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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기획 2] 한 복지사업가의 일그러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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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우 복지를 상품화 하여 개인의 영리를 추구하는 말뿐인 복지사업가들의 출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진정 장애판의 정화는 요원한 것인지 한 복지사업가를 조명해 봄으로써 이 문제를 다시 따진다.

<장애우가 자식이라는 명분(?)>

 한 복지사업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이학수(52세)씨이다. 그는 현재 서울 당산동에서 어느 건물을 세내어 여러개의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비록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외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여의도 국회 앞 맞은편에 번듯한 사무실을 차려놓고 장애우 복지 사업을 하는 복지사업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81년 처음‘장애인고용봉사회’를 만들고 이 단체를 82년 서울시에 비영리 복지 단체로 등록하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비장애우였기 때문에 자격시비가 일때면 그는 “자식이 장애우라서 마음이 아파 이 일에 뛰어 들게 되었다”는 요지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납득을 못하면 그는 자신이 엔지니어라는 사실을 내세웠다. 기술자로서 발명가로서 큰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자식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힘든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자식이 장애우라서‥‥‥”라는 그의 말은 그가 복지사업가로서 당위성을 인정받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초기 사업으로 꽤 많은 돈을 들여 ‘고용과 봉사’라는 잡지를 만들어 배포했다. 그리고 여러 방면으로 사업을 병행해 나갔다. 부설기관으로 ‘장애인자립상우회’‘장애인장학회’‘한국기능장애인협회’‘장애인환경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한 때 인천 가좌동에 장애우연립주택 96세대를 지어 분양에 나서기도 했다.
 88장애인올림픽이 치뤄진 후에는 사진집을 팔기도 했고, 89년 말에는 사회 복지법령집을 만들어 팔았으며 목각인형을 판것도 그였다.

 그의 주판매처는 국회의원, 기업체 사장, 변호사, 의사, 약사 등의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였다. 그들에게 그는 “수익금은 장애우 복지기금으로 쓰입니다”라며 ‘장애인고용봉사회’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상품을 팔았다.
 상품을 팔아 얼마의 수익이 생기는지, 수익금이 구체적으로 장애우복지를 위해 어떻게 쓰이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 없었다. 그가 장애우복지를 위해 쓴다고 했기에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어려운 장애우를 돕는다는 건 무조건 좋은 일이라는 순수한 생각으로 보내온 상품을 사주었을 뿐이었다.

<허상뿐인 장애우 복지>

 그는 상품을 파는데 편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구매의사도 밝히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물건을 보내고 수금은 나중에 함으로써 부담을 가중시키는 고차원의 상술도 활용되었다.
 그가 이렇듯 장애우 복지를 명분으로 내세워 상품을 팔아 얼만큼의 돈을 벌었는지는 역시 알 수가 없다. 그가 재미를 봤는지 아니면 오히려 손해를 봤는지는 그만이 알 수 있는 극비 사항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확실히 드러난 건 그가 내세운 장애우복지는 껍데기에 불과한 허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장애우 복지가 실현 됐다는 징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장애우들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사정이 이쯤 되자 당연히 그에 대한 장애판의 의혹의 눈초리는 커져만 갔다.
 그에게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한 건 올해 6월 말이었다. 한 장애우관계 신문이 "장애우고용봉사회 영리추구가 주목적"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어 그에 대한 문제 제기의 포문을 열었다.(장애인복지신문 6월 28일자 참조)
 기사 내용은 그가 회장으로 있는 장애인고용봉사회가 "장애인 합동 결혼식 협조를 명분으로 기업측에 목공예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결혼식 계획조차 불확실해 의혹을 사고 있고 나아가 이 단체가 그 자신 영리사업의 한 수단이었음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며 그 근거로 △장애인고용봉사회는 그의 개인 사업체인 현석기획의 부대사업에 불과하며 △따라서 7월 1일부터는 대외적으로 장애우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그의 해명을 인용해 놓고 있다.
 "행사 빌미 상품판매 말썽 일자 개인사업 앞세워"라는 큼지막한 활자가 두드러진 이 기사가 나가자 그는 순식간에 복지사업가에서 영리추구가 주목적인 개인 사업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가사 내용에 거칠게 항의했지만 그의 항의를 귀담아 듣고 그를 두둔해주는 사람은 적어도 장애판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개인사업가로 낙인찍인 채 소리없이 사라져가는 듯했다.

