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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논단] 장애문제의 사회구조적 고찰(2)

본문

(Ⅲ. 장애우 복지제도와 그 문제점)

 장애발생의 사회적 기원과 책임의 이론은 장애우에 대한 대책 또한 사회적으로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장애는 자본의 자기논리의 관철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이면서도 장애는 자본이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는 노동력으로 남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장애란 다른 일상적인 노동자와 같이 평균적인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노동무능력자 곧 생활무능력자의 의미를 지니는 까닭에 그 원인을 야기한 자본은 이들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생활배려를, 그리고 가능한 경우에는 고용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필수적 책임으로 떠오른다. 말하자면 장애우에 대한 사회적 보장을 마땅히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아주 단순히 말해서 장애우의 인구가 전체의 10%라 한다면 우리나라의 예산의 10%는 최소한도로 이에 대한 보장비용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논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국가의 재정과 예산의 10%는 최소한도로 이에 대한 보장비용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논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국가의 재정과 예산의 바탕이 장애우의 희생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이런 논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복지비 전체가 예산의 10%를 넘지도 않고 있는 성질이라면 장애우에게 돌아올 몫이 얼마만큼이 될 것인가란 뻔한 사실이다. 그에 비하여 국가재정지출의 30%를 상회하는 국방비와 20%에 가까운 경찰·정보기구 등의 국가통제비용은 우리사회가 아직도 복지사회는커녕 치안유지에 급급한 경찰국가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보장제도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분야가 바로 장애인 복지분야이다. 81년 세계장애우의 해와 더불어 유엔의 권고로「심신장애자복지법」이 제정되고 그나마 별 실효성 없이 여태까지 오게 된 것이다. 장애우 복지의 실정은 장애우를 위한 사회복지시설 현황과 시설 근무자의 근무 여건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마치 헌법에서 기본권과 통치기구와의 관계에서  처럼「심신장애자복지법」에서 장애우의 인권은 구체적인 복지시설의 조직과 운영에 의하여 판가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애의 발생 원인으로부터 장애우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인식한다면 당연히 국가에 의한 우선적 지원과 배려가 뒤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행 사회복지 사업은 민간에 위탁되어 추진되는 형태를 주로 취함으로써 자연히 시설에 대한 정부 정책의 빈곤과 시설 내에서의 연구실적 부족, 시설 근무자에 대한 지원 부족이라는 악순환의 늪에 빠져들게 되어 결국 장애우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찾아보기가 힘들게 된다. 사회복지시설수용자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보조도 생활보호법상의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한 보조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장애우 복지시설은 복지 개념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난민 수용 구조에 머물고 있다. 이와 같은 시설 지체는 엄연히 자주적 권리의 주체이어야 할 수용 장애우들로 하여금 수용기간 동안 수혜자 내지 종속 체로서만 존재하게끔 만들고 있다. 현재 600여개의 시설에 8,500명의 근무자가 있는데 이들의 임금 수준은 일반 근로자의 50%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나마 수당·호봉제도도 제대로 시행하지 않을 정도로 사회적 관심에서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의 근로시간을 보더라도 12시간 근무가 15.7%, 24시간 근무가 45.5%로 나타나 이미 정상적인 근무 형태를 벗어난 것임을 짐작케 한다. 마땅히 국가의 책임이어야 할 사업을 또다시 개개인의 무료봉사에 기초한 복지 사업으로 돌려 사적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안일한 태도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국민들 상호간에 자발적 참여로써 이런 일이 행하여진다면 그것은 매우 경하할 일이겠지만, 지금과 같이 국민적 무관심 속에 전근대적 방식에 의한 민간차원의 복지 사업을 방치하게 된다면 시대착오적인 치외법권의 지역으로 둔갑하는 것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권위주의적 시설 운영이 사회의 방심 속에서 이루어질 때 시설에 수용된 장애우들의 인권을 다시 한번 사회에 의해서 짓밟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심신장애자복지법」은 가장 필수적인 복지시설에서부터 시작해서 장애우 조사와 등록, 재황상담, 고용의 촉진, 보장구 교부, 편의시설의 설치, 시설의 우선이용, 보호자에 대한 부양 수당의 지급 등에서까지 어떤 하나도 실효성을 거둔 바가 없다. 그 가운데서도 장애우의 실질적 복지 대책 중 가장 중요하다고 인정되어온 고용의 촉진을 보다 의욕적으로 추진하고자「장애인고용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다. 취업보장은 장애우 인권보장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장애우들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까지 고용대책법률의 제정을 촉구해왔던 것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우가 내포하는 의미는 경쟁적 노동력의 상실과 제한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장애우 각자가 보유하는 능력만큼의 노동력을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은 흔히 구호로 외쳐지는 "장애우의 완전한 참여와 평등"의 가장 본질적인 전제조건을 이룬다고 보인다. 새 법률은 ① 국가, 지방자치단체에 장애우 직업재활 조치를 강구하고, 장애우의 고용과 직업 안정을 도모할 의무를 부여하고, ② 국가차원의 장애인에 대한 직업훈련과 적응훈련을 실시하며, ③ 공무원의 경우, 정원의 2/100 이상에 해당하는 장애우가 고용되도록 노력하며, ④ 일반 사업주는 근로자 총수에서 적용제외율을 감안하여 1/100이상 5/100이내의 범위 안에서 일정비율 이상의 장애우를 고용하도록 하며, ⑤ 고용촉진 장려를 위하여 일정률 이상의 장애우를 고용하는 사업주에게 고용 지원금을 지급하는 한편, ⑥ 지원금과 보조금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일정률 미만의 장애우를 고용하는 사업주로부터는 장애우고용 부담금을 징수하며, ⑦ 장애우고용촉진공단을 설치하고, 기금을 설치토록 하는 것을 그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법률이 얼마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 법률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와 대기업에서 솔선 모범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심신장애자법도 그래왔고, 또 많은 사회보장 관계입법이 실제로 보여 주었듯이 이 법 또한 유명무실하게 남게 되거나 혹은 비장애우를 위한 장애우 법으로 전락하지나 않을른지 우려된다. 이러한 우려는 그저 막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사회의 지배 구조에서 볼 때 그러한 우리는 오히려 논리적 귀결점인지도 모른다.

