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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함께걸음과 맺은 인연

본문

  

                                      

있을 때는 "있음"을 없을 때는 "없음"을 나누는 몸짓에 갈채를

「함께걸음」에는 역설적으로 혼자 걷는 이들의 이야기가 많다. "함께"라는 말이 진정한 의미로 쓰여지기 위해서는 우선 평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함께 걷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홀로 걷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꼬박 꼬박 내게로 날아드는 여러 가지 간행물들 중에 내가「함께걸음」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함께걸음」에는 도시의 소음을 능가하는 함성이 있어서 좋다. 그 함성은 흐르는 물길 따라 부는 바람 따라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우렁찬 소리다. 먹구름 뒤덮인 험산준령 앞에서도 조금도 주저함 없이 발걸음을 내딛으며 확신과 용기가 넘치는 소리로 외치는 저 메떼를랑크의 "비켜라 운명아. 내가 나간다!" 같은 함성이 지면의 곳곳에, 그리고 행간마다에 넘쳐흐르는 그것이 좋다.
「함께걸음」에는 나눔의 몸짓이 강렬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또 좋다. 본래 "나눔"이란 소유의 많고 적음을 개의치 않고 서로 나누는 행위이건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가 주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넘치는 부분의 일부를 남에게 덜어주면서 나눔이라는 말을 사용해오고 있다. 그러나「함께걸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너나 없이 있을 때는 "있음"을, 없을 때는 "없음" 그 자체를 나누려는 몸짓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이런 몸짓을 볼 때마다 나는 김춘수님의 시 "꽃"이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중략)
「함께걸음」에는 역설적으로 혼자 걷는 이들의 이야기가 많다. "함께"라는 말이 진정한 의미로 쓰여지기 위해서는 우선 평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함께 걷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홀로 걷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나의 나됨"에 대한 자기확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온갖 장애로 말미암아 살아 있음 자체가 하나의 전쟁같이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참인간으로서의 홀로서기는 중요한 과제임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걸음"이란 것이 군대의 행렬처럼 오로지 같은 방향을 향해, 같은 속도로 같은 몸짓으로 걷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이 어우러져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그런 "하나됨의 삶"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이 행렬에 뛰어들지 못한 채 "함께 걷는 이들"의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 또한「함께걸음」을 받아들 때마다 느끼는 부끄러움이다.

글/이면주

장애우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안내서가 되기를

장애우 개인이나 가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장애우 복지기관의 소개나 서비스 접근 방법 등에 관한 정보를 많이 실었으면 한다. 실제 생활에서 부닥치는 정보에 대한 무지 때문에 장애우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함께걸음」이 창간된 지 벌써 5년이 된다니 반갑기도 할뿐더러 대견스럽기도 하다. 그동안 척박한 우리의 복지 풍토하에서 면면히 이어 온 장애우 복지에 대한 열정과 수고에 대해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이「함께걸음」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그마한 후원자로서 시작되었지만 전공을 사회복지학으로 하는 까닭에 작년에는 고정칼럼인 "징소리"를 맡아 부족하나마 관계를 돈독히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피가 적은 소책자로 시작되더니 이제는 제법 기성잡지의 틀을 갖추어서 기치로 내걸고 있는 "참 좋은 세상을 꿈꾸는 장애우들의 월간지"로 발돋움하고 있어 기쁘지 그지없다.
 특히 "장애자" "장애인"이라는 표현 대신 "장애우"라고 굳이 고집하는「함께걸음」의 당당함은 건강한 공동체 사회의식을 토대로 하고 있어 매우 믿음직스럽다.
 연중기획 시리즈와 장애우 생활탐험, 사람들, 사람 사는 이야기, 우리 이웃, 붓소리, 징소리 등의 고정란에서 우리 사회의 그늘에서 소외당하고 차별 받고 있는 장애우들의 대변지가 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각종 논단과 해외 소식 등은 새로운 정보와 지식의 제공처가 되기도 한다. 또 연재소설이나 현장일기 등은 인간미 넘치는 감칠맛을 부어넣어 주기도 한다. 이제「함께걸음」은 우리의 다정한 벗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갖추어야 할 것들이 더 많다. 우선 편집부에서 다루는 기획시리즈의 내용을 1년 단위로 하여 계획성 있는 내용들로 채워졌으면 한다. 또 전문가의 조언도 많이 들었으면 한다.
 둘째, 고발기사나 사회 문제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룰 때는 너무 구호적이고 흥분된 투의 문장표현이 많은데 절제의 미를 살려 정리된 표현을 사용했으면 한다. 큰 목소리보다는 다양한 목소리가 더욱 힘이 있는 법이다.
 셋째, 장애우 개인이나 가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장애우 복지기관의 소개나 서비스 접근 방법 등에 관한 정보를 많이 실었으면 한다. 실제 생활에서 부닥치는 정보에 대한 무지 때문에 장애우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안내서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지난 2월호에 실었던 장애우 생활탐험 기사 중 "장애우 결혼상담소 현황" 같은 소개는 훌륭한 정보제공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함께걸음" 이 땅에서 일어나기 위한 작업으로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추진해 나가는 구체적인 사회활동이나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다루었으면 한다. 성공사례든 실패사례든 함께 걸어가는 것 자체에 공동체적 삶의 소중함이 있기 때문이다.

