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 약소계급의 옹호와 변호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기고 2] 약소계급의 옹호와 변호

본문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나눔"을 생활철학으로 삼고 있는 "김정문 알로에연구소" 김정문 회장의 이러한 생활철학이 있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글을 싣는다.

<46년 전의 회고>
  1946년의 일로 생각합니다. 그때 나는 고향인 경남 통영읍(지금의 충무시)에서 통영수산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한 해 전인 45년에 우리나라는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던 때이고 미군이 상륙하여 군정(軍政)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젊은 미군 장교(중위였다고 생각함)가 통영에 와서 수산학교, 중학교, 여학교 학생 등을 한 강당에 모아 놓고 강연회를 했습니다. 제목은 "약소계급의 옹호와 변호"였습니다. 그 줄거리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혹인 노예를 해방했고, 일본의 카가와 토요히꼬(賀川豊彦)가 빈민굴에서 참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것, 그리고 우리 젊은 학도들도 그들과 같이 약한 자, 소외 받는 자, 고통 받는 자의 편에 서서 일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링컨은 미국인뿐만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위인이지만 1년 전까지 가공할 적으로 싸운 일본인인 카가와에 대하여 격찬하는 이 미군장교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이미 링컨의 전기를 읽었었고 카가와 선생의 「사선(死線)을 넘어서」, 「한 알의 밀」 등의 그의 주요 저서도 읽었었습니다.
  약소계급을 위해 헌신한 이 두분은 내 사춘기의 인생관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날 미군장교의 특강은 나에게 더 큰 확신과 약자(弱者) 옹호에 대한 정열을 북돋아 주었습니다.6.25 사변 때
  그리고 4년이 지난 1950년에 6.25사변이 일어났습니다. 38선 이북은 물론이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부산은 본래 살던 시민보다 몇 십 배나 되는 사람들로 넘쳤고, 당시 부산의 동아대학에 다니던 나는 2층으로 된 우리 집을 다 개방하여 수십 명의 피난 학생들을 먹이고 잠재우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부산 교도소에 매주 일요일에 나가 대강당에 공산주의자와 여러 범죄자를 모아 놓고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 병실에 들러 중병에 걸렸어도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돕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그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일이면 교회당을 메우는데도 그늘진 곳에서 병들어 죽어 가는 죄수들을 돌보지 않는 데 대해 나는 충격을 받았고 분노를 느꼈습니다.
  한편으로 기독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나는 부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약소계급의 옹호와 변호"라는 제목으로 강연회를 열고 약하고 병들고 굶주린 피난 동포들을 돕자고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젊은 날의 정열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46년 전 미군장교가 가르쳐 준 그 제목 "약소계급의 옹호와 변호"라는 글을 쓰게 됩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구약성서 이사야 1장 4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을 나 나름대로 요약, 의역(意譯)해 보겠습니다. 이 글은 대예언자 이사야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호(怒號)한 말씀입니다.
  "슬프다 죄를 범한 나라여 허물 진 백성이여 행악(行惡)의 종자여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너희는 그것을 치유 받지 못하였구나"
  "너희 소동과 고모라(주. 범죄의 창궐로 멸망한 고대 도시로 팔레스타인 사해(死海) 남쪽에 있었다고 함)의 관리들이여 너희가 성전에 바치는 갖가지제물이 무슨 소용이며 너희가 안식일을 비롯한 예배모임, 소위 대규모 집회를 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 "
  "너희들이 무수한 제물을 바치고 대성회를 열면서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나는 견딜 수가 없노라. 거룩하다고 하는 너희들의 행사들이 오히려 내게 무거운 짐이로다"
  "너희는 손을 펴서 나를 찬양하고 간구하는 기도를 할 때에 나는 눈을 가리우고 듣지도 않을지라. 그것은 너희 손에 약한 자를 착취한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내 눈앞에서 악한 일을 버리고 선한 일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의 원통함을 풀어 주고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여기서 고아와 과부는 당시에 가장 버림받은 계층을 말합니다.
  구약성서의 아모스서(書) 5장 2∼24절을 역시 요약, 의역(意譯)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내가 너희의 여러 축제일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희들을 기뻐하지 아니 하노라. 너희가 가지각색 제물을 바칠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다. 나를 찬양하는 음악소리를 내 앞에서 그치라.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公法)을 물같이 흘리고 정의를 하수(河水)같이 흘릴지라"
  예언자 아모스도 공의로운 법을 지키고 사회정의를 강물처럼 흘리라고 말하고, 이것은 자기 말이 아니고 신의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아모스서 5장의 다른 곳에서는 "너희가 가난한 자를 짓밟고 농민에게 소작료를 부당하게 빼앗았다"(성서에는 밀이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소작료고 의역함).
  "너희는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들이라", "공법을 잡초(성경에서는 사철 쑥을 일컫는 인진으로 표기)처럼 만들고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이다"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즉 궁핍한 자, 약한 자들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신의 공의로운 법과 정의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오늘>
  우리나라의 현재 실상을 들여다보면 성서의 모스와 이사야의 시대 즉 기원전 8세기의 이스라엘과 흡사합니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지도층부터 관리들 그리고 백성들까지 썩어 가고 있습니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돈이 있으면 죄를 지어도 무죄가 되고 돈이 없으면 유죄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권력 있으면 죄를 지어도 무죄가 되고 권력이 없으면 죄가 없어도 유죄가 된다는 얘기도 됩니다.
  요즘 연기군 군수의 관권선거 양심선언과 노을대통령의 민자당 탈당선언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 다.
  그런데 양심선언을 한 사람은 감옥에 가두고, 이것을 지시한 상부층들과 불법관권선거자금을 댄 사람은 무사합니다. 통한할 일이지만 법의 정의가 죽었습니다.
  부유하고 향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없이 많은 것 같고 골프장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20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한 자, 고아들, 장애우들을 위한 국가의 복지비는 쥐꼬리만합니다.

