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우 노동자 최준호 열아홉살의 비망록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기획연재] 장애우 노동자 최준호 열아홉살의 비망록

본문


<실천을 위한 노력과 커지는 고민
  90년도 말엽부터 준호는 자신의 운동방식과 위치 등에 고민을 가지게 된다. 그의 고립적인 투쟁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혼자 아무리 집회에 열심히 참가하더라도 사회의 변화라는 것은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고,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당시 준호를 바라보는 눈은 야학에서 학생수련회를 가서 각자에게 느낀 감정을 쓰는 시간에 쓰여진 종이에서 알 수 있는데 주로 준호가 너무 부정적이라는 말들과 힘들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준호야, 사회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점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넌 너무 사회의 어두운 면만 보고 있는 것 같다. 힘들더라도 항상 노력할 수 있는 준호가 될 수 있도록 해라." "이제 나이도 제법 들었고 사회생활도 많이 했으니까 앞으로는 너의 장래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기를 바래." 이런 유의 글들이었다.
  또한 그가 알고 있던 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운동에 투신할 생각을 한 준호지만 그런 상황들 속에서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간에도 세계는 변하고 있다. 변화, 변화.  그러나 변할 생각은 없다. 내 마음 속에 간직해 둔  생각 그 자체를,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의 행동은  변한다. 내일은 전해일 열사 20주년 추도식이다.  나의 위치는 무엇일까?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 준호는 그와 함께 투쟁성을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단체들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처음 간 곳이 성수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자기의 위치를 찾기는 힘들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극심한 회의에 빠졌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집에 갔을 때 엄마에게 그 심각함을 털어놓은 것이다. 어머니께 말을 꺼낸다. 준호는 술을 조금 마신 상태였다.
  "(엄마의 젖가슴에 손을 넣으면서) 엄마! 가만히 있어, 아빠 들어."
  "‥‥‥‥"
  "엄마 나 죽고 싶어."
  "그런 소리 마.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무슨 소리야?"
  "20살 되면 죽을래."
  "엄마 앞에서 무슨 소리."
  준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준호는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 준호는 마지막 새해를 맞게 되었다. 새해를 맞으면서도 그는 운동에 대한 회의가 가시지 않아서 고민스러운데다. 신문 배급소에서 전에 준호가 좋아하던 지국장이 바뀌면서 숙소문제로 새로운 지국장과 배달원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겨 배달원전원이 배급소를 떠나려고 하는 상태여서 몸과 마음이 피곤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 쉬고 싶었다. 그는 신문 돌리는 것을 그만두고 집으로 갔다.
  그 때 집은 형편이 조금 좋아져 있었으므로 아버지께 자기는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신문배달을 않고, 집에서 다닐 수 있도록 아버지께 학원비를 부탁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준호는 이때 커서는 처음으로 부모님과 두어 달 같이 살았고, 4월 달에는 그의 생각대로 검정고시 학원에도 다니게 되었다.
  91년 봄 집에서 살면서 준호는 당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야학에 열심히 다녔다. 이때 이 야학은 대학생들이 교육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사회의 모순점을 알고 있는 대학생들과 그 모순 속에서 억압받는 노동자들과의 상호주체적인 만남을 통해서 서로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장으로 변화하고 있는 단계였다.
  야학에서 대학생과 노동자간의 주종적인 만남에 불만이 대단히 많았던 준호는 이러한 변화를 아주 좋아했다.
  또한 같은 반 동료들과도 많이 친해졌기 때문에 잘 어울렸다. 야학이 끝나고 나면 교사들과 학생들이 모여 같이 술자리를 하는 기회도 많이 생겼기 때문에 그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준호가 화젯거리를 낸다든가 자기의 속마음을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마 대학생들에 대한 깊은 불신의 벽을 허물지 못해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년과 같이 노동에 관한 이야기들을 확신에 차서 말하지는 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수업시간에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학원에 나가고부터는 야학에도 잘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는 날이었다. 준호가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야학을 나왔다. 야학 수업 도중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끝나고 집에 가는 도중에 오늘 학원을 그만 두었다는 얘기를 했다. 왜 그랬냐는 물음에 그는 학원 강사랑 싸웠다고 말했다.
  국사시간이었다. 학원 강사가 교과서에 있는 내용 그대로를 가르쳤는데, 준호가 거기에 이의를 달았다. 준호가 읽은 책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학원 강사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아무 내색도 없이 옳은 내용을 가르치는 것처럼 말하는 강사의 태도가 준호에게 몹시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참의 논쟁 끝에 강사는 "그렇게 똑똑한 놈이 나한테서 왜 배워 나가"라고 말했고 준호는 그 길로 가방을 싸서 나왔다.
  그 날 밤 준호는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했다. 자기가 검정고시를 정말 공부해야 하는 지를, 그리고 이전에 자기가 검정고시에 대해서 느끼던 것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지금 할 일은 검시준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했던 고민들이 떠올랐다.

