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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징소리] 공동체 사회의 방해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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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에 대해서 썩 알지는 못하지만 합창이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다보면 신비로운 소리의 조화와 화합의 운율에 황홀감을 갖게 된다. 여러 가지 다양한 서론 다른 소리가 공존하면서 어떤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서 더욱 아름다운 소리를 창조해 내는 합창이나 오케스트라의 연주야말로 혼자서 부르는 독창이나 독주보다 더욱 오묘한 음악의 맛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때로는 찬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거나 한가지의 악기만을 고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여간 당황하지 않게 된다.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한 가지 색깔만의 옷이나 꽃을 남에게 구입하기를 강요하는 장사꾼을 어쩔 수 없이 만났을 때처럼 곤혹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똑같은 사고, 똑같은 태도, 똑같은 행동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여 남에게 강요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는 획일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획일주의자들은 자기가 느끼며, 알고 있는 것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은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불우한 것으로 간주하여 기존체제에서 배제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는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장애우에 대한 시각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인간에 대한 평가를 하는 데에 신체적 조건으로서 만의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일정한 고정 틀을 점해놓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비정상이나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여 공동체 속에서 배제시키려는 경향을 갖는 것이다.
  어디 장애우의 경우에만 이러한가. 희망과 기대 속에서 곧고 밝게 자라야 할 어린 생명들에게 "성적"이라는 획일주의의 망령이 그들로 하여금 꽃도 피우기 전에 꺾어 버리는 경우를 허다하게 목격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데도 말이다.
  획일주의는 지독한 보수주의나 보신주의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득권이나 이득을 놓치지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의 변혁이나 역사의 변화에 대해 극히 못마땅해 하며 심지어 역사 변화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으려고까지 애를 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변화에 대해 일단은 두려워하거나 의심을 갖게 되지만 세상은 변하게 마련이고, 또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규칙성은 흔히들 시간의 흐름 속에 축적되어 역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기에 일찍이 플라톤이 "정의가 강자만의 이익이 결코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 이래 사람들은 오랫동안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서의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러한 정의를 세우려는, 혹은 당연히 세워질 것이라는 "소망의 역사"가 존재함을 믿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은 결국 정의를 통해 인간의 가장 바람직한 삶의 질을 보장하는 정당한 사회제도의 확립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제도화의 길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성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최근 역사를 보면 지배와 피지배, 명령과 복종이 판을 치는 획일주의로 점철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욕적인 일제식민지의 경험과 오늘날까지 부와 권력이 최고의 가치임을 보여주는 역사가 전개되고 있다. 부를 축적시켜주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지 못하거나 권력을 창출하는 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을 받게 되면 자신의 존재가치조차 잃어버리게 되는 한심한 지경에 누구나 처하게 되는 것이다.
  장애우의 문제도 바로 이런 점을 주시하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성격을 갖는다. 고용에서의 차별문제와 함께 선거철만 되면 장애우복지니, 대책이니, 인권이니 하면서 장애우 문제에 관심을 조금 보이다가 선거가 끝나면 이에 대해 입을 다물어버리는 작태는 바로 이러한 "부와 권력"만이 "삶의 최고의 준거 틀"이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로 이해하여 문제를 제기하거나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소수의 깨어 있는 사람들이 다수의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이해를 촉구하며 끌어 모으는 일을 어떻게 해내느냐 하는 점이다. 흔히들 운동의 대중성을 어떻게 확보하며, 어느 지점에 변화의 지렛대를 설치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갖고서 무수한 검토와 평가를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삶에 무엇보다도 우선순위를 둔다는 점이다.
  따라서 변화의 지렛대를 먼저 일상적인 삶 속에 두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일상적인 삶에 접근하여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내어야 하는데, 때로는 가장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하는 그 자체가 바로 변화의 조짐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 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생성, 소멸의 엄연한 변화의 과정 속에 오히려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주검은 불변이며 획일 그 자체이다.
  살아 숨쉬는 인간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인간세상은 결국 변화할 수밖에 없고, 변화를 굳이 막고자 하는 자는 현실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일을 획일적으로 처리하여 역사의 흐름을 단절케 한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행동과 다양한 신체적 조건을 가진 자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현실의 극복 없이 는 미래의 이상을 추구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도 현실에서 가장 획일적으로 차별 받고 있는, 공동체의 걸림돌이 되는 장애우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로서 부각되지 않는 한 진정한 민주화나 통일이 갖는 의미는 줄어든다. 차별이 존재하는 데서 통일된 민주사회를 결코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땅에서 진정한 공동체 사회를 만드는 데 있어서의 방해꾼은 누구인가. 
작성자조흥식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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