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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자료] 장애우문제에 관한 사회구조적 고찰

본문

장애우는 그들이 일상인들과 다른 신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일상인과 다른 기능을 갖게 된 원인이 사회적인 데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장애우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이게 된 데에는 바로 개인들 각자를 포함하는 사회전체가 책임을 져야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Ⅰ.머리말>

 만약에 법이 우리가 배웠듯이 정의의 시녀라 한다면, 한 사회의 법은 그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 편에서 선 내용들로 제정되고 해석되고 집행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 법의 역사가 보여준 바는 그와 거리가 멀다. 법은 그 시대 그 사회에 있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해관계로부터 표출되는 갈등과 모순의 현 단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물론 이런 개념규정은 법이란 동질적 국민들간의 합의로 얻어진 사회계약이라는 설명방식과는 배치되는 것이지만 현실역사가 엄연히 그럴진대는 어쩔 수 없다. 예로부터 사회적으로 가장 어렵고 천대받은 집단은 "레미제라블"로 표현되는 하위신분의 사람들 즉 병자, 범죄자, 가난한 사람들, 과부와 고아, 노약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들 집단은 그 사회에서 냉대 받는 바 되었고 기껏해야 국왕의 시혜와 자비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그쳤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지위는 소수 지배장의 자의성에 의존하게끔 되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 단계로 발전하면서부터 계급적으로 뚜렷이 분화할 수 있었던 노동자계층들은 힘찬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그 후 스스로를 위한 독자적인 법적 권리의 영역을 확보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좁게 보면 노동법 분야이고, 넓게 보면 사회법분야가 이와 함께 새롭게 형성되었다. 물론 노동법이 제정되었다고 해서 노동자의 권리가 저절로 보장되었던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권리보장은 법조문의 존재유무에가 아니라 노동자 권력이 얼마만큼 국방전반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영향력이 미치는 한에서 구체적 법 집행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확연하다. 이런 현상은 법체계 전반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 하위법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헌법에는 전 국민의 노동3권이 보장되어 있으나, 노동법에는 아직도 제3자 개입금지조항, 정치행위금지 조항과 같은 독소조항들이 잔재함으로써 악법 개폐의 대상으로 규정되어 있는 형편이고 나아가서 시행령과 시행규칙, 더욱이는 노동부의 지침과 법원의 판결과 같은 현장과 직접 맞부닥치는 곳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헌법의 정신과 규정들이 왜곡 수정받기에 이른다는 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적어도 근대의 혁명기를 지나면서 이제 국가권력은 국민 모두가 갖고 있다는 것, 인간은 존엄과 가치를 가져야 하며 법적 평등을 향유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로 확인되어 헌법에 명문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헌법적 내용들의 배후에서는 여전히 있어서는 안될 전근대적 잔재를 간직하고 있는 지배계층들이 남아 있는 관계로 해서 헌법의 구체적 실현고정 즉 통치기구의 조직과 운영, 기본권의 현실화에서 법문의 진의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확보된 헌법상의 자명한 원리를 실현하고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런 잘못된 지배세력의 의도를 단호히 배제해 버리는 방도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 있어서는 헌법의 수호운동과 악법개폐운동은 같은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기초적 사실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 있어서 장애우에 관계된 법령들은 너무나 빈약한 실정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헌법상 기본권 목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장애우와 관련된 기본법이라 할 수 있는「심신장애자복지법」이 1981년도에야 제정되었고, 장애우 복지의 본질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용에 관한 대책법안인「장애인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이 1989년에야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그나마 1991년도부터 시행하기로 되어 있다. 장애우의 개념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장애우의 권리문제가 이렇듯 늦도록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는 사실이 바로 이 땅의 장애우의 현실적 지위를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직업안정법과 보건사회부령, 의료보험법, 특수교육진흥법, 소득세법, 상속법, 관세법, 우편법, 도로교통법, 해외이주법, 건축법, 도시계획법 등에서 장애우에 대한 배려의 규정들이 산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들이 얼마만큼 장애우의 권익보장에 있어서 진지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또 현실적으로 집행하고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어쨌든 이제는 이러한 현실로부터 현재 관심의 대상으로 높이 떠오른 소위 장애우의 문제를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해결할 것인가가 더욱 시급한 과제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방향에서 이하에서는 소위 장애우와 관련된 몇 가지 생각의 단초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Ⅱ. 장애우 발생의 원인>

 1.「장애우」의 개념
 장애우복지법 제2조는 "이 법에서 "장애우"라 함은 지체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음성·언어기능장애 또는 정신지체 등 정신적 결함으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자를 말한다"고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제정된 대통령령은 제2조에서 장애우의 기준을 의학상의 개념에 입각하여 정해 놓고 있다. 의학이라는 과학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진단만 정확하다면 이 법이 예상하는 장애우는 어느 정도 분명히 분간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음성·언어기능장애우와 특히 정신지체우에 대한 판정은 애매한 경우가 발생하리라 예상된다.

