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치는 소리] 해고노동자 서지영씨의 어떤 이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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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노동자가 있다.
아니, 이제는 기계에 갈려 뭉그러진 손으로 폐품처럼 자신을 내버린, 거대한 "자본"에 빼앗긴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도전장을 던진 한 장애노동자가 있다.
이제 마흔의 나이와 먹여 살려야 할 세 식구를 이끌고 그가 가야할 곳은 과연 어디일까.
신풍에서 시작된 노동자의 삶
1976년 10월 스물넷 이제 막 군복무를 마친 서재영씨는 경기도 성남 신풍제지 초지실(종이를 만드는 기계실)에서 길고도 지루한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어렵고 힘든 하루 하루였지만 결혼도 하고 창원(13), 호원(11) 두 아이의 아버지로 열심히 사느라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낸 보람찬 날들이었다.
비록 반장이나 조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초지실에서 만큼은 예닐곱 명 조원들을 독려해가며 작업지시를 할 만큼 고참소리를 듣기도 했다.
85년 말경 회사는 평택에 대규모 공장부지를 마련하고 생산라인 한 개조를 내려보내는 등 착실하게 성장을 거듭했다.
메인을 꺼!
그러나 1일 3교대로 돌아가던 생산라인은 평택으로 일부가 내려가는 바람에 두 개조가 12기간씩 맞교대를 하게되어 더욱 힘들어졌다.
그러나 서재영씨는 "그때만 해도 참 힘들었죠. 그래도 사람이 없으면 안되니까 그냥 참고 했죠. 기계 운전하는 사람이 기계는 돌려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 생활을 한 육 개월 정도 했다.
그러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계도 스물네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다 보면 피로해지기 마련인지 자주 고장이 나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시 기계가 고장이 나서 여러번 고쳐달라고 의뢰는 했는데 뭐, 평택으로 갈라구 그랬는지 어쩐지 영 고쳐주지 않더라구요."
86년 6월 17일 밤 10시경.
이날도 철야작업으로 한참 기계를 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종이가 끊어졌다.
서재영씨는 윙윙 굉음을 내고 돌아가는 기계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채 끊어진 종이를 잇다가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때 작업을 하다가 왼쪽 손이 캇타 로라에 끼었는데 구랏찌가 고장이 나버려서 같이 일하던 7명의 달려들어 암만 땡겨도 손이 안빠지는 거라. 그래서 내가 "메인(메인스위치)을 꺼"라고 소리쳐서 삼십여 미터 떨어진 메인을 올스톱 시켜 가지고 몽키로 풀러서 간신히 혼을 뺄 수 있었죠."
스위치를 내리기까지 3분이 넘도록 그는 고속으로 돌아가는 로울러에 손을 집어넣은 채 필사적으로 딸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그동안 로울러는 서재영씨의 왼손등이 사정없이 갉아 먹어 버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손가락 몇 개는 무사히 건졌지만 다시는 기계를 잡을 수 없었다.
경비실로 그리고 ……
87년 1월 일곱달의 기나긴 치료를 마치고 강남 성심병원을 나온 서재영씨는 그 다음달부터 곧바로 회사에 나갔다.
그러한 일곱 달만에 다시 돌아 온 회사는 어딘지 어색하고 서먹서먹했다.
"회사 간부들은 손도 다치고 했으니 우선 경비실로 가라고 그러더라구요. 임금이나 이런 건 회상에서 다 알아서 똑같이 해 주겠다고 하면서."
거기서 일하나 여기서 일하나 다 똑같은 회산데 어떠랴 싶어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경비실로 출근을 했다.
"그런 일은 그전에도 많았기 때문에 별 걱정을 안 했어요. 회사에는 일직, 2교대, 3교대가 섞여있는데 왔다갔다하더라도 통상금은 얼추 맞춰주는 식으로 해왔거든요."
