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창간 5주년 특별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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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의 변화와 함께 언론매체들도 자기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창간 5주년 특집으로 마련된 대담을 통해 현재 우리 언론이 처해있는 상황과 언론수용자운동 등 일반언론의 여러 가지 모습을 살펴보고 전문언론으로서의 장애우 언론의 위상에 대해서도 들어본다.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한 언론>
짐종철: 세계는 지금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언론이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담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의 일반 언론이 처해 있는 상황과 장애우 언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 속에서 언론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것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겠죠. 저 자신도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언론은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큰 기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언론 자체가 바로 권력으로 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까지 이르렀습니다.
단적인 예로 지난 14대 대통령 선거 때 특정의 언론사가 편파적인 보도와 논평을 하고 집권세력 쪽을 노골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대통령 선거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언론은 과거 60년대나 70년대 군부가 가지고 있던 힘보다도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언론은 질적인 향상보다는 양적인 팽창에 있어서 거의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최근 석간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한 신문이 조간화를 선언하고 나서서 1920년대에 같이 창간된 다른 신문과 함께 치열한 경쟁을 벌일 조짐입니다. 그동안에는 조간대 석간의 경쟁을 벌였으나 같은 조간지로서 사생결단을 하는 경쟁도 불사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왕의 조간신문들도 더 치열한 물량경쟁을 벌일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신문의 질은 물론 언론노동자들의 노동조건도 더욱 악화될 것이 뻔합니다. 늘어나는 지면에 따라서 노동자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더욱 상업화될 것입니다. 텔레비전의 칼라시대 경쟁처럼 겉만 번지르한 신문이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새 정권의 담당자인 대통령이 언론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있죠. 그동안 "언론장학생"을 키워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언론과는 밀착된 관계에 있던 사람이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죠. 이러한 정권하에서 과연 언론사들이 정권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는지, 사회민주화나 민족통일을 추진하는데 힘을 모아주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런지 의문스러운 것입니다. 무한으로 치닫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언론이 대자본화 하고 나아가서는 언론재벌로까지 치솟는 쪽으로만 힘을 쏟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유일상: 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 중에서도 좀 비뚤어진 자본주의 사회이다 보니까 권력과 언론과 자본의 밀착도가 강합니다.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권력화 되어 있어 밀착이 지나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죠. 자본력과 결합해서 자본을 생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론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언론의 고유한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렵죠.
또 언론기관이 집단적인 이기주의를 위해 다른 많은 수용자 대중을 억압하거나 기만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론은 대중의 의식을 형성시키기도 하고 사회현상을 제대로 반영하며 사회환경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떤 사건이나 사태의 진실한 의미를 해석해줌으로써 국민들 스스로 대책을 마련하게끔 해야 하며 심미수준이 놓은 오락을 제공해줌으로써 수용자로서의 이익을 갖게 하는 역할도 해야 하는데 현재 우리 언론은 오히려 국민의 이익을 방기하고 있죠. 한국사회의 변혁은 언론의 변혁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김종철: 언론을 "사부"에 포함시키기도 하죠. 언론을 사부로 보는 것은 처음에는 좋은 의미였을 것입니다. 가령 지배권력에 대해서 사법부나 입법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였겠죠. 그런데 지금 언론은 아까도 말했지만 삼부 중의 사법부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것 같아요. 나도 유신독재와 5, 6 공화국 시대를 지내왔지만, 그 속에서 사법부의 힘이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판사들이 내리는 판결만 봐도 보통사람이 짚어낼 수 있을 정도의 것이죠. 사회적으로 중요한 판결의 경우 대부분 정치권력이 원하는 대로 되죠.
대표적인 예로 "강기훈 대필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재야운동단체에서 주장하는 근거를 빌리지 않더라도 어린아이도 보면 알 수 있는 필적인데, 끝내 1심 2심을 거치고 정부권력이 원하는 대로 판결을 내릴 정도로 우리나라의 사법부는 허약합니다. 권력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법조인들이 큰 혜택을 받고 있는 거죠.