 의학상의 기준에 따라 장애우를 판정하는 것은 법률 시행상의 기술적 요청에 따라 그런다 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법이 만들어질 때에는 순전한 과학상의 사실보다도 일정한 가치실현의 계기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이다. 즉 의학적으로 볼 때 시행령이 정한 기준치에 해당하는 사람이 왜 장애우로 불리워야 하는가 하는 가치에 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낱말의 뜻으로 본다면 장애우란 무능력자를 뜻하게 되는데, 무엇에 대한 무능력인가의 질문이 남는다. 다시 말해서 가치적 기준만 제외한다면 법률과 시행령이 말하는 장애우들도 일정한 일들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왜 그들을 무능력자(disabled)로 규정짓느냐 하는 것이다. 법문을 보면 결국 다수자가 하고 있는 모습으로서의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가 장애우로 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다수자의 일상생활이 규범적으로 보아 꼭 표준이 될만한 행위들인가는 질문도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하다면 다수이기 때문에 옳다는 논리가 되어 다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자의적 횡포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이러한 법은 법 앞의 평등의 원칙에 반하여 위헌·불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미국연방최고법원의 1954년 판례(Brown V. Board of Education of Topeka, 347 U. S. 483)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보호는 사실적이고 실질적인 평등(real and substantial)을 의미하는 것이며,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이란 있을 수 없는 헌법위배적 차별을 뜻한다"고 함으로써 1986년의 Plessy v. Ferquson 사건에서 흑·백인 공학문제와 관련하여 "분리하되 평등한"(separate but equal) 이론을 합헌화시킨 판결을 변경한 예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일정한 집단에서 "분리"시켜 (separate) 처우하고자 할 때에는 그 차별이 합리적인 것으로 정당화(justify)되어야 하고 그러한 합헌적인 것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에 비추어 볼 때 장애우에 관한 본 법률과 시행령의 태도는 어떠한가?

「장애우복지법」제1조에서 보면 "이 법은 장애우의 발생의 예방과 장애우의 재활 및 보호에 곤하여 필요한 사항을 정함으로써 장애우의 편에 서서 그를 돕기 위하여 "장애우"에 관한 별도의 규정을 두고자 한다는 취지를 피력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법문상으로는 본 법의 존속의 정당성이 확보되는데, 문제는 "사실적이고 실질적인 평등"이 얻어질 수 있겠느냐에 관한 판단의 가능성에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자 하면 다시 한번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즉 우리가 만약 특별한 이유 없이 다시 말해서 다수인의 사람들이 가진 신체적 기능과 다른 기능을 가졌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특별한"-이익이든 손해든 간에-처우를 그들에게 한다면 그것은 헌법상의 불합리한 차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있어서 상식은 장애우들에게 무엇인가 잘 해주고 싶은 심정들은 보편적으로 좋고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자기가 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저변에 깔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남을 돕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왜 돕게 되는가를 규명해 보자.

 장애으를 돕는 경우 돕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이 장애우가 하는 것보다 우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도와주려는 것일 것이다. 보다 잘 보고, 잘 듣고, 잘 생각하는 것이 좋은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장애우라고 해서 그런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통계나 사례에서 볼 때 장애우들도 흔히 정상인이라 불리워지는 다른 사람들과 거의 같은 수준에서 욕구체계와 판단체계를 보이는 것을 본다면, 일반사람들이라 해서 특별히 훌륭한 욕구체계와 판단체계를 가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결국 "질"적인 측면에서의 우월성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장애우를 도우려는 마음은 비록 이타적이라 할지라도 대단히 사적인 차원, 어쩌면 자기 우월감의 차원에서 발로한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우월감의 것이 아니라면, 양적 기능의 차이가 분명 일정한 가치실현의 차이를 결과로서 가져오기 때문에 그러한 성과의 측면에서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의 마음에서 나타날 수 있다.

