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시민운동과 장애인운동
본문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민간정부의 출범 등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장애인운동"이 나아갈 길은 과연 어디인가. 중산층을 중심으로 시도하고 있는 경제정의실천신민연합 서경석 사무총장의 시민운동론과 장애우 운동의 가능성을 들어본다.
-이 글은 지난해 12월 15일에 있었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창립 5주년 기념 강연 원고이다.
<왜 하필이면 시민운동인가?>
매년 우리 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온 "시사저널"이 금년도에도 전문가 및 일반인을 상대로 최근 가장 영향력이 증대된 집단과 가장 영향력이 축소된 집단이 누구인가에 대한 조사를 행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상당히 주목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인은 최근 가장 영향력이 증대된 집단으로 언론기관, 야당, 시민단체의 순위를 꼽고 있는가 하면 최근에 가장 영향력이 약화된 집단으로 군부, 경찰, 재야세력을 꼽고 있어서 시민운동의 성장과 재야운동의 퇴조를 한눈에 보여 주고 있었다. 전문가 집단을 상대로 한 조사는 이보다 더 대조적이어서 영향력 증대 집단은 언론기관, 시민단체의 순이었고 약화된 집단은 군부, 재야세력의 순이었다.
구태여 이러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하지 않더라도 근자에 와서 시민운동이 이미 사회의 주류운동이 되었다는 다소 성급한 평가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으며 이러한 견해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앞으로의 사회운동은 시민운동으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 과거에 즐겨쓰던 "민중"이라는 단어가 찾기 어려워지고 대신 "시민"이라는 말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상의 한 예로 보여진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5년전 6월 민주화대항쟁 때만 하더라도 진보와 개혁을 주도하였던 재야사회운동이 급속도로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반면에 존재조차 미미하였던 시민운동이 어느새 재야운동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매우 정교한 토론을 필요로 한다. 이 질문에 대한 충분한 토론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필연적이고 바람직한 현상인지 아니면 이 변화가 재야의 전술적 실패에서 비롯되는 우연한 변화일 뿐이고 앞으로 재야운동이 다시 강화되는 길로 매진해야 하는 것인지 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답을 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한국 사회운동 특히 장애인운동의 나아갈 길을 논함에 있어서도 제일 먼저 "왜 하필이면 시민운동인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민주화 과정에 따른 국민의식의 변화>
지난 몇 년동안 우리 사회는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폭과 깊이가 너무도 커서 지난 몇십년간의 변화보다도 더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최근 몇 년간을 전환기라고 한다면 이러한 전환기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전환기의 성격 중에서 첫 번째로 언급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87년 6월 이래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확실하게 민주화 과정에 들어섰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이제는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투표"에 의해서 정권이 바뀌어지게 되었다는 점이 너무도 명백해졌다.
이렇게 우리 사회가 민주화 과정에 들어서게 되면 국민의식에 커다란 전환이 생기게 된다.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지적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제는 국민이 더 이상 비합법적인 투쟁을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비합법적인 투쟁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두터웠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회문제를 합법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비합법적인 투쟁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에 들어서면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일단 합법적인 공간이 주어지게 되면 국민은 즉각 그 사회가 허용하는 방법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할 것을 원하기 마련이다. 설사 합법운동으로 진정한 의미의 사회개혁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일단 합법적인 방식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하여 그 한계를 국민이 절실히 느끼게 해주지 않는다면 국민은 끝내 비합법운동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정치적인 억압을 전혀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학생들이나 재야의 비합법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간접경험 영역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 운동권의 성서를 전혀 공감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이제는 데모를 해도 정식으로 집회 신고를 하고 합법적인 활동을 해야 국민의 지지가 뒤따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민주화 과정이 우리 국민에게 끼친 첫 번째 의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민주화 과정이 우리 국민에게 끼친 의식의 변화는 이제는 "길거리에서 밀어붙이는 힘의 크기"에 의해 우리 사회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에 의해 사회가 변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혁명"이 아니라 "투표"로 정권이 바뀌는 세상이 되면 표로 연결되지 않는 어떠한 운동도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91년 강경대 치사정국 당시 재야사회운동은 연일 격렬한 가두시위를 전개하였지만 그러한 운동이 우리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오히려 광역의회의원 선거에서의 여당압승이라고 하는 보수회귀 현상을 불러들였을 따름이다.