언론이 누리는 특권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언론끼리도 감시가 안 됩니다. 모든 언론이 동업자가 되어 있습니다. 마치 동업자들끼리의 범죄형태에 대해서는 묵계를 맺은 듯이 봐주고 있죠. 물론 더러 중요하고 미묘한 문제를 터트리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경쟁관계에서 빚어지는 폭로성 기사죠. 옛날에 있었던 ㄷ일보와 ㅈ일보의 싸움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그런 류죠. 그렇게 일정정도 예정되어 있는 것을 빼고는 언론에 대한 문제는 건드리지 않아요. 가령 언론사에서 노조를 탄압하는 예는 자기 매체는 물론 다른 매체에도 안 나오죠.
유일상: 나는 사부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요. 미국의 경우 정부권력과 사법부, 교회(Church),언론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입니다. "교회"는 서구사회에서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언론이 비대화되어 있는 우리나라와는 상황이 다르죠. 우리나라는 교회나 사찰 등 종교기관의 정치나 언론에 대한 통제기능은 전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요.
언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부분입니다마는 지금 언론학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학자 중에서도 쳐지는 사람이 하는 것인양 인식되어 있는 풍토입니다. 언론인들에게서조차 권력을 쫓고, 무슨 프로젝트나 좋아하고 언론을 통해 적당히 돈벌이를 즐기려 하는 사람들이라는 대접을 받고 있죠. 이런 언론학자들이 언론계와 학계를 흐리게 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어요. 자정의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언론현장에서 언론노조의 형태는 어떻게 자리잡고 있습니까.
<제대로 자리잡아야 할 언론노조>
김종철: 언론사의 노조는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언론노련"이라고 해서 오십여개 단체가 가입되어 있는 기구가 있습니다. 일간지의 기자나 방송사의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이 회원들인데 그들이 만드는 기관지에는 매우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강한 어조의 글들이 실립니다. 그런데 자기 회사 내에서의 노조와 자본주와의 관계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선, 언론인들의 월급이 굉장히 높죠. 남자 기자의 경우 군대를 갖다 오고 6개월 수습기간을 마치면 상여금까지 합쳐서 초임이 150만원에 가깝죠. 대기업보다 훨씬 많은 액수입니다. 정권이 언론을 길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해 임금이 파격적으로 올랐어요. 신문사의 사주들은 대자본가가 되어 있죠. 언론노동자들은 노조다, 자유언론운동이다 외치기도 하면서 "노동자"라는 의식은 있는데 사회 계층적으로 볼 때는 그 조건이 다른 노동자들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아요. 그리고 주택자금이다, 학자금이다, 해외여행이다 해서 온갖 특혜가 보장되어 있죠. 이런 조건 속에서 언론노동자가 이중적인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특권층까지는 되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여유 있는 계층으로 신분이 올라가 있기 때문에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민주화나 통일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보도를 해야 하는데 노사관계에 있어 주종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이 가운데서 인사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기자들의 경우 정치부나 경제부, 나쁘게 말하면 "부수입"과 관련된 부서에서 일하려고 욕심들을 냅니다. 정치부 기자를 하다가 정치권력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논설위원을 하다가 장관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내근부서에 가면 촌지도 못 받으니 여러모로 이익이 있는 부서에 있고 싶은 것이 당연한 심정일 테죠. 이러 저런 현실 속에서 많은 기자들이 자기가 실천해야 할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죠. 이것을 감시할 수 있는 것이 내부적으로는 "노동조합"입니다. 언론인 자체의 내부 감시와 통제가 있어야 되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죠.
유일상: "언론노조"라는 노동자 단체를 만들어서 언론을 개선해가려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 중 상당부분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도 언론노동자들이 노동자 의식을 갖기는 매우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이들의 사회적 존재 조건이 매우 월등하기 때문이죠. 일단 자신이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월급도 많이 받으니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노동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존재 양식 자체가 사회 그늘에 묻혀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죠. 그러다 보니까 말이 노동자지 노동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식의 언론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아까 잠깐 말했던 교회세력 같은 시민단체들의 언론에 대한 감시 통제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언론을 감시하는 수용자운동이 정착해야>
김종철: 작년에 있었던 문화방송 파업이나 동아일보 파업에 관한 기사만 해도 일단기사로조차 제대로 안 실렸죠. 동조파업은 못해도 보도는 해야할 것 아니에요. 한국방송공사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구요. 이런 데서 언론사 노조의 한계가 나타나는 거죠. 언론사 노조에서 못하니 시민단체가 학생들, 재야운동단체 또는 언론수용자단체에서 해야 하는데, 그리고 감시자들의 이야기를 실어줄 대항매체가 있어야 하는 데 매우 미미하죠. 겨우 한겨레신문 신문 비평란에 실리는 정도의 제한된 지면 밖에 없는 형편이죠. 언론에 대한 비평이나 통제 감시에 관한 내용을 실어줄 매체가 없습니다.
