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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제다] "장애인 신문 사태" 그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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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부장을 포함해 취재부 기자 5명 전원이 사표를 내는 것으로 막을 내린 장애인신문 사태는 "열악한 조건"과 "뒤쳐진 의식"이라는 장애우 언론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들어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자들의 무더기 사표와 함께 새롭게 드러난 장애우 언론, 그 빛과 그림자를 되짚어 본다.

<100일 작전( ? )>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정 방송" 쟁취를 위해 문화 방송 노동조합이 파업을 단행하던 9월초 강남구 대치동 장애인 신문사는 또 한번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날 아침 직원회의 시간에 최규옥 부회장이 느닷없이 "도저히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다"며 자리를 뜨자 박한수 총무 이사가 곧 말을 받았다.
  박한수 이사는 최부회장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얘기하던 중 최규옥 부회장의 형인 최규근 총무국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100일 작전에 3개월 간 임금 지급을 안 하는 문제도 들어있는 거죠"라고 동의를 구했다.
  갑작스런 발표에 놀랜 직원들이 웅성웅성 하는 가운데 백종환 편집부장이 일어나 "신문사의 장래를 논의하는 것은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가 결정된 이후에나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고 "가정을 가진 사람에게 석 달씩 임금을 주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나가라는 것과 같기 때문에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면서 회의장을 나섰다.
  이러한 백부장의 강력한 반발에 호응해 기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서 굴곡 많은 "장애인신문 사태"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기자들은 먼저 이러한 일방적인 결정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되짚어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그 끝에서 뜻밖에도 기울어 가는 신문사를 되살리기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여겼던 김종인 사장이 있었던 것이다.
  폭탄선언 다음날 기자들이 김종인 사장의 해명을 듣기 위해 극동방송(김종인씨는 극동방송의 장애우 대상 프로인 "희망의 구름다리" 진행자이기도 하다)을 찾았을 때 김씨는 특유의 경상도 억양으로 "어데요. 난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라고 말해 기세 등등하게 찾아갔던 기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김종인씨가 이처럼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바람에 그때까지만 해도 김종인씨를 믿고(?) 있었던 백종환 부장과 기자들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하고 생각하며 공격의 화살을 다시 최규옥 회장과 몇몇 임직원들에게 돌리고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따지고 들었으나 그들은 그저 "웃고"있을 뿐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과연 누가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 그리고 왜 이런 결정을 내려야 했는지 하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이런 식으로 직원들을 농락하고 이간질시키는 김종인씨의 행위" 자체에 대한 인간적인 분노가 먼저 터져 버리고 만 것이다.