그러나 초지실에서 3교대로 일 할때 일당 7,800원을 받았던 서재영씨는 2교대로 12시간씩 일을 하는 경비실에서 처음 월급봉투를 받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2교대라 일당이 4,900원으로 깎인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통상금이 2만 5천이나 줄어들은 것은 그동안의 관례로 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돈이 적으냐고 물어보니까 총무과 담당직원이 봉급결정은 한번 결정하면 1년동안 움직이지 못하니까 나중에 보면서 정하자고 해서 기다렸는데 계속 안 해 주더라구요."
십년이 넘도록 근무하면서 하루도 쉰 적 없어
서재영의 불만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10년이 넘도록 추석, 구정, 신정, 일요일 단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어요. 추석, 구정 때는 수출품 뺀다고 계속 돌리고 일하는 사람이 아, 회사에서 물건 생산해 달라고 들어오는데 열심히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다 쉬어 가지고 일이 되겠어요. 바쁠 때는 열두시간이 아니라 이십사시간도 저는 많이 했어요."
멀쩡하게 걸어 들어간 회사에서 뼈빠지게 일하다가 손까지 날려버렸는데 월급 때마다 동료들 보다 얇은 봉투를 받아야 하는 서재영씨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흘렀다.
"그렇다고 내가 회사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 윗분에게도 어느 부서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봉급만큼은 똑같은 종업원으로 대우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88년 12월 신풍제지 성남공장은 판교-구리간 도시고속도로가 회사일부를 가로지르고 나가 생산라인 전체를 평택으로 이전 할 것을 결정했다.
당시 회사에서는 자진사표를 내는 사람에게는 6개월치의 월급과 위로금조로 2백만원씩을 주고 그대로 남을 경우에는 다소간 보직변경은 있을지 몰라도 전원 평택공장에 수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저 같은 경우 다치고 나서 회사에서 보상금 한푼 안 받았어요. 왜, 일할려고, 다시 그 회사에 다닐려고, 보상금 받아 나와봐야 가정형편도 어려운데 몸이나 성해야 노동일이라도 하지. 그리고 설마 그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겠어요?"
"회사측에서도 내가 경비실에 갈 때 "기기 보냈다가 나중에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위에 부서장 이런 사람들이 "그래도 회사에 공로잔데 누가 널보고 나가라고 그러 겠느냐. 열심히 일만해라. 일하면 언젠가는 그 심정을 알아 줄 거다" 그런 얘기도 했고."
성남공장 1백10명의 직원 중에 사표를 쓰지 않고 평택으로 내려가겠다는 뜻을 밝힌 사람은 서재영씨를 비롯해서 30명이었다.
이들은 어차피 무슨 일을 하든지 똑같은 회사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마땅하게 다른 곳으로도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나이가 들었거나 서재영씨 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서재영씨는 평택으로 내려가지 않고 성남에 남아 공장의 기계와 사무실을 지키는 경비업무를 계속했다.
89년 6월 중순 회사에서는 그동안 2교대로 근무를 했던 경비실을 3교대로 바꿨다.
서재영씨는 속으로 좋아했다. 일을 적게 해도 결국 잔업 수당이 높아져 통상금은 같아 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번 깎인 2,900원은 다시 오르지 않았다.
당시 총무과장으로 있었던 손동철(총무이사)씨에게 "억울하다"고 항의를 했지만 "어떻게 열두시간 일하다가 여덟시간 일하면서 돈을 더 달라고 하느냐"는 핀잔만 들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경비실에 근무하기로 하고 들어왔으면 임금이 적어지는 게 당연하지만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그러나 회사측의 차별 대우는 점점 심해져 임금인상 때도 다른 직원들의 3분에 1밖에 올려주지 않는 등 눈에 보이지 않게 계속 압력을 가해왔다.
"경비직은 별정, 단순감시로 생산직과 틀리다고 하는데 생산직으로 보내 달래도 안보내 주고 임금도 적게 주는 것은 결국 나가라는 소리가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노동부등 관계기관에 사정을 알리고 찾아갔으나 이 역시 별무소득이었다.
법대로 하라
이처럼 서재영씨가 점차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기를 느끼고 자구책을 강구하던 지난해 9월 18일 손동철 총무이사가 갑자기 성남공장 경비실 직원 3명 모두를 불러 "회사에 결정한 얘기를 전할 뿐"이라며 "성남공장 경비실은 용역을 주기로 했으니 세 사람은 10월 31일까지만 근무하고 사표를 내라"고 요구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해고였다.
