 두 시간 여의 짧은(?) 비행 끝에 오사카 국제공항에 도착해 아홉 개나 되는 보따리를 챙기고 입국절차를 잘 모르는 세관직원 때문에 한시간 남짓 우왕좌왕한 뒤 마침내 일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오사카의 날씨는 서울과 비슷했으나 다소 후덥지근하게 느껴졌으며 오사카 공항대기실은 국제공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작고 복잡해 국제공항이라기보다는 어느 시골의 기차대합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본에서 열흘간 우리를 안내할 김한기씨와 공항대합실에서 서로 몇 차례씩 스쳐지나가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봉고차 크기인 "큰 택시"(일본뿐만 아니라 나중에 들른 다른 나라에서도 모두 이처럼 큰 택시가 있었는데 너댓명의 여행자들이 이용하기에 아주 편리하다)에 짐을 싣고 첫 목적지인 "관서 맹도견 센터"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일본의 첫 인상은 예상대로 작고 깨끗했으며 자전거를 탄 사람이 유난히 많았는데 여학생들이 치마를 입고 신나게 달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오후 4시 가메오까시 바깥쪽 관서 맹도견센터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짐을 내리는 우리 일행을 환하게 웃으며 맞이한 다와다 사도루 소장은 40대 초반의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격으로 특히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이어서 전혀 낯설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우리 일행은 센터 이층의 여섯 개 방중에서 큰 방 두 개를 배정 받았는데 일본식 다다미에 전기 히터가 달려 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이층 방에는 우리 일행 외에도 두 사람의 시각장애우가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맹도견과 함께 훈련을 받고 있었다.
간단하게 짐 정리와 샤워를 끝낸 후 다와다 소장을 비롯 맹도견센터의 직원들과 함께 아래층 주방이 딸린 회의실 겸 식당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미소시루"라고 하는 일본 된장국 볶음밥으로 일본에서의 첫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일본의 맹도견 훈련에 관한 비디오를 볼 수 있었다. 사실 일본에 도착하기 전 내가 갖고 있는 맹도견에 대한 지식은 "그저 시각장애우를 안내하는 개"정도라는 것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맹도견 훈련과정을 지켜봤다.
그러나 동경의 "아이 데이트"(EYE MATE)라는 맹도견센터에서 제작했다는 이 비디오는 맹도견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고함과 매질이 여러 번 되풀이되는 등 보통 경비견을 훈련시키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뭔가 다른 것(?)을 기대했던 우리 일행을 당황하게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다와다 소장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으며 맹도견에 대한 그의 애정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다와다 소장은 훈련과정 중에서 특히 맹도견을 윽박지르거나 때리는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면서 "바로 이 점이 자신들의 훈련방법과 다른 점"이라고 말하며 "이곳에서는 결코 개를 때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특히 훈련소 바닥에 군데군데 얼룩이 나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핏자국"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있을 정도로 맹도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지극한 것 같았다.
비디오를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혹시 한국에 올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마흔 다섯쯤 되면 한국에 가서 일을 해볼 생각이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하며 "88 장애인올림픽 때도 한국에서 입장식 때 맹도견으로 시범을 보여줄 수 없느냐고 요청한 적이 있지만 한 번 가서 보여 준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거절했다.
아무튼 첫 날 몇 마디 말을 통해 얼핏 느낀 것이지만 다와다 소장이 한국의 장애우 복지 현실에 관해 그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며칠 뒤에야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첫 날부터 벽에 부딪친 것은 취재의 상당부분을 통역 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당혹감(?)으로 촬영 중간중간 필요한 자료를 챙기기 위해서 짧은 영어와 일본어는 물론 수화까지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다와다 소장뿐만 아니라 직원들과도 대부분 영어로 얘기를 나눠야 했는데 뜻밖에 거의 모든 직원들이 유창하고 정확하게 영어를 구사해 "일본사람은 영어에 약하다"는 잘못된 정보(?)만 믿고 있던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밤 10시, 다다미방에 자리를 깔고 채 인사도 못 나눈 서울방송 동료들과 앞으로의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잠자리에 들었다.
창문 밖 울창한 숲 위로 바람이 스치고 총총히 수많은 별이 빛나는 가메오까 관서 맹도견센터, 일본에서의 첫 밤은 이렇게 길고도 어색하게 지나갔다.
<"살아있는 보조수단">
여기서 잠시 시각장애우의 맹도견에 대한 다와다 소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다와다 소장은 시각장애우가 걸을 수 없는 것은 한마디로 "걷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따라서 걷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정보 즉 계단과 장애물 그리고 신호등에 관한 정보만 있으면 설혹 볼 수 없다 하더라도 걸을 수 있으며 맹도견은 바로 이 세 가지 정보를 전달해 주는 "살아있는 보조수단"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시각장애우용 흰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과 맹도견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일까?