<목각 인형 두 개 30만원>

 그런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12월 초였다. 우연한 기회에 그의 근황이 포착 되었는데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11월 중순 어느 날 서울 서초동에 개인 사무실을 내고 있는 한 변호사는 낯선 사내의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한국신체장애인중앙회 회원 김종성"이라고 밝힌 사내의 용건은 "수익사업으로 재활원에서 장애우들이 직접 만든 목각인형 두 개를 30만원에 판매하니 장애우 복지를 위해 사달라"는 내용이었다.
 평소에 장애우 복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 변호사는 단체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 없고 사무실이 당산동에 있다"고만 대답했다. 재차 물어보았지만 그 사내가 전화번호 알려주기를 완강히 거부하자 할 수 없이 그 변호사는 "그렇다면 팜플렛을 보내보라"고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 우편집배원이 팜플렛이 아닌 목각인형이 든 상자를 떨구고 갔다. 집배원이 몇십 개의 같은 상자를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근처에 목각인형을 주문한 변호사들이 꽤 되는 것 같았다. 당황한 그 변호사는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는 631-6861이었다. 웬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우선 "목각인형을 보낸 단체가 맞냐"고 물어 보았다. 그 여자는 "맞다"고 대답했다. "그 단체가 무슨 일을 하는 단체냐"고 재차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장애인 취업 알선과 해마다 20명의 장애인 합동결혼식을 치뤄주고 있다"고 사업을 설명했다. 궁금증이 일어 "목각인형은 어디서 만드냐"고 물어보자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있는 장애인고용봉사회 기획재활원에서 장애인들이 만든다"는 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장고봉 사업 그만뒀다. 그러나,>

 그 변호사의 사실확인 요청에 접한 기자는 12월 초 문제의 당산동 사무실을 찾아갔다. 뜻밖에도 "장애인고용봉사회"의 줄임말인 "장고봉" 간판이 입구 문에 붙어 있었다. "한국신체장애인중앙회"란 간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래를 갸우뚱거리며 문을 밀고 들어서니 놀랍게도 거기 그 이학수씨가 있었다. 혼란을 느낀 기자는 대뜸 전화번호는 앞서 밝힌 그 번호와 일치했다. "장고봉"과 "한국신체장애인중앙회"는 동일한 단체가 아닌가라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순간이었다. 이학수씨와 마주앉았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한국신체장애인중앙회는 어떤 단체이고 김종성씨는 누구인가?
 △ 김종성이는 비장애인으로 여기서 판매관리를 담당했던 직원이었다. 그는 6개월 전에 그만뒀다. 한국신체장애인중앙회가 어떤 단체인지 나는 아는 바 없다.
 ― 김종성 씨는 사무실이 당산동에 있다고 했고 전화번호도 장고봉과 일치하고 있다.
 △ 그래도 나도 모른다. 그가 장고봉을 팔아 먹고 사는지 몰라도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 작년 7월 이후 회장님은 대외적으로 장애우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장고봉 간판을 달고 사업을 하고 있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 실제적으로는 장고봉 사업은 그만뒀다. 개인사업만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발명특허만 해도 40여개를 가지고 있다. 나는 답답할 게 없는 사람이다.
 ― 그동안 장애우 복지를 명분으로 내세워 많은 사업을 해온 걸로 알고 있다. 결과는 어땠는가.
 △ 1억원을 들여 사회복지법령집을 만들어 손해를 봤다. 장애인 연립주택은 소득장이 형성되질 않고 입주할 장애인들이 계약금 50만원을 가져오지 않아 결국 건축업자를 통해 일반 분양했다. 사진집 판매도 손해를 보기는 마찬가지다.
 ― 지금은 무슨 사업을 하고 있나.
 △ 특수도예인 현석 정심 서화도예원을 운영하고 있고 경기도 이천에 농장을 가지고 있다. 보력건강 밴드도 만들며 바이오 세라믹 원적외선 방사제 개발에도 몰두하고 있다.
 ― 장고봉 기획재활원은 어떤 재활원인가?
 △ 사업자등록까지 마친 내 개인사업체다. 주로 목각제품을 만들었는데 수지타산이 안 맞아 6개월 전에 그만뒀다.
 ― 일부에서 회장님의 사업방식에 많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 전화로 상품을 판매했는데 무슨 강매를 했다고 그러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문제는 흠집을 낼려는 인간들이 많고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언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도 답답해 사재를 들여 내년에 "밝은 누리에"라는 월간지를 발간할 계획이다. 그리고 돈을 벌어서 누가 뭐래도 장애인 복지사업을 계속할 것이다.