<왜 떠나야 했는가?>
  9월 29일 강희석, 윤정의, 이혜정, 정의택 기자 등 취재부 기자 전원은 장애인신문 해직기 자 일동 이름으로 발표한 "왜 떠나야 했는가?"하는 유인물을 80여 장애우 단체에 보내 김종인 사장의 이율배반적인"인간성"을 폭로했다.
  이들은 유인물을 통해 "장애계에서 12년 동안 활동해온 김종인씨의 실체는 허상"이라고 주장하고 "장애인 기자의 목발을 휘두르며 기자를 폭행하려한 기만적이고 이중적인" 김종인씨의 행위를 비난하면서 "장애인신문의 정상적인 운영과 장기적인 발전을 위하여 법인체로 전환할 것"과 "기만적이고 이중적인 김종인 사장은 장애계를 떠날 것" 그리고 "파행적인 운영과 독선으로 억울하게 신문사를 떠난 해직 기자들은 즉각 복직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기자들이 밝힌 김종인씨의 이중인격자적 행위는 한마디로 "자신의 말을 자주 뒤집는다"는 것인데 이러한 김종인씨의 "말 뒤집기"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확신에 차 있는지 오히려 자신들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고 한다.
  단적인 예로 방송국에 찾아간 기자들에게 김종인씨는 자신이 3-4천만 원의 어음을 막는 등 신문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으나 이 말을 전해들은 최규옥 부회장이 즉시 김종인씨에게 전화를 걸어 "네가 단돈 한 푼이라도 냈냐. 네가 하라는 대로 다했는데 이제 와서 딴 소리냐"고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종인씨의 말 뒤집기에 대해서는 김씨를 장애인신문 사장에 영입하기 위해 무려 8개월간이나 접촉을 하는 등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김동범씨(현재 지체장애자협회 기획실장)를 비롯 장애인신문 관계자들이 모두 비슷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발단이 됐던 "3개월 임금" 문제에 대해서도 김종인씨가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최규옥 부회장과 함께 있었음을 "확인"했음에도 태연하게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의 태도를 보인 것은 바로 이러한 김종인씨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김종인씨가 장애인 신문에 몸담았던 지난 6개월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과 부인으로 일관했던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해 지난 여섯 달 동안 그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뿌리 길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마침내 파국으로>
  한편 유인물이 발표된 직후 장애인 신문 측은 이번 사태를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일부 기자들이 저지른 경거망동"이라고 밝혔다.
  최규옥 부회장은 이와 관련해 "봉급을 안 주고 어떻게 부려먹겠느냐"고 되물으며 "그 날 그런 얘기 가 나온 것은 앞으로 아무 비전이 없으니 정신교육을 위해 했던 말을 기자들이 잘못 알아들은 것"이라며 "별일"이 아닌데 일이 커졌다는 투로 얘기했다.
  덧붙여서 최부회장은 "우리가 뭔가 만들기 위해 신문 보급도 하고 봉급도 3개월 간 안 받는다는 정신으로 뛰자.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뜻으로 했던 말을 오해한 것 같다고 사태 발생의 책임을 오히려 기자들에게 떠넘겼다.
  한편 김종인씨는 이 문제에 대해 "8월말 월급을 주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전에는 두세 달 월급 안 받고도 일 잘했는데 요새는 어림도 없다고 얘기하며 "정신이 빠졌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난다"고 말하며 "이런저런 얘기 끝에 구독자를 늘리는 것만이 신문이 살길이라는데 의견을 모아 "사랑의 손잡기 후원회 늘리기 100일 작전"을 세운 적은 있으나 임금에 관해 얘기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김씨는 "이들이 주장한 사실은 모두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하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매도하는 풍토는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사측에서 이번 일을 단순히 말이 오가는 중에 일어난 사소한 오해라고 여기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백종환 부장을 비롯한 장애인신문 기자들은 "한두 명도 아닌 우리가 모두 그렇게 잘못 들을 리가 있느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이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문제는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말을

 "전단 살포 사건에 부쳐"라는 제목으로 이번 사태가 "본말이 전도된 사실무근의 허위·과장·왜곡된 것"이라는 최규옥부회장 명의의 장문의 글이 실림으로써 기자들에게는 사실상 "나가라"는 최후통첩과 함께 스스로 신문으로서의 자신의 목숨마저 끊어버렸던 것이다.

