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소리] "일등 스포츠 국가" 위에 숨은 "꼴지 복지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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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무더운 열기 속에서 한때 온 국민을 하나로 묶어 놓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경기도 이제 입추의 바람과 함께 식어가고 있다.
본래 올림픽 경기는 고대 그리스의 주신 제우스의 축제를 기리는 여흥의 경기로서 4년마다 초여름에 한번씩 성지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것인데, 오람시대에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져 393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교도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고대 올림픽도 393년 293회로 끝났다.
그러나 1894년 프랑스의 체육가 쿠베르탱 등의 주창으로 세계의 평화와 화합 그리고 지구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6년 제1회를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최한 이래 4년마다 한 번씩 행하는 국제적인 경기대회가 되었다. 그 후 동계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도 이와 아울러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체육경기 위주의 올림픽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한때는 여성들만의 올림픽인 여자 올림픽대회가 따로 거행된 적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여성들이 해라의 신전 앞에서 남성만이 참가하던 올림픽 대회와 별도로 열었던 점에 착안하여 1922년 파리에서 근대 국제 여자 올림픽 대회가 새로 열렸으며, 1928년에 열린 제9회 올림픽이 여자 육상 경기가 새로운 종목으로 첨가된 후에 없어졌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체육경기 위주의 올림픽과는 다른 또 하나의 올림픽 대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국제 기능 올림픽대회이다. 이것은 국가 간의 기능 교류와 그 개발을 촉진하고 국제친선을 꾀하기 위하여 기능자들의 실력을 겨루는 국제대회의 하나로 1950년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직업 청년단이주최한 기능 경기 대회가 그 시초이다. 이 대회는 해마다 각국에서 번갈아 열게 되는데 우리나라는1966년에 가입하여 1967년부터 참가하였으며 현재까지 9연패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올림픽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고 있는 국제 대회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하계 올림픽 대회말고도 동계 올림픽, 장애인 올림픽, 국제기능 올림픽 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1992년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금메달 12개를 따서 세계 7위의 스포츠 국가가 되었지만, 본래 올림픽 대회는 국가 간의 경쟁이 아닌 개인 차원의 참가를 통한 스포츠의 발전과 전 인류의 화합에 있는 것인데, 다만 언론 기자단들이 편의상 모든 사람들의 흥미를 돋구기 위한 것으로 국가 간 메달 경쟁을 보도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올림픽 경기의 최대 관심은 무엇보다도 마라톤 경기인데 이번 올림픽에서는 황영조 선수의 승리가 일본 선수와의 경쟁으로 인하여 56년 전 손기정 선수가 당한 울분의 씻음과 함께 더욱 짜릿한 승리감을 전 국민에게 안겨 주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벌써부터 정부와 여당은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며 경제침체, 신행주대교의 붕괴와 같은 대형 사고들을 일시적인 올림픽의 승리감 속에 묻어 버리려 하고 있다. 아무리 예쁜 얼굴도 자주 보면 지겨워지고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다 보면 식상해지기 마련인데 TV와 신문 등 각 언론들은 아마 금년 말까지 이번 하계 올림픽을 기사거리로 우려먹을 것 같다.
올림픽 금메달 12개를 따기 위해 지난 4년 간 부어 넣은 자원의 양은 아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엄청난 관심과 자원이 실상 매일 매일 힘들게 살아가는 그늘 속의 이웃들에게도 주어질 때, 그리고 이 민족의 통일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에 투입될 때 비로소 살맛 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까지 국민화합을 외치지 않더라도 하나 되는 사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 TV와 신문을 안 볼 수도 없고 독자의 언론에 관한 선택권도 그리 많지 않은 우리나라의 상황이고 보면 당분간은 덩달아 춤을 출 수 밖아 없는 형편이다. 누구 좋으라고 덩달아 춤을 출까마는 끈질기게 공세를 당하다 보면 이레저레 민중을 생각하고 더불어 사는 이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게 분명하다.
메달 하나에 연금이 얼마이며, 금메달 따면 팔자 고친다는 정글의 법칙은 예나 지금이나 자본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 아래 스파르타형의 나라를 형성해 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사실 올림픽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연금이 국민의 세금이고 보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외당한 이웃들에게도 그 세금의 씀씀이가 다분히 나타나야 할 것이다.
피나는 노력과 자기희생, 끈질긴 집념, 불굴의 투지 등의 결과에 의한 승리의 월계관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여러 올림픽 중에서도 장애인올림픽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관심과 격려가 매우 낮은 것은 우리의 복지정책이 늘 그래왔듯이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에 밀린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올림픽 금메달 12개를 따기 위해 지난 4년 간 부어 넣은 자원의 양은 아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엄청난 관심과 자원이 실상 매일 매일 힘들게 살아가는 그늘 속의 이웃들에게도 주어질 때, 그리고 이 민족의 통일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에 투입될 때 비로소 살맛 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까지 국민화합을 외치지 않더라도 하나 되는 사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점점 상업주의와 국가체육주의에 물들어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이 사라져가는 체육 올림픽의 현실을 바라볼 때 인류 공동체의 평화를 기리는 목적은 소멸되고 오직 경쟁을 통한 긴장과 200여명의 영웅만을 길러내는 모습, 그 이면에 수만 명의 소외당하는 노메달 인물들을 양산해내는 모순과 접하게 되는 것이다. 항상 일등에게만 갈채를 보내고 꼴찌에게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으려는 풍조는 결국 순수하고 격의 없는 스포츠 세계에까지 소외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더할 수 없는 실망감을 안겨준다. 이제 소슬한 가을바람과 함께 정신을 차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돌아볼 때이다. 엘리트 체육이니 사회 체육이니 하는 체육정책도 중요하지만 늘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소외되어 온 복지정책에 대해 이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도시빈민, 가난한 농어촌 주민, 점심을 굶는 어린이, 소년소녀 가장, 공단의 저임금 노동자, 4백만 장애우, 불우한 노인들, 심지어 1년에 백만 이상의 생명을 잃는 낙태아들 등등 사회 속에서 차별과 소외와 매장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국가의 복지정책이 충분한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정부에 대한 자극과 도전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하겠다.
어디 소외당한 이웃들을 두고 신바람 나는 잔치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스포츠의 열광은 잠깐이지만 우리의 삶은 영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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