일문일답을 마치고 그의 안내로 제품 전시실을 둘러봤다. 목각인형과 서각제품, 그리고 도자기와 하다못해 보력건강밴드에까지 "장고봉"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는 것이 누에 띄었다.
 그가 해명과는 달리 "장애인고용봉사회" 이름으로 사업을 해왔음을 알려주는 징표는 그의 사무실을 나오는 순간에도 발견되었다.
 그가 보란 듯이 간판을 달아 놨던 게 마치 실수였던 것처럼 입구문에 부착되어 있던 "장고봉" 간판을 "이게 왜 여기 붙어 있지"하며 손으로 뜯어내 버렸던 것이다.

<복지사업가로서 자격이 있는가>

상계동에 있는 "장고봉이기획재활원"을 찾아갔다. 낡고 허름한 건물 안에는 늦은 시각임에도 7명의 건장한 비장애우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사방에 목각인형과 서각제품들이 널려 있었다. 흔히 재활원하면 연상되는 장애우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건물자체부터가 수용은커녕 장애우들이 작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재활국장이라는 송모씨는 없었다. 인부들에게 여기가 재활원이냐고 묻자 그들은 "재활원이 아니라 일터"라고 대답했다. 덧붙여 "장고봉 산하 기획재활원이 뭘 하는 곳인지는 모르지만 부근의 몇몇 장애인들에게 일감을 맡기는 것으로 보아 막연히 장애인들과 관련이 있는 공장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제품이 어디로 나가냐고 물어보자 "백화점 판매도 하고  장보봉으로도 하루에 열대여섯개 나간다"는 대답이었다. 한마디로 더 이상의 사실확인이 필요 없었다.
 이학수씨, 그는 누가 뭐래도 복지사업가라고 해야 옳다. 그가 그동안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업은 어쨌든 직간접으로 장애우 복지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고용봉사회를 시발점으로해서 장애인 장학회, 한국기능장애인협회, 장애인환경문제연구소, 장애인자립상우회, 장애인자립상우회, 장애인합동결혼식, 도서출판 장고봉, 장애인 자립 아파트 추진사업, 명언예술도예, 보력건강밴드, 바이오세라믹 원적외선방사제, 장고봉기획재활원……그리고 내년에 창간 될 잡지 "월간누리에" 이르기까지 그가 펼친 현란한 사업들만 본다면 그가 장애우복지사업가로서 인정을 받는데 하등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사업가로서의 그의 초상은 자꾸 일그러져 보이기만 하니 왜일까? 그의 말대로 기자의 시각이 부정적인 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일까? 과연 그럴까? 그에게 다시 한 번 따져봐야겠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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