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일 저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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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한국 디피아이 국내지도자 연수세미나
장애인의 능동적인 참여와 기회균등을 위하여
지난 8월18∼19일 한국 디피아이(회장 송영욱)와 디피아이 아·태지역평의회(회장 에이타 야시로)는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인권과 장애"를 주제로 첫 번째 국내지도자 연수세미나를 가졌다.
송영욱 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지금은 "유엔 장애인 10년"을 결산하고 지난 4월 북경에서 선포된 "아시아 태평양 장애인 10년"의 행동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중대한 시기"라고 전제하고 "이번 행사를 통해 장애인의 권리와 사회복지에 대한 시각전환과 발상전환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고 세미나의 의의를 설명했다.
전국의 기관·단체 임직원 50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 첫날 발제 강연을 맡은 이익섭 교수(한국장애인복지개발원장, 연대사회사업과)는 "오늘날 복지의 현실은 복지의 본질적 권리의 회복보다 효율적 서비스나 그 다양화에만 주목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장애인 복지가 서비스의 확대에 그 근본적 목적을 두게 된다면 그 본질적 문제 해결은 달성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교수는 따라서 "인간다운 삶의 회복과 보장이라는 복지의 근본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권이 회복되어야 하며 이는 장애의 극복 이전에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며 장애우 단체는 인권의 회복과 복귀를 위해 체계 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장애우 단체의 역할을 강조했다.
둘째 날 "장애인 운동과 디피아이의 역할"과 "아·태 장애인 10년 선포 의미와 장애인단체의 역할"에 대한 다닐로 델핀(아·태지역 디피아이 지역개발 담당관)과 에이타 야시로의 강연이 있었으며 분과토의와 자유토론 등을 통해 장애우단채의 역할을 정리했다.
참가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장애인의 현실과 인권, 장애인단체의 역할 등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토대로 장애인의 완전한 참여와 평등의 실현을 향해 새롭게 출발 할 것"을 다짐하며 이틀 간의 일정을 모두 마쳤다.
공대위 특수교육법 제정 특위
특수교육법 제정 시안 작업 막바지
장애인 복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마련하는 특수교육법 시안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공대위 특수교육법 제정 특위는 지난 8월 17일 교사, 전공학생 등 30명이 참여 한가운데 워크숍을 갖고 1차 시안을 검토했다.
이번에 발표된 1차 시안에서는 특수교육의 목적과 용어를 새롭게 정의하고 특수교육권자의 유형을 세분화하는 한편 통합교육에 관한 방안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0세부터 조기교육 실시 조기교육부터 중학교까지 의무교육 고등학교 교육과 전공과는 무상교육으로 한다. 사립특수교육 기관에 대한 보조를 의무화한다. 특수교육 대상 판별위원회를 설치한다 개별화 교육의 효율적인 실시를 위해 학급당 학생 수를 8명 이내로 조정 배치한다 특수학급 설치규정 의무화 진로교육 및 직업교육의 실시를 구체적으로 명시 부모모육 실시의 의무화 국립특수교육연구원 설치 등 특수교육에 관한 제반문제들을 총괄하여 명시하고 있다.
이날 워크숍에서는 총 47조의 법안을 제시하는 한편 특수교육 관련 교육법의 개정안도 함께 제시되어 특수교육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특수교육법 제정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케 했다.
특위는 오는 9월 19일 "특수교육법 제정 시안 2차 워크숍"을 갖고 검토를 마친 후 이어서 정당 초청 공개 토론회 및 공청회를 개최할 방침이다.
고 최준호군
1주기 추모제 열려
여름날 바람불어 떨어지는 꽃잎처럼 살다간 님이여/병든 몸 서럽다 하지않고 가신 걸음 힘찬데/남은 우리 슬픈 마음 님은 원치 않아/우리 역시 가신 님 뒤따라 힘차게 따르리/(고 최준호 1주년 추모시 "슬픈 마음 님은 원치 않아" 중에서 : 성동야학 김인용)
지난 8월22일 한양대학교 콘서트홀에서는 장애우로 또,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이 땅의 한 젊은이로 바로 서기 위해 몸부림쳤던 고 최준호군의 열아홉 짧은 삶과 그 의미를 되새기는 추모제가 열렸다.
1973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최준호군은 한쪽 팔이 뒤틀린 장애우로 중학교를 마친 후 89년 서울에 올라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정립회관, 삼육재활원, 남부장애자복지관 등을 찾아 다녔으나 거절당하고 신문을 돌리며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으며 이때 성동야학 중등교육관을 알게 돼 야학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대입 검정고시를 치르고 합격했던 91년 8월 22일 자신이 다니던 야학 옥상에서 "…,내가 마지막 가는 길에 아무 한없이 이렇게 간다는 것이 나한테는 한스럽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자살했다.
"장애자도 자본가의 집에서 태어나는 한 평생 걱정 없다. 그러나 나같이 노동자나 농촌 사람의 아들딸로 태어나면 생계위협을 많이 느끼는 것이다. 장애자들끼리도 많은 사회적 차별을 받는다. 이런 사회를 하루빨리 없애기 위해…" 차별 당하는 장애우의 모순된 현실과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최준호군은 끝내 "불꽃"으로 스러져갔다.
이날 추모제에 참가한 성동야학 동료학생들과 관계자들은 최준호군의 뜻을 이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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