 현실사회에서는 대체로 이러한 마음으로 인하여 장애우복지대책이 요구되기도 하고 또 정당화되기도 한다고 본다. 의학상 수치로써 남보다 "많이"보고, "많이" 뛰고,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곧 남보다 "잘"보고, "잘"뛰고, "잘"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가치가 고도화되고 제일 규범으로 정립된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유경쟁적 시장지배원리에 입각하여 "승자독식"(winners take all)의 원리를 철저히 관철시킴으로서 효율성과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사회가 근대 자본주의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에서 우승권에 들어서야 한다.
 자동차의 판매고를 높이기 위해서 자동차경주대회에서 승리를 쟁취하여야 했으며, 운동화를 많이 팔기 위해서는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얻어야 했다. 근대 올림픽 경기가 비록 세계평화라는 취지와 이념을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라는 표어가 철저히 자본주의적 정신의 반영이라는 점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우 올림픽이 어차피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하지 못하는 것일 바에야 관심 밖의 것으로 낙착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컨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결합된 자본주의사회의 가치에 입각해서 그에 원천적으로 미달할 수밖에 없는 장애우들을 도와주고, 구제해 보고자 하는 발상은 각박한 생존경쟁의 와중에서도 뒤쳐지는 동료들을 그나마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마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개인주의적 배려의 차원에서 사회적 배려의 차원으로 비약할 수 있는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진대는 이처럼 소박한 개인주의적 배려를 그다지 높이 평가할 수 없게 된다. 즉 사회는 철저히 연대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행위는 항상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게 되면 우리는 가치평가 또한 사회적 의미의 관점에서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돕거나 돕지 않는 것도 사회적 관점에서 결정하게 된다. 사회적 관점에 선다는 것은 개인주의적 관점보다도 훨씬 총체적인 공(公)개념을 가진다는 뜻이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장애우와 관련해서도 우리가 장애우를 돕는 것이 사사로운 인정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진정 공적인 의미의 부조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그것은 사회적 의미로까지 승화되어야만 한다. 장애우는 그들이 일상인들과 다른 신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일상인과 다른 기능을 갖게 된 원인이 사회적인 데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장애우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이게 된 데에는 바로 개인들 각자를 포함하는 사회전체가 책임을 져야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듯 사회전체의 연대책임론이 올바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책임규명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불상사는 다시 재발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를 꾀하여야 할 장래의 대책이 요청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불상사를 야기 시키는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2. 장애우의 발생원인
 우리나라의 장애우의 발생원인을 보면 후천적 장애가 적어도 전체의 90%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85년 인구보건원의 장애우 실태조사보고는 장애의 발생원인은 대부분 후천적 요인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전체장애우 중 3분의 2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지체장애우의 경우는 96.2%가 출생 후 각종 질병, 산업재해, 교통사고, 안전사고로 인한 것이다. 산업재해발생률과 교통사고 발생률이 각각 세계 1위로 알려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장애발생 원인에 있어서도 교통사고와 산업재해가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산업재해의 경우, 87년에는 82.536개 사업장에서 142,596명이 재해를 당하였고(1,761명 사망, 25,244명 장애), 88년에는 101,445개 사업장에서 142,321명이 재해를 당하였다(1,925명 사망, 26,890명 장애). 결국 전국적으로 하루 390명이 산재를 당하고 하루 5명 이상이 산재로 인하여 목숨을 잃고 74명이 장애우가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통계는 5인 이상 사업장만을 대상으로 공식집계된 숫자이므로 실제 발생건수는 이보다 2내지 3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보통 장애원인의 약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교통사고는 1977년 55,058전이었던 것이 87년에는 176,315건으로 10년 동안, 3.2배 증가, 연평균 12.3%씩 증가해 왔다. 그 결과 같은 기간에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수는 77년 5,048명으로부터 87년 8,705명으로 연평균 5.6%가 늘어났고, 부상자는 11.1%씩 증가해왔다. 이런 증가추세는 88년과 89년에는 사망자만 한해 1만명을 넘어서는 정도로 더욱더 큰 증가폭을 보여 주고 있다.