 사회보장제도는 서구의 경우 19세기말 독점자본주의의 성립과 함께 실시되었는데 그것이 정착 일반화된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과 2차 대전 직후이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 자유방임국가가 그 태도를 바꾸어 적극국가·복지국가화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주지되고 있듯이 복지국가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나 성공을 거둔 것이지 후발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성과를 보지 못한 그런 것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계속해서 소외와 착취를 강요받아온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층으로부터의 정치적 요구가 드높아짐에 따라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높이고, 생활 여건을 향상시켜 줌으로써 자본주의의 체제를 유지코자 하였던 것이 복지국가의 핵심이었던 까닭에 선진자본국가는 일찍이 제국주의적 시장확장을 통하여 제3세계의 희생을 뽑아 자국에 투여함으로써 일단 분쟁을 무마할 수 있었다. 선진자본국가가 걸어갔던 이러한 방식은 후발국가에게도 하나의 모델로 비쳐지기는 하였지만 결코 달성할 수도 또한 그리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판가름 받기에 이르렀다. 사회보장의 취지는 살려야겠지만, 약소국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국가 이기주의적 사회보장 방식은 세계평화의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른 것이다. 50∼60년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사실을 자각한 제3세계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정치와 경제가 위기로 몰리기 시작하였다. 제3세계로부터의 젖줄이 차단될 때 국내의 정치적 분쟁은 재연될 것이고 그것은 곧 체제의 위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전후 미국을 주심으로 한 서구의 경제연대체제는 이제 집단적·지역적으로 제3세계와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항을 모색하여 왔다. 그렇기 때문에 제3세계에서의 사회보장정책은 서구의 모델로서는 원천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비하여 이미 종속구조가 심화된 상태에서 제3세계의 국가들이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태도는 종속으로부터의 탈피, 즉 자주화가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지 않고서는 제3세계의 사회보장 정책은 영원히 서구의 그것보다 뒤쳐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사회보장 제도를 보자. 제3공화국이래 줄곧 외쳐져 왔던 경제 성장의 구호는 제5공화국의 시작과 함께 "복지국가건설"로 대치되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사회보장 제도가 전보다 나이진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86년 9월 지역의료보험 확대 실시, 국민연금제도 실시, 최저임금제도입 등 이른바 "3대 복지정책"이 발표되었고 6공화국 수립을 전후로 하여 1988년 농촌지역 의료보험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국민연금 제도가 실시되었고 1989년에는 도시지역 의료보험과 최저임금제도가 이 땅에도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국민과 요부조 대상자를 위한다기 보다도 재벌이나 의료인 등 사회적 기득권 층의 이익이 우선 반영된 복지정책들인 까닭에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서민의 희생을 더욱더 요구하는 부익부의 모순을 시정하고 재분배의 효과라도 달성해야 할 사회보장제도는 결국 사회적 안정계층을 더욱더 안락하게 해 주기 위한 제도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시정요구가 드높은 실정이다.