글/조흥식

잃어버린 사랑과 온기를 되찾아 주는 기폭제가 되기를

이제 다섯 살이 된 「함께걸음」은 사랑과 온기를 잃어버리고 얼어붙어 있는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줄 기폭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은 힘이지만 "우리"로 모일 때 큰 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 역할을 해내는 「함께걸음」을 기대한다.

 유태인 탈무드에 보면 "당장 먹을 고기를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라"는 내용이 있다.
 국민총생산액이 높아지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사회복지정책이 다양하게 시행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대부분 단편적이며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에만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장애우 당사자에게는 당장 몇 푼의 돈이 주어지는 것보다는 지속적인 일자리가 필요하다. 장애우들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주어져야 하며 장애우들의 생존권 보장과 고용 증대에 관한 계속적인 정책이 요구된다. 많은 장애우들이 각자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 정부의 자금지원 및 세제혜택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977년부터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되어 전 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있다. 생활이 어려운 빈곤가정에는 의료보호제도로 무료 진료혜택이 시행되고 있으나 이는 비장애우 위주로 만들어진 제도이기 때문에 장애우를 위한 의료제도의 투자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의료시설의 경우 장애우에게 알맞게 내부구조를 개조하고 장애우에게 적절한 치료기구 및 진료시스템을 갖춘 다량의 병원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재활의학 분야에 더욱 많은 투자가 요구되나 아직 극히 미미한 상태이다.
 치과의료 분야에서도 장애우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대한 치과의사협회에서 장애우 진료를 위한 병원 부지를 구입하고 병원운영에 필요한 기금 마련을 위하여 "텐탈 씰" 판매를 계획하고 있는 등 장애우 전문병원 설립을 위한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이제 다섯 살이 된「함께걸음」은 사랑과 온기를 잃어버리고 얼어붙어 있는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줄 기폭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은 힘이지만 "우리"로 모일 때 큰 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 역할을 해내는 「함께걸음」을 기대한다.

글/ 이상필

『함께걸음』과 울고 웃었던 추억을 가슴에 담고

「함께걸음」을 만들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은 내게 크나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때때로 진지하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으니까. 가난하게 살아가는 장애우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때로 눈시울을 적시고 빈 가슴을 소주잔으로 달랜 적도 있었다.

 지금부터 5년전 1987년 12월 서울 YMCA 강당에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창립 및 발기인 총회가 있었다. "출판부장"이라는 직함으로 인연을 맺게 된 나는 1988년 3월 "함께걸음"이라는 52쪽 짜리 창간호를 내는데 한 몫을 거들었다.
 정말 가난한 마음들이 모여서 시작했다. 장애우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힘을 모으자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때였다. 몇 번씩이나 이사를 하면서 책을 만들어내고 사업을 감행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아껴주시고 도와주신 많은 후원자들과 독자들, 고료도 없는 원고청탁에 기꺼이 응해주어 지면을 빛내 주신 필자들 그리고 동고동락했던「함께걸음」가족들 모두에게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자원봉사로, 후원으로 도와준 전국에 있는 농협 동인들에게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함께걸음」을 만들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은 내게 크나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때때로 진지하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으니까. 가난하게 살아가는 장애우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때로 눈시울을 적시고 빈 가슴을 소주잔으로 달랜 적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나의 소중한 삶의 원동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 그리고 일과 관련되어 알게 된 사람들이 지금도 나의 고객이 되어 주고 있고 연말에는 어김없이 안부카드를 전하는 지인(知人)들로 자리하고 있다.
 이 작은 지구촌에서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겠다고 거듭 거듭 다짐한다.「함께걸음」을 만드는 편집부에 선배로서 격려와 성원을 보낸다.