뒤집는 태도"라고 회사측을 비난했다.
  기자들이 출근을 거부하며 회사측과 힘겨루기를 하던 10월초 파문이 커지기 시작하자 회사측은 "더 이상 사태가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김원경 부회장을 내세워 중재에 나섰으며 10월 2일 13시간에 걸친 마라톤협상을 통해 서로"모든 일을 깨끗이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데 합의를 함으로써 사태는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월 7일 사태는 끝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이날 발행된 장애인 신문에는 전단을 배포한 기자들이 자신들이 "사실을 허위, 왜곡 및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김종인 사장의 명예를 크게 훼손한데 대해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할 뿐 아니라 어떠한 조치라도 엄숙히 이행할 것"을 약속하는 사과문을 비롯해 "전단 살포 사건에 부쳐"라는 제목으로 이번 사태가 "본말이 전도된 사실무근의 허위·과장·왜곡된 것"이라는 최규옥 부회장 명의의 장문의 글이 실림으로써 기자들에게는 사실상 "나가라"는 최후통첩과 함께 스스로 신문으로서의 자신의 목숨마저 끊어버렸던 것이다.
  최규옥 부회장은 이 글을 통해 김중인 사장은 "제일 어려운 시기에 와서 고생을 엄청나게 많이 한 훌륭한 분"으로, "이번 전단 사건은 스스로 사임한 기자들이 기자사임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자원봉사 사장 김종인씨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고 어처구니없는 인신공격으로 매장하려는 행위이며 공격의 초점을 저에게 하지 않고 장애인 분야 전문가인 김종인 사장에게 한 것은 혹시 장애인 신문을 와해하려는 세력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김종인씨의 땅에 떨어진 명예를 만회 시켜주기 위해 "치졸한" "범법행위" 등 원색적인 말을 총동원해 기자들을 몰아붙였다.  기자들 또한 회사측의 이러한 "또 한번의 배신"과 "신문으로서의 자살행위"에 대해 "더 이상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다"며 전원 사표를 냄으로써 장애인신문 사태는 결국 파국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곡필과 파행의 역사>
  89년 3월 문왕준씨를 발행겸 편집인으로 "전국 4백만 장애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겠다"며 모습을 드러낸 장애인신문(당시 장애자신문)의 역사는 한마디로 "곡필과 파행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창간 후 불과 4개월여 만에 노동조합 설립과 올바른 신문을 만들기 위한 방안 등을 둘러싸고 기자들과"첫 충돌"을 했던 장애자 신문은 결 국 7월 중순 "폐간"이라는 예정된(?) 수순을 밟으며 파행적인 운영의 서막을 장식한다.
  예사롭게 터져 나오는 욕설, 심지어는 기자들 얼굴에 재떨이를 집어던질 정도로 폭력이 난무하는 공포 분위기, 만성적인 임금 체불 등 장애인신문 기자들이 털어놓은 사내의 분위기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사실은 89년 당시 노동조합(위원장 김미영)이 쟁의행위에 들어가면서 고발한 신문사의 파행적인 운영과 너무도 똑같은 상황이 라 오히려 신기할(?) 정도인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언론사 내부의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버젓이 자행될 수 있었던 것은 신문사를 운영하는 사주들이 장애우를 철저히 대상화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장애우를 빌미로 "다른 사업"에 운영할 만한 철학이나 의식이 전혀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애자 신문이 끼친 악영향은 이에 그치지 않았는데 이는 문왕준 체제 당시 사장 직무대행이었던 최일랑씨가 장애자 신문이 폐간되자 독자적으로 "세계장애인신문"이라는 곁가지를 치고 여전히 장애판에 남아있는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초대 발행인인 문왕준씨는 자신을 80년 당시 "언론통패합"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해직기자"라고 주장했으나 신아일보를 거쳐 시사통신에서 일하다 "돈 문제"와 관련된 일로 해직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장애자 신문의 창간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사실상 신문사를 끌고 왔던 최규옥씨는 자신의 말대로 "신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운동선수 출신으로 건국대 체육학과를 나와 10여 년간 유도 선수로 활동했으나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 선수의 1기생이 되면서 프로레슬링으로 방향을 바꾸고 연예인 사업단 등을 운영하면서 "야간업소 정화사업" 등의 일을 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최씨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세계와 전혀 동떨어진 신문사를 운영하게 된 동기에 대해 "어떻게 나를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88년 고향 선배인 문왕준씨를 비롯 장애인 두 분이 찾아와 최장사같이 건강한 사람이 장애자들을 도와야 되지 않겠느냐고 신문 창간을 권유해 내 가게에서 발기하게 됐다"고 장애인신문의 창간 과정을 밝혔다.
  최씨는 당시 문왕준씨에게 "나는 스포츠맨이라 운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니 당신이 신문사를 맡아 달라"고 했으나 경영 일체를 넘겨받은 문씨가 자신의 정치적 야심(국회의원 출마)을 위해 정호용의원 등 정치인을 경영에 참여 키려고 하는 와중에 노조결성 등 예기치 않은 문제가 터져 결국 폐간하고 말았던 것이다.