 이처럼 사회보장제도의 가장 기본적 제도라 할 수 있는 분야에서도 명목화 된 사회보장 정책의 현 실정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훨씬 배후의 과제로 밀려나고 있고 또한 정치적 요구도 활발하지 않은 장애우 복지제도가 앞으로 얼마만큼 실질적 내용을 담아갈지는 미지수이다. 어찌 보면 91년부터 시행되는 고용촉진법부터 사실상 장애우 복지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른지도 모른다. 이제까지는 정말 관심 있는 사람들간의 애정 어린 사업으로 추진되어 왔던 만큼, 이것을 사회적 사업으로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고용촉진법의 시행시기를 우리나라 장애우 복지 원년으로 잡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앞서서 어떤 관점에서 장애우에 관한 문제를 접근 할 것인가를 서로간의 의견을 통하여 모아갈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하에서는 헌법의 관점에서 장애우의 지위를 어떻게 규정짓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Ⅳ. 국민주권과 장애우>

 장애우란 남과 마찬가지 정도의 경쟁적인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한 사람을 뜻한다고 볼 때 장애우에 대한 개념 규정에 있어서 중요한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관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느냐에 관한 사실적 인식은 우리가 해야 될 규범적 가치의 정립과 실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때 최초로 맞부닥쳐 나오는 부분이 국민주권에 관한 내용이다.
 헌법 제1조에 천명된 국민주권은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다 자립된 인간으로서 인격을 발현하여야 한다는 최고의 규범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그에 따라 모든 국민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기본권 보장을 받아야 할 주체라는 것도 명문화하고 있다. 그에 따라 모든 국민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기본권 보장을 받아야 할 주체라는 것도 명문화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 이와 같은 국민 주권조항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기본적 권리들은 이를 억압하는 사회적 세력에 의하여 무력화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의 최고 규범적 가치들을 짓밟고 있는 이러한 사회적 세력의 정체를 규명하는 작업이 대단히 중요하다. 개개인의 주권자로서의 자격성을 억압하고 왜곡시키는 현실적 힘은 무엇인가?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사회과학과의 분석의 성과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제까지의 사회과학은 우리 국민들이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장애를 초래하는 요인을 가장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들고 있고, 이와 더불어 제국주의적 외세, 그리고 조국의 분단들을 꼽고 있다. 이러한 설명을 최근 사회과학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사회구성체 이론이 집약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사회구성체 이론은 어디까지나 사회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사회과학의 범주의 것이기에 그 세부적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러나 법학에서는 비록 완성된 사회과학의 이론이 아닐지라도 규범의 실현을 위해 도움이 돌 수 있다면, 설득력을 가지는 한에서는 그를 원용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실제로 국민 개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가로막는 요소가 헌법상 보장된 자기의 양심상의 결정, 표현, 집회, 정치적 참여 등 전반적인 기본권 실현 과정을 왜곡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권력이나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 경제력의 위협이고, 취업해고나 승진 과정에 있어서의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들이라는 점을 또한 잘 안다.
 그런데 이렇게 다가오는 자유의 재 간섭 요인들이 어디에서 발생하는 가를 추적한다면 그것이 자본의 논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밝혀진다. 자본의 논리는 비단 한 국가 내에서만 관철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결국 이 사회의 자본의 흐름은 국제적인 자본의 흐름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과 그러한 한 어느 정도 대등한 자본으로 무장된 서구 선진국가와 그렇지 못한 위치에 처한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논리는 분명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서구 제국주의가 동양에 진출하고 그를 수용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서 점령한 것과 2차 대전 후 조국이 분단된 것도 자본의 논리의 결과로 설명된다. 그리고 남한 내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제1공화국이래 현재까지 파행적인 헌정이 반복되고 있는 것도 자본의 논리에 의한 사회적 기본권으로서의 노동 3권이 여지없이 짓밟히는 이유도 그것이 자본의 지배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쉽게 이해된다. 이런 맥락에서 산업재화와 도로교통사고 세계1위라는 현상이 발생하고, 그 결과 장애우 숫자 또한 폭증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우의 문제는 전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산이라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우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 냄에 있어서 우리는 조국이 바로 분단 조국이라는 지체부자유의 장애국가라는 사실과 결부시킬 필요가 있다. 장애우와 분단조국이라는 두 개의 관념은 단순히 비유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사실적 관계에서 같은 선상에서의 문제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분단조국의 해결이 곧 장애우 문제의 해결이요, 장애우 문제의 해결이 조국통일이라는 등식화가 성립된다. 장애우는 이처럼 해방의 당위성을 요청하고 있다. 