글/이종헌

장애우 개개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잔잔한 감동

「함께걸음」이 장애우 개개인의 아픈 삶을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을 때면 진하게 전해오는 감동을 느낀다. 파행적인 장애우복지정책이나 장애우단체들의 비리가 어김없이 폭로될 때에는 나도 모르게 심한 욕지기가 나오곤 하니 말이다.

「함께걸음」을 식을 줄 모르는 정열과 끈기를 지닌 "청춘"에 비유한다면 너무 진부한 표현일까. 매달 이 한 권의 잡지를 펼쳐보다 보면 문득 뜨거운 여름날, 부서지는 햇살 아래 서 있는 벌거벗은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이미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 웅크린 군중의 함성도 함께.
 그러면 내 잠자던, 아니 잠재워진 의식은 서서히 느린 화학반응을 일으키더니 이내 깊은 수면 위로 올라와 죽음 같은 시간들을 토해낸다. 그 속엔 이미 형체를 알 수 없이 갈갈이 찢겨진 종이쪼가리에 박힌 내 어줍잖은 기사가 날 향해 비웃는다. 너는 가짜라며.
「함께걸음」을 만난 지난 3년 간은 파상적 수준에 머무르던 장애우 관련 기사에 대한 부끄러움이「함께걸음」의 존재에서 얻었던 "안도감"과 뒤섞이던 날들이었다.
 그만큼「함께걸음」은 그동안 가능 한한 올곧은 시각과 심층적인 취재로 장애우 문제에 접근해왔으며 이제 누구도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함께걸음」이 장애우 개개인의 아픈 삶을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을 때면 진하게 전해오는 감동을 느낀다. 파행적인 장애우복지정책이나 장애우단체들의 비리가 어김없이 폭로될 때에는 나도 모르게 심한 욕지기가 나오곤 하니 말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함께걸음」이 4백만 장애우를 위한 대변지를 표방하고 나선  만큼 자칫 기관홍보지라는 주위의 오해는 사지 않았으면 한다. "옥의 티"에 불과한 점을 굳이 지적한 것은 쓸데없는 노파심 때문이었다고 해두고 싶다.
 지금도 사무실 내 책상 책꽂이엔「함께걸음」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보관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므로.「함께걸음」창간 5주년을 마음 깊이 축하한다.

글/이숙진

함께 일어나 걸을 때,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함께걸음"은 조화로움이고 있는 그대로 온갖 것이 갖추어진 행복이다. 행복은 반드시 기쁨만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다. 슬픔을 함께 나눌 때 더욱 깊어진다. 이런 뜻에서「함께걸음」의 지면은 눈물이다.

 "함께걸음, 제목이 참 좋죠." 얼마 전에 만난 어떤 사람의 말이다.「함께걸음」,이 말을 듣고 있으면 힘찬 결속과 약동하는 힘을 느끼는 동시에 동반자 같은 위로감도 느낄 수 있다.
 왜 "함께걸음"인가.
 선가(禪家)에 이런 말이 있다. "제자가 깨달으면 스승과 함께 손을 잡고 간다"고. 이 자리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고 소외가 없다. "함께걸음"은 조화로움이고 있는 그대로 온갖 것이 갖추어진 행복이다. 행복은 반드시 기쁨만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다. 슬픔을 함께 나눌 때 더욱 깊어진다. 이런 뜻에서「함께걸음」의 지면은 눈물이다.
「함께걸음」1993년 2월호 표지의 뇌성마비 장애우 김창민씨는 컴퓨터의 키보드를 손가락이 아니라 발가락으로 누른다.
 이것은 이상스럽게 개인적 사실보다는 온 인류가 처한 상황과 같은 사실로 다가온다. 김창민씨 그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어떤 정신으로 그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는 전쟁의 위험, 생태계의 파손 그리고 산업사회 속에서의 비인간화, 사실 우리는 그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않는가. 그를 보면 나 자신의 감추어진 부분을 보듯 멀리서부터 조금씩 아파지고 동시에 어떤 기쁨의 전율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의 발가락 끝이 키보드를 누르는 순간 세계는 변화된다. 그가 새로운 활로를 열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고정되어 멈추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죽은 것들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움직이고 변화한다. 그렇다면 누가 살아있고 누가 죽어 있는가?
 "함께 걸음", 오직 함께 일어나 걸을 때, 그때 우리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글/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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