  노동현장에서 떠나 있는 지금 내 모습은 너무나  처량해 보인다. 나의 생계를 위해 지금은 비록 이렇게 지새우고 있지만 우린 노동자의 노동해방의 그 날을 위해 나의 실천‥‥
  준호는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학교회 산업부에 들어가다>
  그때 야학의 후배(나이는 준호보다 세살 많은 누나지만)중에 무학교회 산업부에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 무학산업부도 전에 준호가 다녔던 성수교회와 성향이 비슷한 단체로 진보적인 젊은 전도사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 사람도 준호와 마찬가지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노동현장에 들어간 사람이었는데, 거기에 있는 산업체 부설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하지만 거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해준다는 대가로 엄청난 노동착취를 한 데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학산업부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준호는 야학에서 이 누나와 자주 접촉하면서, 전노협이나 기타 노동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던 중 준호가 산업부에 관심을 갖고 그 단체에 대해서 물었다.
  "산업부가 어떤 곳이에요?"
  "교회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부선데, 집회 같은 거 있으면 같이 나가곤 모여서 노동법 공부 같은 것도 해."
  "난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데, 노동에는 관심이 많아. 나도 같이 가자"
  "그래, 와."
  그래서 5월 달부터는 이 누나를 따라 무학산업부에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때마침 전의 신문 배급소에서의 문제도 풀려 다시 집에서 나와 신문배급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무학 산업부는 주로 모임이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이었다. 수요일은 전체모임이 있었고, 금요일은 부서별 모임, 일요일은 예배가 있었다. 그 속에서는 전태일의 삶에 대한 연구, 또는 광주항쟁 비디오 관람, 제주항쟁 연구 등의 교양강좌가 있었는데 노동자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많이 다루었다. 특히 광주항쟁 비디오를 볼 때 경찰이 침탈하여 전도사가 연행되어 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성수교회에 가서 문익환 목사의 강연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 당시는 4.26 강경대 치사사건으로 뜨거운 투쟁의 열기가 온 거리를 뒤덮고 있었을 때였으므로 무학 산업부에서도 토요일이나 일요일 같은 때에 모여 같이 시위에 참석하곤 했다. 특히 준호는 집회에

준호는 집회에 참석하면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투쟁가를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래도 아주 힘차게 불렀고, 한쪽 팔을 쓰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대열의 가장 앞에 서서 돌을 던지기도 했다.

참석하면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투쟁가를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래도 아주 힘차게 불렀고, 한쪽 팔을 쓰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대열의 가장 앞에 서서 돌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평소 준호의 모습은 그렇게 활발하거나 적극적이지 않았다. 노동자 문제에 관한 학습내용이나 시위에는 최선을 다해 참석하고 그 이외의 활동에는 뜸했다.
  거기 사람들과의 관계는 전체적으로 원만한 편이었다.
  준호는 거기서 항상 웃고 있는 얼굴이었으며, 전도사와 청계 피복노조 문화부장이던 사람, 산업부교사 등과는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이었으며 그 외의 사람들과도 얘기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잘 지냈다.  그리고 새로 나오는 다소 보수적인 노동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그들의 노동에 관련된 잘못된 생각들을 깨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기를 무학교회 산업부로 데리고 나온 누나와도 계속 잘 지냈는데 이 누나한테는 자기의 개인적인 고민들도 조금씩 얘기를 하고, 어리광도 많이 부렸다고 한다. 그래서 "뭔가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같이 열심히 살자",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니까 나도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라는 심각한 얘기들도 하고, "옷이 없으니까 티를 사라"든가 라는 말들도 했다. 이 누나는 준호가 너무 그러니까 귀찮아질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못해 준 것들만 생각이 난다고 숙연해 했다.
  그런데 이 무학 산업부는 당시 인근에 있는 동부지역 민중교회 (성수, 삼일, 청암, 초강교회, 무학 산업부) 노동 청년회들과 함께 "한국기독노동자 서울동부지역연맹"(동기노)을 결성하려고 준비중이었다. 그래서 준호도 이 준비모임에 몇 번 나가고, 7뭘 14일날 가진 창립 집회에도 참석했다. 그 때의 일기를 보자.