<올림픽 7위의 한국 복지는 70위>
  성심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김종해(金宗海)교수가 지난 9월 19일, 국민연금 관리공단과 노동조합 등 8개 단체로 구성된 "사회복지예산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공청회(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발표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한국은 정부 예산 중 사회복지예산 점유율이 8.7%로 독일 68.4%, 스페인과 스웨덴 각 61.6%, 네덜란드 50.6% 둥에 크게 뒤질 뿐 아니라 올림픽 상위입상 30개국 중 독립국가연합(CIS), 중국, 쿠바,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 등 9개국을 빼고도 18위에 그쳤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86년 기준).
  특히 "체력은 국력"이란 말과는 달리 우리의 복지예산은 금메달을 1개 딴 뉴질랜드, 핀란드, 덴마크의 복지 예산이 각각 45% 안팎, 2개를 딴 브라질이 30%인데 비해 여기에도 크게 못 미쳐 복지사회구현이라는 정부의 목표지향을 무색케 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를 표방하는 종교인>
  우리나라에는 2000만 명이 훨씬 넘는 불교, 유교, 기독교, 카톨릭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십억 원짜리 예배당을 짓기도 하고, 불타탄신일에는 전국에 수십만 개나 되는 불등(佛燈)을 전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에 100만 명의 교인

한편으로 기독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나는 부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약소계급의 옹호와 변호"라는 제목으로 강연회를 열고 약한고 병들고 굶주린 피난 동포들을 돕자고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젊은 날의 정열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45년 전 미군장교가 가르쳐준 그 제목 "약소계급의 옹호와 변호" 라는 글을 쓰게 됩니다.

들이 여의도 광장에서 거창한 성회(聖會)를 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종교인들이 가난에 시들어 가는 사람들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인색합니다.  최근 단국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장종만(張鐘萬)목사는 "한국 대도시 교회의 행정의 구조 및 운영개선에 관한 연구"란 논문에서 교회 재정에서 사회봉사비로 지출하는 비중은 3.4%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수도권에 위치한 78개 교회를 표본으로 해서 조사를 했는데, 출석신도 48명의 한 작은 교회의 경우에는 기본적 유지비 지출도 어려운 형편인데 이와 대조적으로 1만4천5백 명의 신자를 갖고 있는 초대형 교회에서는 자산관리비에만 26%를 지출하면서 구제비에는 고작 3.3%를 지출했다고 합니다.
  또 장목사는 "기명식(記名式) 헌금방식"을 채택하면서까지 헌금액수를 늘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한국교회가 이처럼 사회구제비 지출에는 인색하다고 개탄했습니다.

<신앙한다는 것은 고난의 시작이다>
  신앙은 자기도취와 현실외면, 도피의 수단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 골고다의 길이며 전쟁이요 고난의 출발점입니다.
  불우한 이웃의 고통에 동참 하는 길이며 섬기는 자, 스스로 남의 종이 되는 힘겨운 길입니다. 이 동참은, 현란(絢爛)하게 보이는 사바에서 천국을 만나는 길입니다.
  내 고향 경남 충무의 국민학교 동창으로 어린 시절 같은 교회에서 자란 김경래(金景來)란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교회 장로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활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최근에 전화로 나에게, 충무식 사투리로 "정무이가? (정문이냐?)‥‥‥ 사람이 보낸 초청장은 바쁘다고 사절할 수가 있는데 하늘에서 보낸 초청장은 거절 할 수가 없재?"라고 했습니다. 그 전에 내가 김장로를 만났을 때에는 "죽을 때에는 넥타이 두개매고 갈 수도 없재?"라고도 했습니다.
  그의 이런 말들은 이 속세의 재물과 권력의 무상함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약성서 요한 1서에 나오는 말씀들을 몇 가지 제시해 보겠습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우 리의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공동번역 1977년 개정판의 내용입니다만, 옛날 성경에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었으매‥‥‥‥,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죽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하다"는 의미이고 "의무"라는 얘기도 됩니다.