지난번 선거에서도 봤듯이 대통령을 만들어낼 정도의 힘을 가진 매체가 있는 반면 감시기구는 아직 초보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어요. 기자들에게 촌지를 받기를 오히려 권장하고, 사회를 올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언론계 풍토가 먹이사슬처럼 얼키고 설켜 있어요.
영국이나 미국 일본 등지의 전통 있는 언론들은 촌지를 받은 기자는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는 풍토가 확립되어 있고, 이러한 전통 속에서 언론인으로서의 양심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영국의 BBS 방송이나 더 타임스, 미국의 뉴욕타임스, 일본의 아사히신문이나 요미우리 신문 등이 그렇죠.
언론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언론수용자운동이 시민들을 중심으로 벌어져야 합니다. 지난 대선 때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재야단체들을 중심으로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라고 있었죠. 일은 많이 했지만 기껏해야 1주일에 한번 나오는 신문을 통해서 얼마나 대항할 수 있었겠어요? 겨우 몇십부만 찍어서 대항할 수 있습니까? 아직 이러한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겁니다. 언론은 공룡처럼 커지는데 감시할 수 있는 세력은 정말 개미만도 못한 상태에 있다고 보면 되요.
유일상: 언론감시운동 또는 언론비판운동은 확실한 시민사회 조직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언론중재위원회 같은 데서 언론 피해를 구제해 준다고 하는데 언론중재위원회 같은 관청의 기구는 언론에 대한 시민차원의 감시가 되지 않습니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언론피해 구제요청이나 언론비평을 요구하는 것은 고양이한테 고기를 맡기는 꼴이 될 가능성조차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애우 언론의 경우, 기존의 언론들이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외면했기 때문에 "장애우 문제를 다루는 전문언론"으로서 함께걸음 같은 월간지가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장애우 언론도 자본주의 언론제도하에서 매체 노릇을 해야 되기 때문에 필요한 자본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첫 번째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현재 많은 장애우 기관들이 국가보조나 장애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데 이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애우 언론이 전문언론으로서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동안 일반 언론은 장애우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다소 왜곡된 점이 많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장면을 뽑아서 보여줌으로써 마치 장애우가 무능력한 사람인 것처럼 보여지는 것에 치중했는가 하면 다소 감상적인 차원으로 접근하였죠. 함께걸음은 이러한 점들을 지양하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고 생각됩니다. 장애우 문제를 사회변화 속에서 풀려고 하는 노력을 해왔죠. 그러나 함께걸음이 전문지로서 자리를 잡으려면 아직 변화해야 될 것도 많고 노력해야 될 점도 많습니다.
우선 많은 대중들의 공감을 받는 내용이 실려야 되겠죠. 동정도 좋습니다. 동정할 수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서 점차로 장애우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애정도에 따른 갖가지 정책 제안도 실렸으면 합니다. 정신장애우와 육체장애우를 구분하는 풍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우를 우리 사회에서 격리시키지 않고 "함께 사는 이웃"이라는 인식을 전 국민의 공감대로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일익을 담당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장애우들이 궁금해하는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해주어야겠죠. 예를 들자면 장애우들의 상속권에 관한 것이라든지 세제감면 혜택에 관한 것 등입니다.
<자기 매체에 자신 있게 서는 장애우 언론>
김종철: 일반 언론의 이중성이나 속임수는 가히 수준급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이 못하는 일이 없을 정도예요. 남자가 여자가 되는 일 빼고는.
장애우들의 경우 그 피해가 더 심각하죠. 청각이나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장애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체가 부자유한 장애우들도 정보를 제대로 접할 수 없는 것이지요. 말소리만 들어야 하는 시각장애우들은 텔레비전이 어떻게 자기를 속이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죠.