시각장애우는 청각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간관념 그리고 이를 확인하기 위한 보조수단을 이용해 걸을 수 있는데 흰 지팡이 사용자와 맹도견 사용자는 바로 이 공간관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시각장애우 중에는 정사각형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가는 경우처럼 같은 거리에 있는 목적지라 하더라도 왼쪽으로 도는 것과 오른쪽으로 도는 것이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하며 이처럼 공간관념에 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맹도견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이와 함께 다와다 소장은 시각장애우는 맹도견을 이용해 "질 좋은 걸음"을 위해서 필요한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그 정보의 필요성 여부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 결정하기 때문에 맹도견은 결코 만화영화에 나오는 "슈퍼 독"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런 탓인지 이들은 맹도견을 셀 때 "몇 마리"라고 하지 않고 꼭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며 이는 "길거리에 휠체어가 몇 개 있다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와다 소장은 일본에서 약 730명의 시각장애우가 맹도견을 사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이에 대해 "많은지 적은지 알 수 없지만 후생성 발표에 의하면 보도지도원에게 정식으로 흰 지팡이 사용 교육을 받은 사람이 30여만 시각장애우 중 2,800명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고 본다"고 말하며 시각장애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관서맹도견센터의 경우 현재 64명의 시각장애우가 맹도견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이 한해 받을 수 있는 맹도견은 20여 마리에 불과해 길게는 3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적재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면접을 거쳐 맹도견을 써도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흰 지팡이 사용법을 가르치기 위해 직원 중 세 사람이 후생성의 "시각장애우 흰 지팡이 육성지도원"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일본에서도 오직 "관서맹도견센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구조라고 한다.
<"개 사랑, 사람 사랑">
맹도견이 시각장애우들의 살아있는 보조수단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전쟁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난 시각장애우들의 보조자로서 개를 사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 후 스위스, 미국, 영국, 등으로 확대됐으며 현재 미국에만 약 7천여 마리 그리고 영국에 약 4천여 마리의 맹도견이 활약하고 있는 등 세계 20여개 국에서 시각장애우의 친구로 가족으로 활약을 하고 있다.
맹도견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개는 성격이 밝고 사람을 잘 따르는 래브라도, 골덴, 독일 세퍼드 등 몇몇 종류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들의 혈통을 보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한다.
새끼는 태어난지 45일만에 위탁 사육봉사자가(파피워카라고 한다)에게 맡겨져 일반 가정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법을 배우는데 여기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사람은 모두 좋다"고 하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며 이 기간동안 파피워카는 한 달에 한 번씩 강아지의 성장과 훈련 상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특히 이 보고서에는 매일매일 개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을 적게 되어 있어 예비 맹도견의 성장과 훈련과정에 온 가족이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수놈의 경우는 5개월, 그리고 암놈의 경우 8개월이 되면 피임수술을 받게 되는데 피임수술을 통해 모성애를 제거하는 것이 맹도견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니 동물애호가들이 알면 들고일어날(?) 일이라고 하겠다.
본격적인 훈련은 예비 맹도견이 한 살이 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기초적인 보행훈련에서 위험한 순간 스스로 판단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기까지 하는 "지적불복종"의 단계까지 보통 6개월에서 일 년 정도 맹도견으로서 필요한 모든 지식과 기능을 배우게 된다.
교육을 마친 맹도견은 "크라스"라는 집단훈련을 받게 되며 이때 실제로 개를 사용할 시각장애우와 함께 4주간의 훈련을 받고 마침내 새로운 주인과 함께 사회로 나가는 것이다.
시각장애우는 맹도견의 어깨에 둘러맨 "하네스"라는 손잡이 모양의 기구를 통해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정보를 주고받고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우리와 함께 이층에 묶으면서 맹도견과 함께 4주간의 훈련을 받고 있던 사람은 모리모또 미쯔고라는 30대 후반의 안마사와 올해 대학에 합격한 18살의 사까우에 도모에였는데 모리모또가 식사시간 외에는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에 비해 사까우에는 명랑하고 환한 웃음으로 우리와도 곧잘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 또래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사까우에도 대중가요를 좋아해 늘 음악을 듣곤 했는데 하루는 "만약 지금 눈을 떠서 볼 수 있다면 무엇이 제일 보고 싶으냐"고 묻자 엄마나 아버지가 아니라 "자게와 아스카라는 대중가수를 꼭 보고 싶다"고 대답해 함께 웃은 적도 있었다.
<내가 일본 최고의 훈련사>
관서맹도견센터는 다와다 소장을 포함해 8명의 직원들이 꾸려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철저하고 확실하게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책임들이 서로 어우러져 일본 최고의 맹도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맹도견센터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 우리는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맹도견은 식사, 훈련 그리고 신변처리를 위해 24시간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에 직원들이 매일 한 사람씩 돌아가며 숙직을 하고 있었다.
이날 당번인 요시오카는 키가 작고 동글동글해 귀엽게 생겼는데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매일 12킬로미터를 뛰고 오후에 수영강습까지 받는 "맹렬여성"으로 맹도견센터에 들어오기 위해 3년 간이나 경찰견훈련소와 일반사무실을 다니며 "재수"를 할 정도로 맹도견 훈련사를 꿈꿔왔다고 한다.
