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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역사속의 장애우를 찾아서]"역사의 아버지"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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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말 김대중 전 민주당총재는 대통령선거 패배에 대한 심정을 묻는 기자들에게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영국 유학 길에 올랐다.

오늘도 저 서산(수양산)에 올라
고사리를 캤도다
폭력으로 폭력을 보답하고도
그 그릇됨을 모르는 무와
신농·순·우의 호시절은
홀연히 사라졌구나
이제 우린 어디로 가야 하나
아아 가자 죽음의 길로
쇠잔한 나의 운명이여
-"사기열전" 권 1 "액이열전" 중에서-

 기원전 2세기 중국은 무제(武帝)가 집권하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한 시대를 누리게 된다. 무제의 일관성 있는 정책으로 당대의 석학 "동증서", 시인 "사마여상"을 비롯 삼년고개 이야기로 유명한 풍자가 "동방삭" 등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빛을 발했으며, "사마천"은 공자의 춘추(春秋)이래 대가 끊긴 중국의 역사를 다시 정리했다.
 당시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인 태사령으로 있었던 아버지 "사마염"은 죽음을 앞두고 아들 사마천에게 "공자가 춘추를 지어 역사를 남긴지 4백년이 지난 오늘까지 나는 사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 후 한이 일어나 천하를 통일하고 현명한 군주와 의에 죽은 충신들의 사적을 기록 못한 것이 유한이니 반드시 이 한을 풀어달라"고 유언했다. 사마천은 이러한 아버지의 유언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이루겠노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삼 년 뒤 아버지의 유언대로 사관이 된 사마천은 시경, 서경, 초한춘추 등을 정리하면서 방대한 중국역사의 한 가운데로 들어서게 된다.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한 칠 년째 되던 어느 날 그는 궁형 또는 폐형이라고 하는 생식기를 제거 당하는 치욕적인 형벌을 받게된다.
 사마천이 이처럼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된 것은 당시 흉노족과의 싸움에서 패한 장수 "이릉"을 두둔했기 때문이었다.
 이릉은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북방원정에 나서 1만 여명의 흉노군을 베는 전과를 올리기는 했지만 8만 대군에 포위되어 항복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무제가 이릉을 문책하는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사마천은 "5천의 군대로 8만 대군에 맞서 싸운 이릉의 용맹함은 비록 전투에 패했다고는 하나 용맹함을 천하에 과시했기 때문에 죄가 될 수 없으며 그가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은 뒤에 나라에 보답할 길을 찾기 위함"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처럼 자신에게 가해진 치욕적인 형벌의 고통 속에서『사기(史記)』라는 그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그의 저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기『태사공자전(태사공은 사마천의 호)』에 의하면 "옛날에 서백(주의 문왕)은 감옥에 갇혀서 "주역"을 저술하고 공자는 진과 채 사이에서 곤경을 겪고 "춘추"를 남기고 초의 굴원으로 추방되어 "이소"를 남기고 좌구는 눈이 멀어 국어를 짓고 손자는 두 다리를 잘리고 "병법"을 저술했으며 여불위는 촉 땅에 유배되어 "여씨춘추"를 남기고 한비자는 진의 감옥 속에서 "설난·고분"을 남겼다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피나는 노력으로 사마천은 18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마침내 130권의『사기』를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태고적부터 한의 무제에 이르기까지 2천 5백여년간 왕자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열두권의 "본기(本紀)"를 비롯해 각각의 사건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 열권의 "표(表)", 경제·종교 등 문화와 제도를 논한 8권의 "서(書)" 그리고 제후들의 역사를 기록한 30권의 "세가(世家)"와 학자·정치가·군인·사관 등 당대의 인물들을 기록한 70권의 "열전(列傳)" 등 모두 130권으로 구성된『사기』는 중국은 물론 흉노, 월남, 조선 등 당시 중국인이 알고 있던 전 세계의 역사를 처음으로 정리해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서술방식과 체계적인 정리 방법 등『사기』가 보여주는 역사 서술방식은 2천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히 역사서술의 본보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혈연과 족벌에 기초를 둔 주(周)나라의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개인의 실력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던 약육강식의 전국시대에 인간의 활동을 역사의 중심으로 보았던 사마천의 "역사의식"은 오늘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 거울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글/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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