    통일염원 47 7월 14일 (일)
    ‥‥동부기독노동자서울연맹 창립 일이었다. 성수교회 오후 3시부터 시작하였다. 회원은 한 50명쯤 온 것 같다. 나도 이 동기노의 회원으로서 우리 동기노가 출범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회장은 무학교회의 강명순, 사무국장은 임영숙.
    우리 동기노가 출범하기까지는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어려움과 역경을 이기고 우리는 일어난 거다. 우리 동부기독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이  사회의 진실한 기독자로서, 노동자로서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룩할 그 날까지 날로 발전해 가길 바란다.

<지국장과의 갈등>
  준호가 무학 산업부에 다니면서도 잘은 아니지만 야학에도 꾸준히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신문보급소에 나가게 되면서부터는 야학에 있는 같은 반의 형이랑 같이 다녔기 때문에 늦더라도 집에 갈 때는 야학에 찾아 와서 같이 가곤 했다.  그렇지만 이 때 거의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간혹 수업시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수업시간에 딴 일을 할 때가 많았다.
  한 번은 준호가 딴 일을 하는데 화가 난 교사가 그에게 나가라고 한 적이 있었다. 준호가 진짜 나가버려서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아진 때도 있었으나 며칠 뒤 준호가 사과를 해서 풀렸다. 또 야학에 오더라도 중간에 어디 나갔다가 마칠 때쯤 들어올 때도 있었다.
  야학 사람들은 준호가 야학 생활에 불충실하고 자주 나오지 않았으므로 다소 걱정은 하고 있었지만 무학산업부에서 더 열심히 생활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준호에 대해서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사실 준호는 무학 산업부에 나가면서 상당히 밝아져있었다.
  야학도 많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직 야학형태가 전반적으로 검시야학이었지만, 새로 들어온 교사 개개인이 다분히 진보적이었으므로 수업 시간에도 의식적으로 노동자들과 노동의식을 공유하려고 했다. 준호도 이런 변화를 모르지는 않았다.  5월 달에는 야학 사람들과도 같이 몇 번 시위에 참석하기도 했다. 무학 산업부에서 나갔을 때만큼은 시위에 적극적이진 않았어도 준호는 힘차게 구호를외쳤다.
  그리고 그때 술을 자주 마셨는데 술 마시는 자리에도 자주 참석을 했다. 술자리에서도 준호는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단. 좋아하는 "고백" 노래를 부르고, 술이 조금 취해서 집에 가는 날이면 주위에 주차해 놓은 차들의 타이어를 발로 차면서 자본가들을 욕해대는 것이었다. 이즈음부터 준호는 담배를 피웠는데, 시위에 나가서 최루탄 때문에 담배를 배운 것 같았다.
  집에서의 생활은 여전했다. 좀처럼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아지지 않았다. 아니 관계라는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집에서의 행동도 달라진 것이 있었다. 가끔씩 집에 와서 노동 가요를 즐겨 듣는 것과 그런 노래를 듣는다고 걱정스러워하는 어머님에게 사회의 문제점이나 모순들을 이이기하는 정도였다.
  한편, 다시 들어온 신문보급소에서의 생활은 다소 힘들었다. 나가기 전에 같이 생활하던 사람들과는 친한 관계를 계속 유지했지만, 새로 알게 된 사람들과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준호의 생각이나 생활 방식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지국장이나 총무와 준호는 별로 관계가 좋지 못 했는데, 그건 준호가 야학이나 무학산업부 활동으로 신문 돌리는 일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준호의 입장에서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 당시 지국장이 바뀌기 전의 배달원들은 거의 모두가 현재의 지국장한테 불만을 느끼고 있던 상태였던 만큼 준호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뒤 그들은 다시 모두가 지국장에 항의해서 그만두어버렸다. )
  새로운 지국장도 준호와 같은 장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준호에게 잘해주려고 했었지만, 준호는 그런 식의 호의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총무와는 지극히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 당시의 일기를 보면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통일 염원 47년 7월 12일 금요일
    최악의 날, 잊지는 않을 것이다. 신문 배달이 이런 건지‥‥‥정말 내 자신이 초라해졌던 날 총무와 신문 수금과 월급관계로 말다툼이 있었다.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내가 잘못하기  는 했지만 나 자신이 왜 이렇게 먼 하늘을 쳐다보기만 했는지.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걸로  나와 총무의 관계는 끝난 것인가? 하루 내내 우울하게 지냈다. 교육관(야학)에 있으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내일부터 석간을 돌리기로 했다.
   시험은 24일 남았다. 공부는 안 되고, 매일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건지‥‥‥ 슬프다. 아니 초라하다고  할 수 있다.