92년 총선 시기는 오히려 공선협운동이 더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이다. 공선협은 길거리에서 가두시위를 하는 운동은 아니었고 스티커부착운동 등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의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야권의 신장으로 나타났다. 꼭 공선협만의 영향은 아니지만 군부재자선거부정문제 등 공선협 활동의 결과가 선거에 영향을 미친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렇듯 혁명이 아닌 투표로 정권이 바꾸는 세상이 되면 주목받는 사회운동이나 계층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과거처럼 혁명이 중요했던 시기에는 기층민중 운동의 강고한 투쟁이 매우 중요했고 광범위한 중산층들은 기껏해야 기회주의적인 세력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노동현장으로 가서 그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려고 노력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단 민주
모든 이해관계의 자유로운 분출이 가능해지면 필연적으로 이러한 이해관계들은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이해관계가 사회적 공공선에 부합하는가 하는 판단이 가장 중요해지고 따라서 특정 계급이나 계층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고자 애쓰는 시민운동이 훨씬 더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계층이나 계급의 운동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찰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운동의 지지를 획득하여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 과정에 들어서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제는 표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는 광범위한 중간층의 향배가 중요해진다. 이들은 "안정 속의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일정한 개혁요구를 전두환 정권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기층민중운동과 연대하여 87년 6월 민주화대항쟁과 같은 개혁 운동에 가담하였다. 반면에 이들은 다음 시기에 재야 및 기층민중 운동이 국민적 공감대를 외면하고 지나치게 변혁운동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안정에 대한 위협을 느껴 보수회귀의 현상을 만드는데 가담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주화 과정이 확실하게 진전되면 언론이든 정당이든 간에 이 중간층의 향배가 어디로 가는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들 중간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역사의식을 일깨우고 이들을 사회변화의 핵심적인 주체로 받들어주는 새로운 사회운동론이 나오지 않으면 진보와 개혁의 운동을 되살리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중간층을 한낱 기회주의적인 세력으로 치부해버리고 기껏해야 민중운동의 들러리로 생각하는 과거의 견해로는 변화된 상황에 바르게 대처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 점이 또한 민주화 과정이 가져다 준 커다란 변화이다.
세 번째로 민주화 과정이 가져다 준 변화는 사회적 공공선을 위한 운동이 가장 중요한 운동으로 부상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사회운동을 기층민중운동과 브르조아적 중산층운동동으로 분류했다면 이제는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운동"(expressive movement)과 "사회적 공공선을 위한 운동"(instrumental movement)으로 사회운동의 분류법이 바뀌게 되었다. 민주화 과정은 모든 사회계급, 계층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자유를 향유하게 해 주었으면 이에 따라 각종의 이해관계의 분출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과거에는 민중으로 분류되면 많은 운동들,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교사운동, 주민운동 등이 다 전경련, 경총, 전문직 단체와 같이 이익집단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이해관계운동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이해관계운동은 민주화의 결과로 가능해진 운동이다.
우리가 지난날을 군사독재체제로 부르는 이유는 과거에는 민중의 이해관계는 억압하고 재벌과 군대의 이해관계는 옹호하였기 때문이다. 일단 모든 이해관계의 자유로운 분출이 가능해지면 필연적으로 이러한 이해관계들은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이해관계가 사회적 공공선에 부합하는가 하는 판단이 가장 중요해지고 따라서 특정 계급이나 계층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고자 애쓰는 시민운동이 훨씬 더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일단 민주화 과정에 들어서면 "얼마나 많은 수가 참여하는 운동인가"보다 "얼마나 옳은 이야기를 하는 신뢰받는 운동인가"하는 점이 더 중요해진다.
요즈음 시민운동이 부각되는 이유를 제도언론의 부축임 탓으로 돌리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일면적인 진리를 내포하고 있을지는 모르나 사실은 매우 피상적인 관찰이다. 신문 독자들은 사회적 정론을 피력하고 있는 시민운동이 특정 사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를 매우 궁금해하고 있으며 신분은 바로 이러한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측면을 중시하여야 한다.
네 번째로 민주화 과정이 국민의식에 끼친 변화는 이제는 더 이상 흑백논리가 설득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대에는 흑백논리야말로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논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재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 하에서는 독재를 악으로 간주하고 악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흑백논리는 불가피하게 자기편을 미화하고 절대화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지난 날 독재하에서 민중주체론이 강조되고 민중이 절대화되었으며 갖가지 흑백논리가 꼭 필요했기 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민주화 과정에 들어서면 과거의 흑백논리가 거꾸로 질곡으로 전화하게 된다.
민중운동은 종래의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할 줄 모르게 되고 모든 문제는 다 미국과 노태우 정권 탓으로 돌려버린다. 그리고 운동에 대한 조금의 비판도 다 현 파쇼정권을 돕는 이로 간주된다. 이렇게 되면 운동권 내부에 언로가 막히고 그 결과 운동권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경직되고 가장 보수적인 집단으로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지면 운동권은 끊임없이 분열할 수 밖에 없다. 항상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하는 독선적인 풍토가 가져다주는 필연적인 결과물이 바로 분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이 사실은 집단이기주의의 무절제한 표출인가의 여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무조건 민중운동으로 과대포장을 하여 내어놓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감히 그 운동에 대해 공개적인 비판을 가하지 않고 그대신 민중운동의 지나침에 식상한 나머지 슬그머니 지지를 철회해 버리게 되고 그 결과는 요즈음과 같은 중간층의 보수화 경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민주화 과정에 들어서면 종래의 흑백논리는 시시비비의 논리로 대치될 수 밖에 없다.
