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보내온 이야기] 일본 장애인 복지 현장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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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갖가지 욕구를 가지게 된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제각기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노력하고 탐색하고 그러다가 죽어 간다. 그 욕구라는 게 먹고 자는 생존 본능에서 자아실현이 마지막 단계인데 그 마지막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하게 된 다.
그러나 정작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른 바 장애우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있고 얼마 전에 우리 부산에도 상담센터가 생겨 장애우들에게 일자리를 제 공해 주려고 노력하고는 있으나 쉽지만은 않은 문제이다. 그런데 장애우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람이 있단다. 그것도 힘든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농사일(?)을 말이다. 그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 만 그것을 보러가기 까지는 많이도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 일이 흔치 않은 일이고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일은 바다 건너 일본 땅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장애우가 농원 일을 한다는 것도 흥미 있는 얘기였지 만 그것보다는 생전 처음 외국 여행을 한다는 것에 더 구미가 당겼기에 우리 일행 6명은-한사람 은 안내자-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일본 길에 올랐다.
그런데 출국 수속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시간에 쫓겨 서둘러 접수를 시켰는데 땡! 1분이 지났습니다. 원 세상에,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1분을 다투게 되었담. 우리는 부산 장애우 대표들이고 그곳 장애우들이 후꾸오까 공항에 마중을 나오기로 되어 있어서 못 가면 큰일이라고 애원했으나 끝내 거절이었다. 대한항공이 국내선에 대해서는 항공료 할인에다 서비스도 잘해주는 편인데 너무한다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안내자만 후꾸오까로 가고 우리들은 나가사끼 공항에서 기다리기로 약속하고 출국장을 나가니 맙소사, 먼저 나간 안내자가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결국우리가 먼저 출발하여 나가사끼 공항에서 멍청히 기다리는 수밖에. 얼마를 기다렸을까. 공항 안내실로 우리를 찾는 전화가 왔다. 택시를 타고 도스 시청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대한항공 직원이 친절하게도 택시까지 잡아주며 요금도 알려주었는데 나가사끼 까지 추가요금 6만여 원에 다 택시비까지 23만여 원은 어디서 보상하란 말인가.
한 시간 반을 고속도로를 달려 도스 시청 앞에 내리니 커다란 장대 끝에 태극기를 매달고 10여명의 남녀 장애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곧장 시장실로 안내되었는데 준수하게 생긴 시장님이 일일이 악수를 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간단한 인사말을 나눈 후 도스시의 장애우 현황 등 몇 가지를 질문하였는데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많고 대답은 엉뚱한 것이 나오기도 하여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묻기로 하였다. 찾아주어서 고맙다는 시장님의 인사말과 함께 그곳 장애우들이 만들었다는 조그마한 도자기 작품을 선물로 받고 시청을 나왔다. 시청 입구는 겨우 두단의 계단으로 되어 있었는데도 오른쪽으로 경사로가 나 있어 우리 부산시청의 높은 문턱을 생각하고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도스시 사회복지협회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우리를 초청한 사람은 도스시 신체장애인복지협회의 이사로 있는 다까오 유다까란 사람이었는데 50대의 지체장애우였다. 숙소는 그의 별장이라고 했다. 시내 음식점에서 그의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어떻게 부산 장애우들을 초청할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사업관계로-그는 건설업과정원수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산을 자주 왕래하다보니 부산 장애우들을 초청해서 자기 농원과 자기가 출연하는 장애우의 해 10주년기념 문화공연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는 시각장애우가 한사람 있었는데 처음 시각장애우는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명했으나 저녁을 먹는 동안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잘 왔다며 아주 좋아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여기가 일본이구나 하는 것이 별로 실감나지 않았으나 해가 뜨고 매미가 울어 제끼는데 그 소리가 쌕쌕쌕- 이었다. 누군가가 아하, 매미도 일본말로 노래하는구나 하여 아침부터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 8시에 어제 만났던 복지회간부들이 데리러 왔다. 버스를 타고 아침거리를 달리는데 스쳐 가는 차들이 장난감처럼 조그맣고 예뻐서 경탄하였다. 시각장애우를 제외한 세 사람이 수송 봉사단 단원이었기에 차에 대한 관심이 제일 많았는데 물론 소도시이기는 했지만 신호나 차선을 위반하는 사람도 없었고, 경적소리도 교통경찰도 물론 없었다.