  (일기 내용 중 나오는 월급은 나중에 약 5만원 정도 받았고, 돌리기로 한 석간은 신사동에 있는 매일경제신문이고 시험이란 8월 달에 있을 검시를 말한다. )
  그러나 힘든 신문배급소 생활 속에서도 유일한 큰 즐거움은 이전부터 같이 있었던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유대감이었다. 이들과는 사상적인 공유도 웬만큼 되어 있었고 준호가 다른 활동들로 피곤할 때 찾아와서 살아가는 이야기나 자신의 진로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자기를 아껴주는 형이 한 명 있었는데, 준호는 그를 아주 좋아했다.

   통일 염원 47년 7월 13일 토요일
   지국장하고 사모님이 결혼식을 올렸다. 연 5년 동안 동거 생활하다가 한겨레신문을 맡으면서 돈  좀 모았나 보다. 하객은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조금 왔다. 하여튼 결혼 축하합니다.
   중석이 형과 대학로에 갔다. 사람들이 무척 많았

힘든 신문보급소 생활 속에서도 유일한 큰 즐거움은 이전부터 같이 있었던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유대감이었다. 이들과는 사상적인 공유도 웬만큼 되어 있었고 준호가 다른 활동들로 피곤할 때 찾아와서 살아가는 이야기나 자신의 진로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다. 젊음의 낭만을 제일 만끽할 수 있는 곳. 공연  하는 것보고, 신촌에서 식사하고 헤어졌다.

<자기 해방의 길로>
  신문 배급소에서의 관계가 별로 좋지 못한 7월 중순부터 준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번의 고민은 지난번과 같은 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가 아니었다. 모든 활동에 자기의 힘이 부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투쟁을 해나감에 있어서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의 문제였다.

    통일염원 47년 7월 17일 (木)
   내 하는 일이 왜 이럴까? 나 자신이 왜 이렇게  초라하나? 석간을 돌리다 종만이 형과 만났다. 검  시 공부한다고 조간을 그만 둔다고 했는데, 총무가 나 석간 돌리는 것을 본 것이다. 총무가 지국에 와  서 지국장에게 얘기를 하였나보다. 교육관에서 돌아와 정훈이 형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우셨다. 그러나 정훈이 형은 나에게 "이 인간 같지 않은 인간아"하는 것이었다. 무슨 소린 지는 알았다. 정훈  이형이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해서 얘기를 했다.  결론은 "내 생각대로 하라"는 말밖에 없었다. 하면  서 정훈이 형은 나갔다.
   지국장님도 나에 대한 인식이 180도 달라졌을 거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 자신  이 노동운동 한답시고 이런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게 무슨 운동을 할까? 어떻게 할까? 그냥  이대로 나갈까? 아니면 지국장한테 죄송하다고 하면서 더 일을 할까? 그러나 나의 현 시점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 무리인 듯하다.
  그리고 이 보급소가 예전 같지 않다. 아니 싫어졌다. 그렇다. 나는 욕을 얻어먹으면서 라도 여기를 떠나야 한다.
  내 비록 내 잘못으로 인해 이렇게 되었지만 내 계획을 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20일날 그만 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교육관에서도 계속 우울하게 지냈다. 만나는 토마다 "너 고민 있냐?"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냥 죽고 싶은 심정이다. 언제 나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것인가?
‥‥‥자정 40분‥‥‥