<썩은 뿌리, 굽은 가지>
  하남시 감일동에서 장애인신문이 새롭게 최규옥 체제로 문을 열기는 했지만 경영상의 어려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신문사는 오금동에서 역삼동으로 그리고 다시 오금을 거쳐 대치동 현재의 사무실에 자리를 잡기까지 떠돌아 다녔으며 이 과정에서 최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갈빗집마저 박한수 총무이사에게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사가 경영상의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면서 자금줄을 찾기 위해 안이 되어있던 최씨는 지난해 9월 "임금 등 경영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피닉스재단(회장 이성한)의 계열사로 들어가 역삼동 피닉스재단 건물로 사무실을 옮기게 된다.
  두 달 남짓 피닉스 재단과 함께 "사업"을 했던 장애인신문은 이 기간 동안 "서화전"과 "디너쇼"를 비롯 본격적으로 행사에 뛰어든 것을 비롯하여 독지가로부터 파주에 "장애인교육연수원" 부지를 기증 받기도 하는 등 겉보기에는 잘 돼 나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피닉스 재단이 약속했던 월급은커녕 장애인 신문을 자신들의 다른 "사업"에 이용하는 등 문제가 생겨 두 달 만에 다시 보따리를 싸고 오금동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처럼 피닉스 재단과의 해프닝은 운영만 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최씨의 경영철학과, 그 와중에서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 장애우의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피닉스 재단과 결별했던 오금동 시절은 최씨의 표현대로 "월급은커녕 끼니도 라면으로 때울 정도로" "최악의 상태"였으며 이때부터 장애인신문 내부에서는 서서히 "전문 경영자"에 대한 요구가 일기 시작했다.
  당시 기획실장으로 장애인신문의 재정관리를 담당했던 김동범씨는 "장애인신문이 신문으로서 위상이 제대로 서지 못했던 것은 "제품"자체가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는 전문 경영진이 들어오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해 전문가를 찾고 있던 중 김종인씨를 알게 됐다"고 김종인씨와 접촉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파국의 시작>
  최규옥 체제로는 더 이상 아무런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보수 명예직"인 김종인씨의 역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신문사 내부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이 꼬리를 무는 등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진원지가 김종인사장이라는 얘기도 심심지 않게 나오기 시작했다.

전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장애인 신문 측은 그 대안으로 김종인씨를 선택하고 무려 8개월 간이나 접촉을 하면서 "사장" "편집장"등의 자리를 제안하는 등 김씨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지지부진하던 중 최규옥 부회장이 5천여 만원에 이르는 부채를 자신이 맡기로 하면서 마침내 올 3월 장애인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쓰러져가는 신문사를 되살릴 유일한 대안이며 "구세주"로까지 여겨지던 김종인 체제로 새롭게 시작한 장애인 신문은 초기 광고가 넘쳐날 정도로 "호황"을 맞아 모처럼 활기찬 분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보수 명예직"인 김종인씨의 역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신문사 내부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이 꼬리를 무는 등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진원지가 김종인사장이라는 얘기도 심심지 않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어려움을 참고 견뎌 나갈 수 있었던 바닥에는 나름대로 끈끈하게 이어져왔던 "인간관계"가 있었으나 김종인 사장의 등장과 때를 같이 해 마침내 이것마저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김종인 사장의 소위 "이중인격"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바로 김씨를 영입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했던 김동범씨로 그동안 최규옥 부회장이 모든 수입을 챙기고 필요한 만큼 받아서 쓰는 구멍가게식 운영으로 변변한 장부하나 갖추지 못한 신문사의 현실에 대해 김종인 사장의 질책이 떨어지고 이에 대한 책임 소재 문제로 최부회장과의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김종인씨와 만나 단둘이 나줬던 은밀한 얘기가 다음날 아침 곧바로 최규옥 부회장에게 들어가는 현실에서는 "더 이상 일할 수 없다"며 사표를 낸 것이다.
  그러나 김종인씨는 이 문제와 관련해 최부회장에게 "모든 업무를 내가 보겠다. 사표를 수리하라"고 말했음에도 김동범씨에게는 "어려운 시기에 같이 고생했는데 마음을 잡고 다시 시작하자"는 식으로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백종환 부장이 "지장협의 장학금을 받는다"는 등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때마다 김종인씨를 둘러싼 의혹과 불신의 골 역시 점점 깊어져 마침내 9월말 "3개월 임금 미지급" 문제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한편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됐던 김종인씨는 자신을 둘러싼 안팎의 이런 평가에 대해 "이렇게 답답한 경우는 처음"이라며 "결국은 대화 부족으로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라고 문제를 "대화 부족" 탓으로 돌렸다.
  김씨는 이와 함께 "아무리 잘못을 했더라도 일차적으로 안에서 문제를 풀려고 해야지 이런 식으로 밖에다 대고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말했다.