교통 장애우를 날마다 다량으로 생산해 내는, 내 조국 대한민국이여! 2시간을 달려 서부장애인훈련원으로 갔다. 서부훈련원은 1983년에 설립되어 두개의 작업장을 갖고 있었는데 50명의 정신지체장애우들이 작업하는 "다라오께" 작업장에서는 원목을 들여와서 개집, 책걸상 등 목공예 제품을 만들고 있었다. 제품을 만들고 남은 토막나무는 톱밥으로 만들어 40명의 지체장애우들이 일하는 "산우드" 작업장으로 가져가서 목이버섯을 키우고 그 찌꺼기는 다시 투구벌레-풍뎅이과 곤충-먹이를 만든다고 했다. 투구벌레는 아이들이 애완용으로 기르고 있으며, 일년에 한번씩 "전 일본 투구벌레 씨름대회"도 훈련원에서 개최하고 있었다. 정신지체우들의 단순반복 작업을 지켜보면서 얼마만한 훈련기간을 거쳤겠는가 싶어 눈물겨웠으나 그들은 자기들이 일하는 광경을 우리들이 보고 있다는 걸 의식한 듯 싱글벙글 자랑스러워했다.
우리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제품의 판로와 재정문제였는데, 판로는 주문생산이라 걱정이 없고 재정도 판매 수입과 국고 보조 등으로 별 어려움이 없다고 해서 그저 부러움뿐이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NHK TV 카메라 팀이 동행을 했는데 기자들도 작업광경을 보고 경탄하는걸 보니 장애우에 대한 인식은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신체 장애가 제품의 장애 아니다"라는 문구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뎅그마니 걸려 있었다.
저녁에는 문화회관으로 "구주좌장대희, 장애인 무용관극"을 보러갔다. 무대에는 고전의상을 입은 두 사람이 나와서 한 사람은 노래를, 또 한 사람은 무용을 하였는데 잘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모두가 우레와 같은 박순 갈채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초대한 다까오씨가 여자 분장을 하고 무용을 하였다. 그의 무용이 끝나고 사회자의 소개로 우리 일행은 무대위로 올라가 인사를 하고 꽃다발 하나씩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시각장애우의 기타반주에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렀는데 관객 모두가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불러 일본에서도 돌아와요 부산항의 인기는 대단한 것 같았다. 문화회관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부분의 관객들은 장애우였는데 거의가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와서 음식을 나눠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3일째의 일정으로 사회복지관으로 갔다. 보도와 차도 사이에는 거의 턱이 없고 공공건물에는 맹인유도블럭이 있었지만 복지관 앞은 큰길에서부터 유도블럭이 깔려 있었다. 마침 일요일이라 이용객은 없었지만 장애우 편의시설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우 시설이 들어설 때면 곧잘 주민들과 마찰이 일어나곤 하는데 그곳 사회복지관에서는 장애우 복지 사업을 함께 실시하고 있었다.
신체장애인복지협회 사무실도 복지관 안에 있었다. 장애우 복지의 최종 목표가 "완전참여, 완전평등" 인데 사회통합을 위하여 이렇게 시민들과 장애우들이 공동생활을 한다는 게 일본의 장애우 복지구나 싶었다. 우리 부산에는 아직도 장애우 복지관이 하나도 없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우리도 일본처럼 사회복지관을 장애우들과 함께 활용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많은 비용을 들여서 새로 지을 필요도 없고 또 사회통합 차원에서도 새로운 인식전환의 계기가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모든 택시가 장애우들에게는 무임승차라는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비치된 용지에 이름과 장애우 수첩 번호만 적어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돈을 내고도 장애우는 물론 노약자들까지 잘 태우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택시가 장애우를 태우지 않으려는 일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은 없다며 왜 그걸 걱정하느냐고 오히려 이상한 듯 되물었다. 당신네들은 우리나라 실정을 모르니까.