여성지를 보면 과연 이 사회에서 내세울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언론이죠. 양적으로 엄청나게 팽창된 언론이 수용자를 기만하고 권력과 공생하는 것 등 이런 부조리한 점들을 부단히 알려내야 하는데 대항매체의 수가 워낙이 적고 그것이 세력화되어 있지 않아요. 이것은 정말 앞으로 끈기를 가지고 발전시켜 나가야겠죠. 언론현장에 있는 사람들도 언론학을 하시는 분들도 감시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함께 해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언론이 장애우를 동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이런 것하고도 통하겠죠. 여성노동자가 하루에 열 시간 노동하고 밤에 야학을 해서 대학에 들어가면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죠. 마찬가지로 장애우에 대한 문제도 좀 놀랍게 생각되는 인간승리형의 기사들을 크게 다룹니다. 장애우에 대한 시각이나 견해 자체가 아직 천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단순한 이야기 거리 흥미 거리로만 치부하죠.
몇 달 전인가 엠비시에서 방영한 독일의 장애우에 관한 특집 방송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장애우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들의 표정이 "나는 비장애우니까 장애우인 너에게 동정을 베푼다"는 식의 표정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죠. 학교에서도 그렇고 생활하는 시설에서도 그렇고 아주 대등한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장애우 언론도 이제 스스로 자기 매체에 자신 있게 서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장애우에 대한 일반 사회의 인식을 바로 갖게 하고 정부에 대해서는 의식의 전환을 갖게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겠죠. 우리 사회에서 장애우에게 가해지는 불이익한 법과 제도를 바꾸는데 있어서, 또 사회전반의 인식을 바꾸는데 있어서도 장애우들의 단결과 동지애를 키울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매체가 되어야겠죠.
나아가서는 장애우들과 비장애우들이 연대하여 좀 더 유연한 방법으로 대중과 권력을 상대해서 장애우의 권리를 확보하고 복지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주력했으면 합니다. 매체를 제작하는 전문기술을 최대한도로 활용하자는 거죠.
장애우 매체운동도 과연 투쟁적인 운동방식으로 쟁취할 수 있는 단계에 있는지, 싸움도 필요하지만 정부와 협상하면서 인식을 변화시키고 일반 대중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은근한 방식을 병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장애우 언론은 우리 사회에서 장애우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단결력과 동지애를 키워내는데 원동력이 되는 수단으로서의 매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대중과 권력을 상대해서 나가되 매체 제작의 전문기술을 최대한도로 활용하자는 거죠.
유일상: 장애우 비장애우 할 것 없이 서로 돕고 사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부채질하는 역할을 장애우 언론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장애우를 자식으로 둔 우리 부모들도 장애우의 부모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면 하는 것이지요.『함께걸음』같은 전문언론이 맡아주어야 할 부분입니다.
김종철: 사실 일반언론에서 다루고 있는 장애우 문제는 오히려 장애우에 대한 인식을 더 왜곡시키고 있다고도 보여집니다. 장애우를 마치 다른 인종으로 보듯 하고 동정 어린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죠. 우선 언론인중에 장애우는 0.1%도 되지 않아요.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은 언론사도 마찬가지죠.
우리 사회가 그렇잖아요. 학력고사를 몇 점 맞고 어느 대학에 들어갔는지만 최고의 가치로 치는, 사회적 신분상승에만 신경을 쓰는 사회 아닙니까.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는 사회죠. 이미 공동체의식이 무너졌어요.
사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거나 유명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의 기사를 크게 보도하는 등 언론이 오히려 출세주의를 부추기고 있어요. 장애우에 대한 시각은 거꾸로 우월 의식이 내재해 있고, 항상 무시하는 듯한 발상까지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애우 중에 어떤 특출한 사람이 나오면 크게 보도하는 사례가 많지 않아요?
장애우 문제는 사회 문제로 접근해야 되는데 이러한 개인의 극적인 사건은 사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죠. 장애우의 생존권이나 교육, 고용 문제 등 장애우들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함께걸음』같은 데서 각종 신문을 뒤져서라도 장애인문제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고 시리즈로 다루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반 언론에 각성을 촉구하는 작업을 어떤 방법으로든 꾸준히 했으면 합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장애우 언론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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