  통일 염원 47.7.22 月
  왜 이렇게 마음이 심란한지 모르겠다. 교육관에 7시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왜 들어가기가 싫은 지‥‥‥ 그냥 만화방으로 갔다. 만화에서 나오는 허황된 얘기들이 나에게 현실로 되었으면 하는 느낌도 난다.
  만화를 보고 7시 40분쯤에 저녁 식사를 하고 2교시 수업만 듣고 그냥 나왔다. 어째서 교육관도 가기 싫고 교회도 가기 싫을까?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보급소에 와서 한참동안 나 혼자 생각하고 반성도 많이 했다.
   지출 : 헤드폰 8, 500  기타 7, 000
   가불 : 매일 경제 5, 000
   삼촌 : 10, 000  할머니 : 2, 000
   합계 : 15, 500원  총 : 17, 000원

  지난 번 고민들 속에서 실천을 이끌어 내었다면, 이번의 고민은 그 실천 속에서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고민이었다. 활동과 자기 생활과의 결합 문제 속에서 오는 자기의 나태에 "대한 비판이었구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조직활동 속에서 자기의 역할이 없음에 대한 실망이었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 활동한데 대한 성과의 부재였고 다른 이들의 그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이때부터 준호는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에 들어갔다. 여느 활동가라면 그의 동료들의 충고와 비판과 격려로 끝날 수도 있었겠지만, 준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동료를 찾으려고 숱한 노력을 했지만, 장애인이라는 벽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고, 나이가 어리다는 벽도 쉽게 넘어지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학력의 벽도 튼튼했다. 준호는 언제나 초라한 혼자였다. 준호가 혼자 고민하면 할수록 모든 사람들과 멀어져 갔고 모든 상황들은 그를 고립시켰다.
  당시 정국은 정원식 총리 폭행사건으로 인해 뜨거웠던 투쟁의 열기가 급속도로 식어 갔고, 무학 산업부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교회 당회로부터 압력이 들어 왔다. 야학도 야학 문제로 교사들끼리의 논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준호의 고민에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이런 갑갑한 상황 속에서 준호는 탈출하고 싶었다. 탈출 경로는 검시였다. 학벌을 중시하는 한국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노동자를 유혹하는 검정고시. 실낱같은 틈이라도 생기면 싱긋이 미소지으며 노동자들의 뇌리에 기생한다. 검정고시가 자신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익히 아는 준호지만 검정고시를 준비하려는 순간부터 그의 고민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해지는 것이다.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공부에 파묻힐 때의 즉흥적인 편안함은 동료가 없으면 더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자본가와 파쇼 권력은 모든 노동자들이 검정고시라는 그물에 걸리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할까.
  준호가 다니던 야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검정고시 야학이었다. 8월 검시를 준호는 준비했다. 이런 준호의 모습에 준호의 이전의 고민을 알지 못하는 거의 모든 사람은 준호의 이런 변화를 단순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속에서 준호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검시를 준비하는 시늉은 했지만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자기의 모순 때문께 더 괴로워했던 것이다. 이제 고민은 극단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죽음!" 이제 이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해방되는 것이 이토록 힘들다면 이제 나를 해방시키자. 현실의 모든 사슬을 서슴없이 끊어 버리자. 언젠가 내가 노래했던 "세상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리고 아주 자유로운 세계"로 가자.