다음 코스는 구주 도자기 문화회관이었다. 아득한 옛날 백제 도공으로부터 시작된 도자기의 역사가 커다란 도표와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각 나라별 도자기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도자기에 대해서는 문외한일 뿐더러 시각장애우에게 설명해 주기는 정말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손대지 말라는 표시가 붙어있었으나 모른척하고 하나하나 만져보게 했다. 안내인이 와서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화회관이 있는 유전정(有田町)은 전체가 도자기 마을이었고 유전상점가는 그 엄청난 규모에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대부분 자기 집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파는 모양이었고 예술작품에서부터 조그만 생활도자기까지 갖가지 도자기 제품들이 상점마다 그득하였다. 복지회 회장으로부터 찻잔 한 세트씩을 선물 받고, 용문정이라는 호숫가 횟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눈치로 보아 왜 비싼 것 같았으나 우리 입맛에도 별로 맞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야 문제의 "유다까농원"을 들렀다. 다까오 유다까씨는 그 자신이 지체장애우였으나 일찍이 건축사업으로 기반을 잡아 정원수 농장을 경영하는 등 별 어려움 없이 사는 듯했다. 그런데 지난 89년 어느 장애우운동회에 참가하여 그들의 의지력을 보고 울었단다. 그때부터 장애인복지회 일도 열심히 하게 되고 그들에게 뭔가 해줄게 없을까 함께 의논하던 중에 유다까 농원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함께 일하는 장애우는 휠체어 장애우 두 명을 포함해서 전부 5명인데 할머니 두 분이 도와주고 있었다. 1500평의 비닐하우스에서10여종의 관상수 묘목을 키우고 있었는데 현재 10만개 정도 되고 값은 1개에 보통 100엔 내지 500엔은 받을 수 있단다. 장애우들은 아침에 출근해서 각자가 맡은 일을 하고 저력이면 퇴근한다는 것이었다. 급료는 정상인과 똑같은 수준으로 지급하는데 작년 8월의 태풍으로 아직은 적자지만 앞으로 수익금이 생기면 복지회 기금으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자기 사비를 들여 장애우 사업을 벌이고 있는 다까오씨를 보면서 사업가인지 복지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보통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저녁에는 모처럼 재일교포가 경영하는 음식점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그동안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식사 때만 되면 투덜대던 일행이 김치며 고추, 마늘을 실컷 먹었다. 다까오씨에게 상추에다 고기를 얹고 마늘 하나를 싸서 주었더니 모르고 먹고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시각장애우 왈, "일본인들은 코에는 강하고 입에는 약하구만"해서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과연 그랬다. 와사비, 겨자 등 코에 매운 것은 잘 먹는데 고추, 마늘 등 입에 매운 것은 못 먹으니 말이다. 거기다 향수는 또 어찌나 진하게 사용하는지 여자들이 옆에 오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 음식점은 손님들이 많아서 굉장히 붐볐는데 부산에서 왔다니까 주인여자가 직접 고추장, 마늘 등을 들고와서 인사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가라오케에 들러 몇 안 되는 외국가요-사실은 우리노래-를 실컷 불러제꼈다. 일본 온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한국 음식, 한국 노래만 찾누‥‥‥ 몇 달 몇 년씩 외국에 사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덕분에 일본 구경은 한 셈인데 일본의 한 모퉁이를 맴돌았으니 나무를 보았는지 숲을 보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 장애우들에게 빛을 졌다는 생각은 지우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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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북남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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