<수렁에 빠진 언론 그리고‥‥‥>
  이제 주변의 얘기를 잠시 접어두고 이 사건의 진정한 당사자이며 또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한 기자들을 둘러싼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건의 발단이 됐던 "왜 떠나야했는가"라는 유인물에서부터 "전원

김종인
"양쪽 모두가 당한 것"

"왜 떠나야 했는가"라는 유인물로 물의를 빚었던 전 장애인신문사 사장 김종인씨를 만나 징애인신문 사태와 그간의 심경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보았다.

  - 지금 심정은.
  = 지난 7개월은 한마디로 "생의 환멸"을 느낀 시기였습니다. 특히 최근 한 달 동안은 "악몽"같아 다시 생각하기조차 싫습니다. 내가 들어가서 신문이 잘 돼야 하는데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으니‥‥‥‥ 장애인 신문사에서 기자와 저, 양쪽 모두가 당한 것이라고 욥니다.
  - 장애인신문과 관계를 맺게 된 동기는.
  = 장애인신문이 오금동에 있을 때부터 왔다 갔다 하기는 했었는데 지난 3월 28일 최규옥 부회장이 내 강의를 듣고 "저런 방향이라면 되겠다"며 본격적으로 접촉을 해와 "시간이 나는 대로 돕겠다"는 차원에서 수락을 했던 것이며 처음부터 사장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 6개월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했다는데.
  = 처음 장애인 신문에 들어갈 때 몇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부채가 7∼8천만 원이 넘을 경우에는 아예 회사를 넘기고 3∼4천만 원으로 우선 급한 불을 끄면 다른 사람을 찾아 제 궤도에 올릴 생각이었으며 이 기간을 대략 6개월 정도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경영 전반에 관한 모든 결정권은 최부회장이 갖고 있는 상태였으며 나는 "얼굴마담" 정도의 역할 밖에 못해 8월말부터 정리를 시작했으며 이번 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9월 17일 이미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 이번 사태가 왜 일어났다고 보는지.
  = 이번 사태는 기자들과 최부회장과의 관계에서 일어 난 것인데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고 화살이 엉뚱하게 나에게 돌아온 것이라고 봅니다. 기자들과는 커다란 갈등 구조가 없었는데 그간 대화가 부족한 것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혹 아무 리 잘못을 했더라도 모든 얘기는 당사자인 나하고 풀어 야지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기자들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 항간에는 사과문과 해명기사도 김종인씨가 작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 내 말을 믿던지 안 믿던지 그건 알아서 할 일이지만 나는 끝까지 "기자는 살리고 나만 나가겠다"는 생각에 기자들의 이름을 내는 문제로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최부회장을 비롯해 주위에서 "모든 일을 마무리 짓자는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자꾸 말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 현재 모든 것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로 더 겸손해져야 하겠구나하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곳 일도 싫고 내 자신도, 모든 것이 싫을 뿐입니다.


최규옥
"법인 설립을 위한 작업 진행 중"