<의(義)와 사랑>
  다시 예수님이 직접 예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신 것을 상기해 봅시다.
 강도를 만나 크게 상처를 입고 돈과 재물을 빼앗긴 채 산중 길바닥에 버려진 유대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층 몇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 죽어는 이 사람을 만났으나 못 본 체하고 지나갔습니다. 다음엔 유대 사람들에게 "개"라고까지 불리던 사마리아 사람이 죽어 가는 부상자를 발견하고는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서 응급치료를 해주고 여주인에게 그가 나을 때가지 간병할 돈까지 맡기고 갔습니다.
  동족이요 신앙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사람을 외면하였는데 유대인에게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수난의 유대인에게 참된 이웃이 된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의와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신앙이란 허구와 위선에 불과합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천당, 극락도 가겠다는 이기주의이기도 합니다.
  조금 학문적 용어를 빌어 봅니다. 종교나 신앙이나 윤리가 인간 실존(實存)에서 멀어지면, 유교의 성리학화(性理學化), 불교·기독교의 기복신앙화(祈福信仰化),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사변화(思辨化) 합니다.
  종교인의 신앙생활은 400만 장애 우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 사회라는 장(場)에 공존해야합니다.

<고아의 아버지 페스탈로치(스위스, 1746 1827)>
  여기에서 스위스의 위대한 교육자 페스탈로치에 대하여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그는 농민학교, 고아원 등을 운영하기도 하고 후의 교육학 명저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당시 유럽사회의 계급간의 불평등을 지적하고 민중에게 올바른 지성을 기를 수 있게 한다면, 민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사회적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학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엔 인간교육이 자취를 감추고 상급학교 입시 교육만 남았습니다.
  나는 소년시절에 그의 전기와 저서들을 읽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아들을 모아놓고 교육하고 먹여 살리기 위해 교회와 부유층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들은 오불관(吾不關)이었습니다.
  하루는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다 못해 미녀들이 있는 카페에 가서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랬더니 취객 한사람이 "네가 건방지게 우리에게 설교를 하는 건가? 너는 이것이나 먹어"하면서 사정없이 술병을 페스탈로치에게 던졌습니다. 젊은 페스탈로치는 이마가 깨지고 선혈(鮮血)이 낭자하게 흐릅니다.
  그런데 페스탈로치 조금도 성내지 않고 태연하게 "나에게 주는 것은 이것으로 족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줄 선물은 여기에 넣어 주십시오" 하면서 모자를 벗어서 뒤집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손님들과 접대부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모자에 적지 않은 돈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는 "인간교사"로서 평생 외길을 걸었고 그의 강한 실천성은 가히 몸과 마음을 함께 바친 인류의 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묘비명(墓碑銘)에는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노라"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사랑의 교사, 고아의 아버지 페스탈로치를 단적으로 잘 나타낸 문구입니다.

<적은 도움을 줍시다.>
  경기도 수원에 내가 아는 정신지체아 학원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 원장으로 계신 김동국 선생님은 젊은 날에 고위직 교육 공무원으로 있다가 중병에 걸려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연식과 단식요법으로 회생(回生)하였고, 그 후 20여 년 간을 고아와 장애 우들을 위하여 혼신(魂神)을 받쳐 온 분입니다. 고아와 장애우의 아버지이며, 한국의 페스탈로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원장이 수용하고 있는 아이들은 고아보다도 더 힘겨운 정신지체아들입니다. 그는 사회에서 푸대접받고 있는 이 사람들을 도와주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김동국 원장의 경우는 극히 적은 한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전국에는 우리나라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431만 명의 장애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 중에는 극히 소수의 부유층이 있어 장애우 교육을 받기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장애 우들은 심신장애에다가 가난과 무학(無學)이란 세 가지 짐을 겹쳐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풍요로운 민주국가로 자처하는 우리 사회에서 버림받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 무거운 짐은 삶의 멍에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멍에를 벗겨주고 그 무거운 짐을 우리도 나누어 져 줍시다.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죽기까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조금씩 도웁시다.
  약소계급을 도웁시다. 그들을 옹호, 변호합시다.

작성자김정문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