<죽음을 준비하다>
  이런 준호의 생각의 변화는 말로도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시기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던 상태에서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각자의 꿈을 발표하고 있었다.
  "나는 커서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어요"
  "유치원 교사가 되고 싶어요. "
  "자선 사업가가 되고 싶습니다." 각자가 나름대로의 꿈들을 말하고 있었다.
  준호의 차례가 되었다.
  "꿈이 없어요."
  "준호는 왜 꿈이 없니?"
  "………"
  "선생님 저 죽을 건데 왜 자꾸 그런 것 물어 보세요? 저는 죽는 것이 꿈이에요."
  그 이후 준호는 자기가 죽는다는 말을 아주 많이 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수업을 듣지 않고 밖에 나가서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한번은 야학에 가출한 소년이 야학에 찾아온 적이 있다. 그 소년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재혼을 하셨는데, 새아버지가 자기를 아주 구박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맞기 싫어서 가출했다고 했다.
  그 소년은 잘 곳이 없었고, 그 날 준호도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담임과 함께 자기로 했다. 소년과 함께 그 날 저녁을 담임의 숙소에서 같이 잤다. 준호는 그 소년을 보며 아주 잘 대해주었다. 마치 자기의 어린 시절을 느끼듯이 그는 소년에게 자기의 이야기도 해주고, 소년의 이야기도 들어 주었다.
  그 다음날 소년을 보내주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담임이 그에게 밥을 사주려고 했으나-평소 준호 다른 사람한테서 자주 얻어먹었다. -그날따라 은행에 얼마 있으니까 찾아서 꼭 자기가 사준다고 했다. 그래서 그 날은 준호가 밥을 샀다.
  준호의 행동들도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해 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검시도 쳤다. 물론 공부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준호는 더욱 더 홀가분해지고 미련 둘 것이 없어졌다.
  음력 7뭘 5일 그러니까 8월 14일은 준호 아버지의 생신이었다. 준호는 이날 마지막으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아버님께 드릴 4천 원짜리 정종이 들려 있었다. 아버님은 술 드시러 나가고 계시지 않았다. 어머니만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 나를 낳으시고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던 어머니인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어머니 앞에서 준호는 밝게 웃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앞에 있지를 못했다. 어머는 준호를 위해서 조금 남겨 두셨던 닭고기 죽을 차려 오셨으나 준호는 먹을 수가 없었다. "한창 먹을 땐데 왜 안 먹냐? 굶고 다닐 텐데 왜 안 먹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뒤로 한 채 준호는 뒤꼍으로 가서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근심으로 가득 찬 연기가 그를 멍하게 만들고 있을 때 오현이가 준호가 담배 피는 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이른다. 준호는 이전에는 집에서 한번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와 얘기를 나눈 다음 준호는 학원 간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아버지를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집을 나왔다.
  그 날 준호는 평소와는 달리 태도가 이상하고 근심이 아주 많은 사람 같았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집을 떠난 이틀 뒤 그는 야학에서 같은 반 담임이랑 동료들과 원덕으로 여행을 떠난다. 원덕에서 그는 이때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노는 것에 너무 신나하고 재미있어 한다. 물놀이를 하면서 그의 팔의 한쪽이 장애라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같이 갔던 사람들은 그때만큼 준호가 흥겨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준호는 언제나 웃고 있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눈에 기쁜 웃음이라고 느껴진 때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자기의 힘겨움을 보이지 않기 위한 자기위장으로 보였고, 어떤 이에게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위한 억지웃음이었으며, 또 다른 이에게는 사회에 대한 차갑고도 무서워 보이는 냉소였다.
  그 날 저녁 그는 또 한번 자기의 졸업 후의 진로를 밝히는 자리에서 자기는 죽겠다는 얘기를 한다.  하지만 이유도 말하지 않고 죽겠다는 그의 그런 잦은 이야기에 이젠 크게 염려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8월 그 무덥던 날, 준호의 죽음>
  8월 하순 5, 6월 숱한 청년들이 자기 몸을 태우며 외치던 것들이 파쇼정권에 의한 탄압의 회오리에 날려가던 때였다. 20일은 사노맹(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중앙위원회인 박노해씨의 사형 구형이 세상에 알려지고 있었다. 박노해씨는 준호가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이틀 뒤 그 날은 하늘이 꾸물꾸물하고 습도가 높고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야학에 한 교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에게 야학에서 막 뛰어 나온