장애인신문사의 실질적인 시주이며 이번 사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최규옥씨를 만나 그의 언론에 대한 철학과 장애인 관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번 시태의 해결책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 지금 심정은.
  = 어제(9월 20일) 아이들이 찾아와 임금문제로 노동부에 고발하겠다고 합디다. 너무 속상해서 어제 저녁 생전 처음 폭음을 하기도 했는데 너무나 속이 상하고 세상이 허무한 것 같습니다.
  - 자신의 활동 분야와는 동떨어진 신문을 하게 된 동기는.
  = 집에 여동생이 대학 졸업 후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지금 15년째 꼼짝 못하고 누워지내는 장애인이라 평소 장애인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지요. 그러던 참에 문왕준씨를 비롯해 장애인분들이 몇몇 찾아와 "약한 사람을 도와주자"고 하더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이라면 내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문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운영상의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 그동안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나는 오직 신문 나오는 태만 최선을 다해 한 달에 천오백만 원 이상 적자를 보면서도 "내가 라면을 먹고 길거리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신문만은 못 놓는다"는 심정으로 지금껏 꾸려왔습니다. 지금까지 6억 정도 출현을 했는데 여기서 자포자기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앞으로 한 10억 정도 빌려서 새로 신문을 살릴 것입니다. 저는 한번 한다면 목숨을 걸고 하는 스타일입니다.
  - 이번 기자들의 집단사표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 한마디로 사유가 이렇게 허무한가 하는 생각뿐입니다. 정든 사람이 모두 뛰쳐나가 버린 이 아픔은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그동안 신문을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같이 고생을 했는데 이제 와서 월급 몇 푼 가지고 노동부에 고발 운운하는 것은 노동법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정부에서 할 일을 내가 생돈 깨가며 대신하는 건데 나도 억울합니다. 사실 16편 증면도 기자들이 우겨서 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얘기하다니‥‥‥ 하지만 진실은 이기는 것이고 승리자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믿고 이 어려움을 이겨 나갈 생각입니다.
  - 김종인 사장에 대해서는.
  = 그 분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십니다. 지난 육개월간 월급도 한 푼 안 받으시고 우리 사정이 어려울 때 떠나는 게 미안하다고 사표도 제게 안 내고 국장에게 내셨더구만요. 그리고 신문에 그런 글이 실리게 된 것은 제가 마지막으로 떨어진 명예를 만회해 주기 위해 "마음대로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 장애인신문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은.
  = 어찌됐건 장애인들에게 좋은 정보지가 되기 때문에 신문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몇 가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데 그게 잘 되면 다시 증면을 하고 칼라판도 낼 생각입니다. 그동안 애들 말만 믿고 기자도 열다섯 명씩이나 뽑기도 했지만 앞으로는 내실 있는 운영을 하려고 합니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힌다면.
  = 올 11월부터 내년 초까지 중국에서 최초로 "장애인 돕기 프로레슬링 대회"를 열 계획이며 중국정부와 협의해 재활원을 짓기 위한 1만여 평의 부지도 마련했고 또 현재 법인설립을 위한 작업을 진행 중에 있는데 80퍼센트 정도 완성됐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표"라는 파국에 이르기까지 장애인신문사 기자들이 보여줬던 행동은 한마디로 장애우 언론과 언론 종사자들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이들은 유인물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이번 사태의 원인을 "김종인씨의 이중 인격적 행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 장애인신문 사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바로 "기자들 스스로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자들은 그동안 스스로 "억눌리고 고통 받는" 장애우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글"을 무기로 싸운다는 화려한 명분과는 정반대로 "폭언"과 "욕설" 등 비민주적인 사내 분위기와 상시적인 임금 체불 등 절

장애인신문 사태는 "사이비 언론"이 판칠 수밖에 없는 장애판의 열악한 현실과 문제의 본질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기자들의 뒤쳐진 의식이 빚어낸 합작품이며 결국 그 피해는4백만 장애우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적으로 열악한 근무조건 등에 길들여져 이를 개선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지내왔던 것이다.
  이처럼 체념에 가까운 기자들의 무기력은 이번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신문사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김종인사장에 대한 "환상"과 극단적인"혐오"라는 감정적 차원에서만 움직였으며 이러한 뒤쳐진 의식은 결국 인신 공격성 유인물에서 드러난 편협한 시각과 며칠 후 스스로 이를 시인하는 사과문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는 "갈팡질팡한 행동"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한편 장애인신문의 사주인 최규옥씨는 "단순하고 우직하다"는 평가와는 다르게 걸핏하면 임금을 체불해 고발을 당하는 경우가 알려진 대로 예닐곱 번이나 되는가 하면 심지어 기자들의 월급으로 자신의 승용차를 사는 등 신문사를 마치 자신의 "구멍가게"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 행태를 서슴없이 저지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씨는 이에 대해 오히려 "임금을 주기 위해 기증 받은 차까지 팔고 걸어 다니는 신세"라고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이처럼 장애인신문 사태는 "사이비 언론"이 판칠 수밖에 없는 장애판의 열악한 현실과 문제의 본질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기자들의 뒤쳐진 의식이 빚어낸 합작품이며 결국 그 피해는 4백 만 장애우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현재 장애인 신문은 편집부 기자를 취재로 돌리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평소 보다 4면이 줄어든 8면으로 신문을 내고 있는데 여전히 김종인씨를 사장으로 밝히고 있다.
  "취재 나가서 배척을 당하는 등 치욕적인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정론지로 만들어야겠다는 신념이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두 똘똘 뭉쳐 노조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는 김미영씨의 얘기는 장애인신문 사태가 갖는 문제점과 그 진정한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작성자전흥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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