서재영씨와 수원 보훈 지청의 알선으로 평택경비실에서 근무하다 성남으로 좌천(?)된 또 다른 장애우인 전태복씨는 다음날 즉시 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며 해고 조치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사장은 "그때는 현장에 사람이 모자라 다 충당됐지만 지금은 갈데가 없다"고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날 사장이 그러더라구요. "미스터 전, 미스터서는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어 현장에서 일할 수 없잖아" 그래서 내가 "이회사에 스물네살 젊은 청춘을 다바쳤는데 이제와서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못 나간다"고하자 회사방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경비 반장 서상달, 전태복, 서재영씨 등 세 사람은 "못낸다, 아무 잘못 없이 왜 내느냐"고 대들었으나 결국 서상달씨는 회사측에 "10월말 안으로 사표를 내면 3개월치의 봉급과 연말까지 근무 한 것으로 인정해 하반기에 지급될 340%의 보너스를 모두 주겠다"는 말에 사직서를 내고 말았다.
10월 31일 신풍제지는 서재영씨와 전태복씨 이상 두 사람을 "1991년 9월 16일 해고예고 통보에 의거" 해고한다는 내용의 통지서를 보냈다.
또한 성남지방노동사무소에서도 11월 11일 회신을 통해 "해고 건에 대하여는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할 수 있으며 근로 조건 저하 부분에 대해서는 혐의 사실을 발견할 수 없어 종결 처리"했다고 통보를 함으로써 다시 한번 서재영씨를 실망시켰다.
"노동부 조사중에 해고 됐는데 근로감독관 얘기도 이해가 안가요. 봉급명세서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데 근로조건 저하 부분을 인정할 수 없다니 또 해고 문제만 해도 지금 노동부에서 기업체에 장애자 취업을 권유하고 있는데 자기 회사에서 다친 사람까지 내쫓는 다는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12월 20일 부당해고에 대한 구제신청 문제로 수원지방노동위원회에서 열린 심사에서 회사측은 "서재영, 전태복씨의 복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현장부서장들이 도저히 일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명까지 올려보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해 마치 서씨 등의 회사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몰아부쳤다.
"노동위원회에서도 회사에서 이렇게까지 배려를 해주는데 왜 안 가느냐는 식이더라구요. 아직 판결은 안 났지만 우리한테 유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세월 지나면 잊혀지는 것(?)
회사경영이 어렵고 자신과 같은 장애우들이 많아서 그렇다면 자진해서 물러날 것이라는 서재영씨.
고문 변호사가 둘씩이나 있고 하루에 종이를 5백톤씩 생산해 내는 거대한 회사에서 "내가 일만 잘하면 쫓아 내지야 않겠지" 하면서 청춘을 바치고 이제는 망가져버린 손으로 도둑까지 지켜주었던 서재영씨에게 한 일이라고는 산재보상금 신청기간 3년이 지나자 "법대로 하라"고 큰소리 치며 밥줄을 끊는 것이었다니 이 웃지 못할 현실을 과연 무엇이라고 해야할까.
"셋방살이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이 리아카 장사라도 해야지 언제까지 이 일에 매달릴 수도 없고 그러다 세월이 지나가면 잊혀지는 거 아니겠어요. 그저 내가 운이 없는 탓이죠."
아직은 그 세월의 흐름이 버려졌다는 울화통을 잠재우지 못한 듯 2천여만원의 퇴직금마저 자신의 해고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질 까봐 해약해 먹고산다는 서재영씨.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자신의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서재영씨.
책상 위에는 서재영씨가 놓고 간 두툼한 자료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해고 통지서 바로 뒤에 다음과 같은 서류가 있었다.
"표창장. 본사공장초지과 서재영. 위 사람은 1985년도 중 품행이 단정하고 근무성적이 뛰어나 타에 모범이 되므로 이를 치하하여 이에 포창함. 1986년 1월 4일. 신풍제지주식회사 대표이사 정일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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