유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가고 싶은 심정이 나 한마음 할 구석에 있다. 지금 그저 모든 미련을 버리고 죽고 싶다.
  유언을 쓰려고 지금 펜을 들었다. 통일염원 47년 8월 22일 저녁때쯤이면 한 줌의 재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마지막 가는 길에 아무 한 일 없이 이렇게 간다는 것이 나한테는 한스럽다.
  아버지, 어머니,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불효자식은 부모에게 효도 한 번 못해보고 갑니다. 이놈이 비록 부모님 품안에서 없어진다 해도 두 아우를 의지하면서 살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안녕히 계셔요.
  오현이와 명호에게
  오현아. 너는 나같이 되지 말아라. 이 형은 비록 나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죽지만 너는 나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호야, 너는 어리지. 이 형이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내 주변사람들한테 물어보기 바란다.
  성동 중등교육관 사람들에게
  내가 여기에 다닌 지도 1년 반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며칠 뒤면 졸업을 남겨두지 않았는데 내가 죽은 소식을 들으면 기가 막힐 것입니다. 내가 우리 7기생 학우들한테는 죽는 것은 꿈이다 하면서 많이 떠벌려 놓았습니다. 믿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교육관에 와서 많은 것을 배우고 고맙습니다. 부디 잘 계시기 바랍니다. 끝.

  통일염원 47년 8월 22일 오후 5시 5분 교무실에서

  죄송합니다. 이 교육관에서 일을 일으켜서
  내 재를 지리산 기슭에다 뿌려주시기 바랍니다.

8시 42분, 분신한 지 3시간 여 후, 준호의 짧은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주위에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그리고 야학 사람들 몇 명만이 서 있었고 그의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간호사들이 냉랭하게 산소 호흡기를 떼내고 있었고 야학 사람들의 눈은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또 다른 교사가 넋 나간 얼굴로 뭔가를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교사는 뛰기 시작했다. 가슴속은 뻥 뚫리고 머리는 "결국에…"라는 생각과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과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이 어울려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다.
  야학 건물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고 그사이로 구급차가 와서 대기 중이었다. 옥상에 올라간 구조대원과 경찰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올라간 이들은 가녀린 숨소리로 신음하고 있는 시커멓게 탄 그의 육체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을 때가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사의 입에선 고함이 터져 나왔고 그제서야 준호의 육체가 실려 내려왔다. 복잡한 서울의 거리를 구급차가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신음 소리는 계속되었다. 병원에 도착했다. 의사들도 그리 급하지는 않았다.
  준호의 상태를 보고 낱 의사의 이야기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보통 분신한 사람들은 입고 있는 옷이 조금 남아 있으면 살 가망성이 있지만 이 사람의 경우 옷이 죄다 탔기 때문에 살 수 없어요. 최선은 다 하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아! 그 옷이 무슨 옷이었던가? 그것은 며칠 전 준호가 평소 입고 다니는 낡은 옷이 아닌 새로 산 옷이었던 것이다. 유명 상표라곤 전혀 입지 않던 준호가 그 날은 월급을 탔다고 이랜드라는 상표의 옷을 입고 왔던 것이다.
  "선생님 이랜드라고 들어 봤어요?" 라고 자랑하듯이 묻던 준호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눈앞에 환상처럼 나타났다. 그 교사는 이런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평소 자본을 그렇게 싫어하던 준호. 그는 최후까지도 그 자본을 미워하고 그 자본의 찌꺼기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면서 자기도 갔던 것이다.
  숨이 막히는 순간이 지속되었다. 응급실에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겨우 맥박을 유지하고 있는 준호를 둘러싼 의사와 간호사들이 무언가 중얼거리면서 빠른 손놀림을 계속하고 있었고, 밖에는 소식을 듣고 야학에서 뛰어온 사람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으며, 몇 명은 경찰서에 조서작성을 위해서 불려 갔다.
  순간, 맥박 측정기가 멎는 듯 하더니, 한 명의 의사가 나와서 빨리 보호자를 데리고 오라고 요청했다. 준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 준호의 부모님께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야학에도, 무학 산업부에도 한겨레 지국에도, 준호집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간신히 알아낸 것이 이모네의 주소였다. 이모 집에 연락을 하고 난 얼마 후였다. 삐삐거리는 맥박측정기의 간격이 점점 느려지는가 하더니 이윽고 일자를 그리고 말았다.
  8시 42분, 분신한 지 3시간 여 후, 준호의 짧은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주위에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그리고 야학 사람들 몇 명만이 서 있었고 그의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간호사들이 냉랭하게 산소호흡기를 Ep내고 있었고, 야학 사람들의 눈은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잘 있거라 간다 나는>
  준호는 이 날 다섯 시 삼십분 경에 야학 옥상에서 분신했다고 한다. 자기 교실에는 같은 반 동료들이 졸업문집을 만드느라고 모두 있었고, 교무실에는 교사가 두 명 있었다. 준호는 교실에서 문집 만드는 것을 도우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문집에 내려고 준비해 놓았다. 그 시는 어떤 시인의 "고난" 이라는 시였다.