 장애우의 복지는 사회해방의 관점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러한 당위적 관점보다는 자본 논리가 철저히 지배하고 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사회해방을 위해서는 자본 논리를 더 큰 규범적 가치에 의해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규범적 가치는 무엇인가? 이것은 최고 규범인 헌법의 내용에서 발견해야 한다. 현행 헌법은 제1조 국민주권 조항이 함의하는 민주주의의 원리와 제23조 재산권 보장을 위시로 한 제9장 경제조항들이 암묵적으로 예정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원리라는 자본주의 원리는 상호 경쟁적 성격을 띠게 되므로 우리는 이 둘 중에서 헌법이 추구하는 보다 우월한 하나의 규범적 원리가 무엇인가를 확정지음으로써 헌법의 최고 규범성을 확립시켜야만 한다. 이중기준의 원칙은 편의성의 원칙으로서 종국적으로는 불평등하고 불완전한 원칙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을 돌아볼 때 헌법 제1조가 이념적 성격은 강하면서도 내용적 규제력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자본의 논리가 오히려 현실지배력을 갖고 헌법의 모든 조항들이 해석과 적용의 지도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민주적 통제권을 벗어난 자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반가치적 물질적 우상이 되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 욕망을 자극·유혹하면서 마침내 이 사회에 반인간적 질서를 수립하는 것으로 종결짓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대비시키는 경우 우리는 민주주의의 자본주의에 대한 우위성을 논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가온다. 민주주의의 헌법적 근거는 헌법 제1조 제1항이다. 동 조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정언적 사실명제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근대국가의 성립이래 너무나 자명한 명제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아마도 절대왕조 하에서 국민주권의 신봉자들 같으면 군주 주권이 아니라 국민주권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당위론적으로 역설하였겠지만, 반봉건시민혁명의 결과 국민주권이 형식적으로 확보된 마당에는 이제 사실명제로 그 표현을 공고히 천명한다 해도 무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규정의 형식적 정당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하더라도 내용적·실체적 측면을 보는 경우에는 아직도 국민 주권은 미완의 것이라는 점이 발견된다. 진정한 국민의 주권성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아직도 당위의 여지는 남아 있는 것이며, 그러한 한에서 헌법이라는 규범에 과제로서 포함되어 있다고 볼 것이다. 그래서 헌법 제1조를 내용적으로 다시 읽으면,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 있어야 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로 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자칫 간과하기 쉬운 헌법상의 이념과 현실, 당위명제와 사실간에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의해 보자는 취지에서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완전한 주권의 현실을 보고 있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국민이 얼마나 있는가, 현실에는 많은 영역에서 똑같은 국적을 가진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 한낱 장식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그런 계층이 존재한다. 이들이 이념적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래에도 현재의 법체계가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한 결코 그런 지위를 누릴 수 없다고 볼 때 그는 이제 주권자라 할 수 없다. 주권자가 아닌 국민이 있고 이를 방치하는 한 그 국가는 더 이상 국민주권국가일 수 없고 특정계층을 위한 국가로 전락한다. 오늘날 이렇듯 헌법상 국민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현실에 있어서 박탈당한 계층을 가리켜 민중이라 한다. 민중계층을 온전한 주권자로 복권시키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국민 주권 국가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 제10조 후단에서는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하여 민중에 대한 주권자로서의 복권을 노력하자는 규범을 천명함으로써 체계적으로 국민 주권을 지향하는 국가의 성격을 확보하고 있다. 이렇듯 민중이란 국민의 "실체적"(material) 개념이다. "이념적 동질성"을 전제로 하는 추상적 개념인 "국민" 속에서 실제상으로 그리고 사회구조적으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소외를 당하고 있는 "민중"에 합당한 복권의 실현이 헌법이 천명하는 국민주권의 실체적 내용을 이룬다. 다시 말해서 국민 주권이라는 헌법상 이념의 현 실태가 다름 아닌 민중주권인 것이다. 이에 따라 민중권력의 회복운동은 국민주권의 실현이라는 헌법 수호의 의미를 지닌다. 헌법을 해석하고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만 하는 국민주권의 원리는 현실에 있어서 국민주권의 내용적·실체적 구현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고, 이것은 다른 말로해서 "민중지향적인 주체적 해석의 원리"야말로 헌법해석의 중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헌법실현의 문제에서 불가피하게 도출되는 민중과 장애우 개념의 내용적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사회적으로 소외 받는 계층, 즉 민중은 사회적 의미의 장애우(disabled)이다. 그런데 민중은 장애우인 현실에 예속적으로 타협하지 않고 본래적 주권자로서 앞으로 참다운 국민 주권의 실현을 담당해 나갈 주체로서의 "온전인"(integrity)이라는 규범적 의미 또한 담지하고 있다. 장애우는 사실상 온전인인 것이며 이 명제의 사회적 실현은 운동의 계기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마땅히 자기에게 귀속될 바를 현실화시키는 것, 이것은 개인적이자 사회적인 동시에 법적인 의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장애우와 이 사회의 국민들은 장애우 복지대책을 더 이상 사적이고 개인적 차원에서 고민하고 해결하는 데 머무르지 말고, 사회적이고 공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는 길을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Ⅴ. 장애우 해방과 유토피아>