 산업재해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조에 따르면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근로자의 부상, 질병, 신체장애, 사망을 말한다." 질병의 경우는 특별히 직업병이라 부른다. 그런데 산업재해와 직업병이 유난히도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의 근로자가 부주의해서거나 허약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열악한 작업환경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이윤추구에 급급한 기업주의 안전의식부족, 장시간 노동과 작업강도로 인한 근로자의 과로, 저임금 그리고 능률급제도의 문제성, 안전교육과 휴식시간의 부족, 행정감독미비 등이 산재와 직업병 발생의 근본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말했다시피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일념으로부터 저임금에 기초한 최고의 이윤확보에 연연하다보니 이른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산재에 의한 장애우는 결코 개인적 책임에 머무를 수 없으며, 반드시 사회적으로 그 책임규명과 그 보상 및 대책이 강구되어야만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교통사고의 경우를 보자. 흔히 교통사고의 원인별 분석은 운전자의 법규위반(87년의 경우 93.49%)을 주원인으로 보고 있다. 이 경우에도 일단은 운전자의 책임이 크다는 점은 밝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전자 개인에게만 전적으로 귀책하는 태도는 역시 잘못이다. 잘 알려지고 있듯이 영업용 택시기사가 피용자로서 겪는 애로사항은 불가피하게 교통법규를 위반하게 한다. 이것은 결국 택시회사와 기사와의 노동관계의 문제로 대치되며, 이로부터 당하는 피해자는 또 다른 노동재해의 산물로서 해석된다. 영업용택시나 용역 차량의 경우는 제쳐놓고 개인 승용차의 경우에 의한 피해도 해석은 마찬가지로 나온다. 도로교통법이나 교통안전법, 자동차관리법, 자동차안전기준에 관한 규칙 등과 같은 비교적 가치 중립적인 법규들은 교통사고 처리특례법과 같은 특징계급지향적인 법령의 도입과 함께 그 기본 틀을 상실하고 만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은 대체로 차량증가추세에 접어드는 시점에 맞추어 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자가운전자의 보호를 직접적으로 염두에 두고 만들어 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례법 제1조의 규정이 "이 법은 업무상 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교통사고를 일으킨 운전자에 관한 형사처벌 등의 특례를 정함으로써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의 신속한 회복을 촉진하고 국민생활의 편익을 증진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고 있듯이 이 법은 도로교통사고 발생시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특례법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같은 법 제32조가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한다든가 제4조가 보험 등에 가입된 경우 운전자에 대한 공소제기를 제한하는 규정 등은 이를 더욱더 명확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교통량이 많아짐으로 해서 사고가 많이 발생하게 되고 그에 따라 일반 형사범으로 처벌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서 이와 같은 특례를 만드는 것까지는 용인될 수 있는 사유가 되지만, 이것이 과연 운전자 일반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특별히 자가운전자의 교통범죄에 대한 면책을 위해서 만들었느냐는 따져보게 되면 대답은 명확해진다. 더욱이 이 특례법이 만들어지는 1981년에는 국내 대기업에 의한 소형자동차가 생산 보급되는 시점이었고, 소형자동차 보급은 자가운전자를 불가피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특례법의 재정취지는 금방 밝혀지는 것이다. 실제로 그 이후부터 국내의 자동차 보급은 나날이 달라져 오늘과 같은 심각한 교통마비 상태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운전자보호-실제로는 자가운전자 보호, 더 나가서는 자동차생산 대기업의 보호-와 도로교통질서라는 이유로 엄청난 인명이 손상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산업재해에서만큼 계급간 대립의 희생이란 양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 피해자는 대기업의 자동차 판매전략의 희생물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연간 1만명의 사망과 30만명을 육박하는 부상자를 내는 대규모 전쟁을 전국도로망에서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 간의 경제전쟁의 성격을 띤다는 것은 사고발생 후 자동차보험과 의료보험을 위시한 사보험과 사회보험의 전체계에서 혜택이 돌아가는 처리과정과 경찰·검찰·재판단계에서 행해지는 이익과 불이익의 분배과정을 살펴볼 때에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아무튼 교통사고에 의한 장애우도 "사회적 의미"를 진하게 품고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해서 출생 장애의 주요원인인 산업재해와 교통사고의 사회적 의미성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이외의 주요 출생 후 원인들로서는 전쟁, 혈압, 열병과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출생 전 원인들로서는 유전, 부모의 전염병, 약물중독, 난산 등이 꼽히고 있다. 그러나 유전이나 약물중독, 전염병들도 오늘날 원자핵에의 노출, 환경공해, 알콜·마약중독, 생물·화학무기, 그리고 직업이나 생활고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등이 주인이라고 보면 장애의 원인은 거개가 사회적인 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망이나 질병 그리고 장애가 자연발생적 기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은 옳지 못하다. 그리고 이들의 발생을 개인적 차원으로 보는 것은 틀리진 않지만 좁고 폐쇄된 시각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바람직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올바르고 총체적인 시각문제에 접근해야만 그 해결을 쉽고 정확하게 완전하게 마련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글은 법무부 장애인복지법제(90.12)에서 발췌한 것으로 2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글/강경선 
 

작성자강경선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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