  고난
  잘 있거라, 간다 나는
  메마른 등허리만 보이던
  세월이여! 간다
  잘 있거라 ‥‥‥
  푸른 꿈이여
  짙푸른 나뭇잎처럼
  빛나던 꿈들이여 !
  서러웠던 날들이여 !

  간다, 나는
  잘 있거라 옹마루 너머
  그 어두운 골목길 사이로
  방황했던 날들이여
  귀기울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날들이여

  간다, 나는
  잘 있거라 울지 않으리라 친구들이여 정든 교정이여
  너희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한밤중
  빛나는 앞날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나는
  쇳소리 흥건한 공장에서
  망치를 두드렸다
  나에게는 없다
  현실에서 몸부림치다가
  빛나는 미래를 준비할 시간이
  너희들 은유방에 숨어서
  세상을 보고 있을 때
  나는
  세상의 상징으로, 대구법으로
  새까만 기름때에 절어 밤을 지샜다
  그러나, 그러나 친구여
  누가 누구의 이름을 불러
  오늘을 기억하겠는가?

  잘 있거라, 간다 나는
  너희들의 환한 웃음을 지나
  간다, 친구들이여, 고개 숙이며
  갈가리 얼어 터진
  우리 어머님의 곱은 손등 사이로
  이 땅의 퍼렇게 멍든 가슴속으로 그러나 언젠가는 만나리라 친구들이여
  우리 모두 부끄럽지 않은
  이 땅의 새벽이 될 것을
                   통일염원 47년 8월 21

  교실에서 각자가 바쁠 때 준호는 동료에게 쓸 천원을 빌려서 교무실에 들려 교사들에게 몇 마디 대화를 하고 그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 동안 교문에서 유언장을 쓰고 옥상에 올라갔다. 옆에다 신발과 지갑, 빌린 천원 그리고 유언장을 두고 미리 준비했던 휘발유를 온몸에 끼얹었다.
  그리고 불을 당겼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순간의 지속이었을까? 온갖 고뇌를 젊어진 그의 육체는 불길 속에서 오르며 고뇌를 검은 연기 속에 날렸다.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 어린 준호의 순결한
  그 순결한 영혼을
  앗아간 이가
  그의 고민의 원천은 무엇이었던가
  그가 외치던 노동해 방은
  누구에 대한 외침이었고
  그가 던진 돌은 누구를 향했던가
  열아홉 살의 청춘은
  알고 있었다.
  분노는 누구를 향해야 하는 지.
  이토록 이토록 완벽한
  사회적인 죽음을
  만들어 내는 이 땅이 너무
  몸서리쳐짐에
  이제 바로 잡는다
  진정 해방의 그 날까지
  바로 잡는다

  3일 후 지리산 백무동계곡. 새벽 3시. 다섯 명이 짙은 어둠 속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준호의 유대로 지리산 기슭에 재를 뿌린 후 이제서야 터져 나오는 울음을 자제하지 못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작성자편집부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