이제는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더 이상 성역시하거나 프리미엄을 인정해주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인정은 오히려 그 운동의 참다운 갱신과 개혁을 늦출 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주화 과정은 "의식개혁운동"이 "제도개혁운동"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아 알게 해 주었다. 그동안 우리 국민은 지난 26년간의 군사독재를 거쳐오면서 모든 것을 박정희 전두환 정권 탓으로 돌리는데 익숙해져 왔으며 그러다보니 개인의 잘못조차도 다 구조악의 탓으로 돌리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과거 독재치하에서는 개인의 윤리의식을 고양시키는 운동은 설자리가 없었다. 모든 힘을 독재 타도에 모아야 하는 상황에서 개인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초점을 흐리게 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날 우리는 개인윤리의식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으며 그 결과 우리의 윤리의식은 파행적으로 성장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을 2-3년 겪으면서 우리 국민의 저항의식은 그동안 크게 성장했지만 반면에 법을 지키는 법치의식, 질서를 지키는 질서의식, 토론문화의 정착, 나눔의 정신, 고발정신, 환경윤리, 유권자의식, 참여의식 등 많은 시민정신은 최하위의 수준에 있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제도 개혁만으로는 안 되고 오히려 근면, 성실, 정직, 솔선수범 등 의식개혁을 강조하는 운동이 더 큰 반항을 일으키게 되었다.
<점진주의적 개혁노선의 보편화>
전환기의 두 번째 특성은 이제는 점진주의적 개혁노선에 대한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지나간 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주의 혁명이 대안이라는 생각이 최소한 진보적 지식인 집단 내에서는 합의된 견해였다고 할 수 있다.
광주사태의 충격,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 외체의 누증 등이 겹쳐 혁명적인 해결책이 불가피하다는 정서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흑자경제, 민주화 과정, 서울올림픽 등의 국내 변화와 아울러 동구권의 변화, 독일의 통일, 소련의 붕괴
이 운동은 또한 국민적 합의에 기초해서 생활상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특정 계급이이나 계층의 이해관계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가지지 않은 자의 편에서 가진 자를 공격하는 운동이 아니라 가진 자든 가지지 않은 자든 상관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조직화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이어야 한다. 제도개혁 뿐만 아니라 정신혁명을 똑같이 강조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등 사회주의권의 엄청난 변화가 국내의 진보적 지식인 집단 내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사회주의 혁명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의 생각은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되었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토대로 하되 다만 시장 경제체제가 가져다 주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여 복지를 확대시킴으로 해서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일단 이렇게 점진적인 개혁이 느린 것 같아도 복지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점이 명백해지게 되면 그동안 기존의 사회운동이 가져왔던 고정관념에 일대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정권타도 등의 과격한 슬로건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모하고 그대신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이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개혁이 비록 불철저하더라도 너무 조급해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물론 진보적인 정권이 과감한 개혁을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개혁에 소극적인 정권이 국민의 압력에 밀려 불철저한 개혁도 중첩되어 일어날 때에는 한참 후에는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점진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생기게 되면 기득권층을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가 생겨 과거처럼 무조건적으로 돌리는 것보다는 이들의 마음을 돌이켜 개혁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 가진 자가 양보하도록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진다. 이러한 양보를 통해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가 함께 사회개혁에 합의할 수 없게 된다면 사회개혁은 피나는 계급투쟁의 격전을 거칠 수 밖에 없다. 이제는 국민의 정신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정신운동, 교육활동, 종교활동 등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환기의 세 번째 특성은 이제는 토지 주택문제, 교육, 환경, 교통문제 등 생활권의 문제가 시민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자주·민주·통일과 같은 문제들이 더 이상 우리 민족의 중대과제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주 민주 통일과 같은 문제조차도 생활권의 문제를 통해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일반시민들에게 초대의 문제는 토지와 주택의 문제였다. 땅 가진 사람들이 엄청난 불로소득을 독점하게 하는 부동산 투기붐은 빈부의 양극화, 수출 부진, 한탕주의의 만연, 기업의욕 저하, 과소비, 향락퇴폐의 만연, 흉악범죄의 증가, 노사분규 격화, 저축의욕 저하, 부정부패의 만연, 탐욕과 이기주의의 만연 등 우리 사회에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미쳤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모아 그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이 꼭 필요하게 되었다.