저녁 6시 스무 마리의 개들에게 두 번째 식사를 나눠준 요시오까는 자신의 키만큼 큰 개들을 익숙한 솜씨로 밖으로 내몰고는 진공청소기를 이용해 스무개가 넘는 개들의 우리를 깨끗이 청소했다.
밤 9시 한 마리씩 개들을 데리고 나와 대변을 보게 한 요시오까는 10시경 모든 일을 마치고 개들과 함께 우리 한가운데 있는 숙직실의 불을 껐다.
개들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해 우리 한가운데서 잠을 자는 요시오까의 모습은 일본 최고의 맹도견을 만들어내는 비결이 과연 어디에 숨어있는지 깨닫게 해준 증거였으며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다와다 소장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관서맹도견센터에는 일 년 전 한국에서 맹도견의 훈련방법을 배우기 위한 유학생이 한 사람 와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당연시하는 일(예를 들어 우리청소)등을 거부하는 바람에 소장으로부터 불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이러한 점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키워 준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빨리 기술을 배워서 한국에 돌아가 뭔가 일을 해보고 싶은 유학생과 밑바닥부터 모든 과정을 거칠 것을 요구하는 소장과의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서로 애를 먹고 있었으며 한바탕 소란을 겪은 뒤 일단 "다시 시작해 보자"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인 유학생 문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와다 소장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 대한 자부심과 대단했는데 이는 그들이 "일본에서 가장 따기 힘든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그리고 그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논문을 제출해야 하는 힘겨운 과정을 이겨내고 있다는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모금함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
가메오까 시는 교오또 시내에서 한 시간정도 떨어진 인구 9만 정도의 작은 도시로 생활수준은 일본 전체의 중간 정도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 이었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가메오까시의 모든 신호등은 동서방향과 남북방향이 서로 다른 소리로 되어 있어 시각장애우가 소리만 듣고도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도록 되었으며 이러한 장치는 가메오까 시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한다.
시내 전역에는 길 한가운데 노란색의 점자 유도블럭이 깔려있었으며 특히 역 근처에는 점자블럭 위로 자전차를 세워놓지 말 것을 경고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
주민들은 맹도견을 자주 봐서 그런지 훈련 장소로 택했던 백화점에서 만난 몇몇 사람은 다와다 소장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3월 6일 교또 시내에서 맹도견을 사용하고 있는 미야모도씨를 만나 본격적인 시내탐험에 들어갔는데 토요일 오전의 교또 시내는 쏟아져 나온 시민들로 발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안마사로 일하고 있는 올해 45세의 미야모도씨는 40세 때 병으로 시력을 잃었는데 갑자기 변해버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려 맹도견 조니와 함께 혼자서 살고 있다.
운동화를 사기 위해 백화점에 들어간 미야모도씨는 백화점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신발코너에 올라가 운동화를 골랐는데 주인이 신발을 고르는 동안 조니는 바닥에 엎드려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겠지만 백화점에서 나온 미야모도씨를 백미터가 넘는 전철역까지 바래다 준 백화점 직원의 친절을 뒤로하고 미야모도씨는 조니와 함께 전철을 타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시내 음식점으로 향했다.
교또 시내 점자지도는 물론 점자로 된 메뉴판까지 갖춰놓고 있었다.
점심을 마친 뒤 조니와 함께 다시 지하철을 타러 가는 미야모도씨를 바라보며 다와다 소장은 "즐기고 나누는 것이 바로 복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곧 즐기고 나누며 한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열어주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관서맹도견센터는 한해 약 9천여 만엔 우리 돈으로 약 6억원 정도의 예산을 쓰고 있는데 이중 약 3분의 1인 약 2억원 정도가 시민들이 내는 기부금으로 충당되고 있었다.
이들 기부금은 교또 시내의 미장원, 다방 등에 깔려있는 1천 5백여 개의 작은 모금함을 통해서 거둬지고 있었으며 이 돈은 맹도견센터와는 별도로 교또 시내에 있는 협회 사무실에서 관리하고 있어 소유와 경영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주인과 함께 모금함의 돈을 세고 영수증을 만들어주는 너무나도 치밀한 그들의 후원금 관리 방식이 바로 한 마리에 3백만 원이 넘는 맹도견을 무료로 나눠줄 수 있는 넉넉함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여전히 넘어서야 할 몇 구비>
그러나 이처럼 맹도견을 통해 한 사람의 시각장애우가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 가는 밝은 빛 뒤에는 여전히 어둠으로 남아있는 많은 그림자들이 도사리고 있다.
1990년 "맹도사견에 관한 조사위원회"가 맹도견 사용자 196명을 대상으로 "사회가 맹도견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대한 결과는 아직도 맹도견, 아니 더 나아가서 시각장애우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어느 정도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조사결과 찻집이나 음식점, 택시 등은 60퍼센트 이상 맹도견이 이용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철도(2.1%), 의회방청석(1%), 극장(4.1%) 등 훨씬 더 많은 곳에서 맹도견의 입장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아직도 넘어서야 할 고개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국가로부터 단 한푼의 보조금도 받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거꾸로 "그렇다면 혹시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다른 곳에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또 다른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잘 훈련된 맹도견이 한국에 건너가면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우리의 현실이었다.
글/전흥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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