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문제다] 복지사업이 영리수단(?)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이것이 문제다] 복지사업이 영리수단(?)

한 복지사업가가 구설수에 올라 있다. 그 내막을 알아본다.

본문

<가판대 허가 문제로 박씨 만나>
  사이비 복지사업가가 끼치는 폐해가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한 자칭 복지사업가가 영세장애우의 돈을 빌린 후3년째 갚지 않고 있어 물의를 빚고 있다.
  서울 방배 4동에 사는 생활보호대상자 장애우 정정자(51세)씨에 따르면 장애자성인직업재활원 후원 회장과 자립운수추진위원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는 박기홍(55세)씨가 89년 11월 자신에게서 1백8십만 원을 빌려간 후 이제껏 갚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고의적으로 연락마저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씨가 주장하는 박기홍씨에게 돈을 빌려주게 된 계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89년 7월 한 정치인의 대화모임에서 정씨는 처음 박기홍씨를 만났다. 그때 박씨는 봉고차를 몰고 다녔는데 장애우 마크가 선명하게 차창에 붙어 있었다.  마침 생계수단으로 노점상을 할 생각을 하고 있던 정씨는 박씨에게 구청에서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매달렸고, 박씨는 자신이 발이 넓으니까 도와주겠다고 했다.
  이후 두 사람은 몇 차례 서초구청을 찾아가 진로도매센터 앞에 설치해놓은 정씨의 가판대에 대한 허가를 요청했지만 구청담당자에게서 허가를 내 줄 수 없다는 대답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10월 중순 정씨의 가판대를 구청단속반원이 실어 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별다른 대책이 없었던 정씨는 박씨를 찾아가 사정할 수밖에 없었고 박씨는 가판대를 되찾게 해준다고 말은 했지만 박씨 역시 뾰족한 수가 없었던 듯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정씨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11월초 어느 날 박씨가 찾아왔다. 박씨는 대뜸 부천으로 이사를 가야 되는데 돈이 부족하니 2백만 원만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박씨가 자신을 도와준 고마움도 있고 해서 정씨는 냉정하게 거절하지는 못하고 중권을 사둔 돈 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박씨는 중권을 팔아서라도 빌려달라고 했다. 이자를 증권수익보다 더 많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정씨는 두 달 빌려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전재산인증권을 팔아 1백8십 만원을 박씨에게 건네줬다.
  그러나 돈을 빌려간 박씨는 애초 약속과는 달리 갚겠다는 날짜인 90년 1월 13일이 지났지만 돈을 갚지 않았다. 전화로 독촉을 하자 겨우 6만원을 이자라고 갖다 주었을 뿐이었다.
  최근까지도 박씨는 돈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겨우 통화가 되면 차일피일 미루고 어떤 때는 아예 통화마저 회피한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박씨는 사회지도층 인사(?)>
  지난 2월 초 정정자씨가 채무 건으로 본 연구소를 찾아왔을 때 기자는 정씨가 내민 박기홍씨의 갖가지 명함을 보고 놀라야 했다.
  적어도 명함에 활자화 되어있는 박씨의 직함만 본다면 박씨는 고작 1백 8십 만원이라는 돈 때문에 망신을 당할 사람이 아닌 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임이 틀림없었다. 여기서 박씨가 맡고 있는 몇 가지 직함을 꼽아 보면 그가 유명인사라는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박기홍씨는 가칭 자립운수추진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고, 한국운전기사자립회 와 장애자성인직업재활원 회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나라사랑중앙협의회 우리물건쓰기 실천 운동본부라는 이름이 긴 단체의 추진위원장을 또한 맡고 있으며, 90 영호남 친선박람회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전력에다 사단법인 민족문화통일회 친서삼경연구회 부회장이기도 하다.
  가히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혼란을 느껴야 했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박기홍씨를 만나 의문을 풀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어렵게 천호동 어느 빌딩에서 박씨를 대면할 수 있었다. 박씨는 그 빌딩 2충을 세내어 민족문화뉴스라는 신문 창간을 준비중에 있다고 했다.

  근처 다방에서 기자와 마주앉은 박씨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사회사업 경력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박씨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60년대 서울 중구 필동에 있던 대한직업소년원에서 처음 고아복지사업을 시작했고 자신의 딸이 경미한 뇌성마비장애우인 것이 계기가 돼 이후 장애우 복지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장애우 복지사업은 신발판매로 서울 도봉구 창2동에 있는 재활제화 후원회장으로 있으면서 직접 기업체와 병원을 돌며 장애 우들이 만든 신발을 판매하는 복지사업을 했다는 것이다.
  82년에는 운전기사 자립회를 만들었는데 특수회원으로 장애우 2백여 명을 받아들여 불법 영업으로 생계유지를 하고 있는 장애우 운전기사들을 구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87년에는 자신이 주도가 돼 국립묘지에 무궁화 꽃 1백 만 송이를 헌화하기도 했고, 90년에는 지역감정해소 차원에서 영호남 친선박람회를 기획했다가 성사 단계에서 무산된 적도 있다고 했다.
  나아가 91년에는 "통일로 민족통일대행진" 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는 것이 그가 말한 사회사업 경력이다.

<영리사업에 지나지 앉아>
  사회사업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직업이 전자제품 수리 기술자(RTV)였다고 밝힌 그는 "사회사업에 몰두하느라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전파사를 날려야 했다"고 쓸쓸히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정정자씨 채무 건을 물었다. "집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왜 정씨의 돈을 갚지 않느냐"고 얘기하자 그는 "정씨에게서 빌린 돈은 실제로 1백3십 만원밖에 되지 않으며 자립회를 운영하다 보니 빛을 많이져 어쩔 수 없이 갚지 못했다"며 "자신이 사는 집은 아내가 구입했으며 정씨의 돈은 그림을 팔아서 갚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여 "사회사업을 하지 않고 신발만 팔았어도 한달 4백만 원은 거뜬히 벌 수 있었다"고 채무가 무리한 사회사업에서 기인했음을 강조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말한 신발 판매 수익으로 그는88년부터 90년까지 3년 동안 재활제화 후원회장으로 있으면서 구두 판매사업을 했는데 한 켤레를 팔면 8천 원에서 9천 원 정도가 남았을 정도로 고수익을 올렸다는 것이다.
  차에 장애우 마크를 달고 다니며 장애우복지사업을 한다고 하면 관청이나 기업체에서 호응이 좋았다는 것이 그의 회상이다. 현재 구두판매 사업은 자신의 처제 배모(47세)씨가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한 장애우복지 사업이 실제로는 치부수단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는 언급이다.
  박기홍씨와 헤어지면서 그가 몰락한 복지사업가일까 아니면 열정은 있지만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고전하는 불운한 복지사업가일까, 그도 아니면 사이비 복지사업가일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