근자에 와서는 환경문제가 온 인류의 최대의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이제까지의 경제성장 수준, 소비 수준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이제 인류는 오십년도 못 가 종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사회문제를 항상 계급투쟁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종래의 시각에 근본적인 재검토를 가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하고 있을 때에는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기업이든 정부든 민간단체이든 간에 다같이 힘을 합쳐 지구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운동>
민주화 과정, 점진주위적 세계관, 생활권의 등장으로 요약되는 최근 몇 년간의 전환기적 특성은 우리나라 사회운동의 축(軸)적인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는 종래의 경직된 운동방식으로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개혁과 진보를 이끌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광범위한 중간층을 보수화시키는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점이 지난 몇 년간의 경험에서 명백해졌다. 우리 사회의 개혁과제가 실천된 후에 보수화가 이루어진다면 이를 나쁘다고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산적한 개혁과제를 앞에 두고 우리 국민이 보수화된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따라서 보수화 경향을 띠고 있는 광범위한 중간층이 가지고 있는 안정의지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개혁의지가 충분히 발현되도록 하여야 한다.
안정의지의 충족을 위해서는 재야민중운동의 변화가 필요하다. 재야운동이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여 중간층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간층의 정서를 가지고 중간층의 개혁의지를 대변할 수 있는 시민운동의 출현이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비로서 기층과 중간층이 재결합하여 진보와 개혁의 바람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그동안 뒷짐을 지고 구경만 하고 있는 중간층을 다시금 개혁적인 시민운동에 끌어내려면 이들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조금도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그러려면 이 운동은 비폭력, 평화, 합법운동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운동은 또한 국민적 합의에 기초해서 생활상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특정 계급이나 계층의 이해관계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가지지 않은 자의 편에서 가진 자를 공격하는 운동이 아니라 가진 자든 가지지 않은 자든 상관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조직화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이어야 한다. 제도개혁 뿐만 아니라 정신혁명을 똑같이 강조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사회운동이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에 등장하고 있는 시민운동의 기본성격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운동은 기존 민족민주운동의 일시적 과오에 의한 반사이익에서 비롯되는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혹은 보수언론의 부추김에서 비롯되는 반짝현상이 결코 아니다. 오늘의 시민운동은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운동방식이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 내에 사회운동의 주류로 등장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장애인운동의 나아갈 길>
필자 자신은 장애인운동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장애인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지극히 원론적인 제시만이 가능할 따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하고 싶은 말은, 사회운동의 방향에 축적(軸的)인 변화가 불가피하다면 장애인운동도 그 예외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제는 장애인 운동도 변혁운동의 일부로 자신을 파악하기보다는 시민운동의 일부로 스스로를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둘째로는 장애인운동 또한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사회적 공공선에 종속시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일을 위해서는 공공선을 위해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여타 운동과의 연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상이군인의 행패"의 이미지로 인해 종종 장애인운동이 자칫 자신들의 어려움을 앞세워 사람들에게 떼쓰는 운동으로 비쳐지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단지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보다 도덕적인 설득력을 견지하기 위해 장애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곤경에 몰아넣고 있는 잘못된 사회경제적 구조를 고치는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장애인 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도시빈민, 여성, 노동자 등의 계층과 연
궁극적으로 장애인운동은 일반시민들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시정하는 운동이며 다같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운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운동은 궁극적으로 "의식개혁운동"이다. 따라서 장애인운동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화를 주기 위해서는 장애인운동 스스로 보다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운동이 될 수 있도록 앞장서 노력할 필요가 있다.
대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선한 의지를 가진 보통시민들과 공동의 과제를 가지고 함께 일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땅값이 안정되고 부동산투기가 근절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운동, 공명한 선거를 위한 운동,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운동 등이 그것이다. 최근 장애인운동이 이러한 형태의 연대활동을 강화해 온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참여는 장애인운동이 보다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와 지원세력을 확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로는 보다 광범위한 지원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성사가 잘 안 되는 것이 민주사회의 특성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관변이든 재야든, 여(與)든 야(野) 상관하지 않고 광범위한 결집을 이룩하는 것이 필요하며 장애인에 대해 낭만적인 동정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조차도 대범하게 지원세력으로 끌어들여 장애인복지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장애인운동은 일반시민들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시정하는 운동이며 다같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운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운동은 궁극적으로 "의식개혁운동"이다. 따라서 장애인운동이 다른 사람이 마음을 움직이고 감화를 주기 위해서는 장애인운동 스스로 보다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운동이 될 수 있도록 앞장서 노력할 필요가 있다. 고통을 담당하는 사람만이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고 남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가 있다.
장애인들이 앞장서서 더 높은 수준의 나눔의 운동 사랑의 실천 운동이 일어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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