 실체적 국민주권의 실현, 조국의 통일, 자주적 주권의 확립과 함께 사회의 중충적 모습이 해결되고 사회의 해방이 이루어지는 날 장애우의 해방은 그와 함께 실현될 것이다.
 흔히 유토피아는 이상향의 세계로서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땅(a-to-pos)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볼 때에도 유토피아는 반드시 현실화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장애우인 민중이 온전성을 회복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미 개인적 차원에서의 온전성을 찾아나간 소크라테스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아테네인들로부터 atopotatos라고 불렸다고 한다. "헤아릴 수 없는 인간"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그의 사상과 행동이 대단히 자유로왔음을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다 하겠다. 그는 적어도 개인적으로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확보했고, 또 논리적 구속성으로부터 자유를 확보했고, 또 논리적 구속성으로부터도 자유로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atopotatos로서의 개인적 유토피아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더욱 중요한 문제로서 사회의 해방을 염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더 이상 모범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잘 알려진 인물을 통하여 우리는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단념해서는 안 된다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이웃과 함께 이 사회의 자유와 해방을 열어 가는 것으로까지 높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양과 늑대가 함께 놀며, 사자와 어린 아이가 함께 어울리며, 절름발이가 사슴같이 뛰노는 그런 시대를 주체적으로 앞당겨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까지의 학문의 업적을 통하여 밝혀진 바에 따르면 무엇이 사회적 정의인가는 대체로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일은 사회적 정의를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가 문제가 될 것 같다. 사회과학적 진리는 현실 속에서 입증될 때만이 그 진리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사상적 대립을 통일시키며 구체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정의로운 사회를 현실화시키는 것이 마지막으로 진리로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진리를 우리는 주체적 진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주체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가 밝혀놓은 객관적 진리를 현실적으로 형성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계기의 것이다. 주체적 진리는 한마디로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대는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제기된 최고의 명제들, 즉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과 가치, 세계평화 등을 완성 짓고 새로운 사회로의 진입을 기다려야 할 시대이다.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제시된 자유, 평등, 박애의 세 개의 가치들은 엄청난 피를 수반한 민중들의 투쟁에 의하여 실현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는 두 동강이로, 또 여러 동강이로 나뉘어, 민족과 민족이 국가와 국가가, 그리고 형제와 형제가 반목과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의 해결은 참된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서만이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장애인 해방은 이런 엄청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글/강경선
 

 

작성자강경선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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