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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아픔과 원한으로 일그러진 75, 소록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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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소록도로 들어가는 녹동항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소록도 해수욕장까지 생겨서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카메라와 해수욕 도구들을 목에 걸고 소록도 행 배를 타기 위해 녹동항에 진을 치고 있다. 이들 중 누군가에게 소록도가 어떤 섬이냐고 물었더니 "저기에 사람이 사나여?" "휴양차 피서차 올 수 있는 곳으로는 그만이에요."라고 대답한다.
 전라도 산맥을 뚫고 산허리를 가로질로 굽이 굽이 나 있는 도로를 한참 달리다 보면 고흥군 녹동항에 이른다. 고흥반도 육지의 종착점, 예로부터 양항(良港)으로 알려졌다던 녹동항구 주변은 어설픈 항구도시의 비릿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막 들어서기 시작한 현대식 여관 건물과 커다란 수족관을 들여놓은 횟집, 고기잡이배가 금새 실어 나른 듯 팔딱거리는 생선을 싼값에 매매하는 어물전이 즐비하고, 싱싱한 횟감과 생선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에 소록도 해수욕장을 찾는 인파들이 가세하여 소록도행 여객선 역시 만원이었다.

 녹동항에서 소록도까지는 불과 600m, 배를 타면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 한 눈으로 보이는 소록도의 빼어난 경관을 마주하며 배가 가까워질수록 관광객들은 탄성을 지른다. 해수욕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나 감상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하고 만족한 휴양지이자 피서지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져 가는 소록도. 거기에 정말 "사람"이 살고 있을까. 마음 편하게 해수욕을 즐기며 더위나 식히러 한가롭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일까. 
 섬 모양이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소록도. 그러나 소록도의 공식 명칭은 "국립소록도병원"이다. 그러니까 소록도는 바로 나병 전문 진료병원이며, 그곳 사람들은 모두 입원 상태에 있는 환자들이다. 많게는 70년까지, 보통 20∼30년 이상 장기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이 대부분이고 이들의 연령이 60세 이상의 고령인데다 소록도 곳곳에 부락으로 나뉘어 살고 있어서인지 "병원"이라기보다는 갈 곳 없는 노인들이 수용되어 있는 "양로원 시설"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였다.

 "나병은 낫는다" "나병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동정 어린 구호에 그칠 뿐, 한평생 혹은 반평생을 세상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천형의 질곡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소록도의 노인들이다. 그뿐이던가. 일제 암흑기를 거치면서 노역과 굶주림 속에서 숨져 간 환자들은 얼마나 많았으며, 지금의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소록을 만들기 위해 피눈물나는 고생에 젊음을 송두리째 앗기고 평생을 갇혀 살아야 했던 노인들은 또 얼마인가. 앞도 보이지 않고, 손가락은 잘려 나갔으며, 의족을 한 다리에 걸을 수도 없는 사람이 수백 명, 흉측하게 일그러진 소록도 노인들의 신체만큼이나 소록도 뒤에 숨겨진 역사 역시도 일그러진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다. 소록도 노인들의 삶의 역정과 아픈 역사의 장을 조심스럽게 펼쳐 본다. 소록도 설립의 역사적인 배경과 동기, 일제시대 소록도 강제 노역의 실상을 심전황의「소록도 반세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병원 설립 필요에 직면한 일제 총독부 당국은 그 후보지를 물색 중 이 섬을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육지가 가깝기는 하나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기에 강제 격리에 알맞은 곳이요. 환경이나 기후 등도 요양소로서의 최적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이 나병원 설립을 계획하기에 이른 동기로 몇 가지 사회현상을 들출 수 있다.
 근대적 의학을 바탕으로 설립된 나병원의 효시는 1909년 미국의 의사이자 선교사인 윌슨이 광주 봉선리에 세운 나병원이다. 동년에 얼빈이 부산에 세웠는데 1911년 매캔지가 인수하여 육성하였고, 1913년에는 역시 의사이자 선교사인 푸렛쳐가 또 대구에 세웠다.
 외국인에 의한 일련의 나병원 설립에 총독부 당국은 자극을 받았고, 더욱이 일본 황실에서는 구라사업에 별다른 열의를 갖고 국내 나기관에 하사금까지 내려주고 있는 판국인지라 광주를 비롯한 대구 부산 부민들의 불평과 당국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다. 오랜 인습과 전통으로 인해 나환자 한사람만 봐도 기겁을 하는 판에 병원이 생겨 숨어 있는 환자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니 병원 소재지 부민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용능력에 한도가 있는 지라 병원에서는 입원 지원자들을 다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고 입원이 안 된 환자들은 입원이 가능할 때까지 한사코 버티어 노변 아무데나 주저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래저래 총독부 당국으로서도 병원 설립은 불가피한 과제가 된 듯하다. 1916년 일제는 수백년간 살아 온 소록도 원주민들을 내쫓았고, 전국 각지에서 오물 청소하듯 환자들을 강제 이송하여 절해고도에 쓸어놓고 철권(鐵拳)관리로 혹사했다.
 당시 일인들은 나환자를 4만명으로 추산하고 40년 후면 한국의 나병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는 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궁핍과 혹사에 시달려 매일 평균 3명씩 죽어갔으니 1개월에 90명, 1년에 1,880명, 10년이면 10,800명, 40년 후면 43,200명이 죽어 없어진다는 결론에서였는지 모른다.

 1916년 정원 100명을 모아놓고 "자혜의원"으로 시작된 소록도는 1945년 해방직전까지 아리까와, 하나이, 야사와, 수호, 니시기 등 5대에 걸친 일본의 원장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약 30여년 동안 일본의 원장들의 통치하에서 소록도 원생들은 신사참배, 동상참배, 애국반 회의, 시국강연회 참석 등 일본식 생활양식을 강요받았고, 가마니 짜기, 송진 따기, 숯굽기 등의 노역에 시달려야 했으며, 국방헌금, 귀금속품 헌납, 금품수탈 등 가진 것을 다 빼앗겨야 했다. 세 차례에 걸친 확장 공사의 공원 매립공사, 도로 공사, 간척 공사가 1930년 이후에는 150만명 전 도에 걸쳐 실시되었고, 수용인원이 무려 6천명으로 늘어나 가히 세계 최대 규모의 요양소로 대비약한 것이다.
 일본식 형무소를 본따서 지은 감방에는 부당한 박해와 처우에 항거하는 원생들이 잡혀 들어가 구타를 당했고, 그곳에서 아예 시체가 되어 나오거나 장애를 입고 나온 원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큰 법당을 방불케 하는 종각과 다도해를 항해하는 선박의 길잡이를 위해 등대가 세워졌고, 화장을 끝낸 유골이 안치되는 만령당(납골당)까지 세워졌다. 1940년 4월, 선경(仙境)같은 정취의 아름다운 공원이 완공되기까지 중노동의 혹사로 매일 3∼4명이 죽어간 공포와 저주의 섬으로 악명을 드러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원장으로 바뀌긴 했으나, 1946년 한해 동안 무려 70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는 기록은, 일제시대의 중노동과 굶주림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여실하게 드러내 주는 반증이다.

 75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소록도의 명칭도 설립 당시의 자혜의원에서 소록갱생원, 중앙나요양소, 소록도갱생원, 국립나병원(1968∼1981), 국립소록도병원(1982∼현재)으로 개칭되었다.
 1947년 한국인으로서 초대 원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형태 원장으로부터 짧게는 1개월, 길게는 11년 9개월까지 재임한 선정식 원장, 1986년에 취임한 현재의 손태휴 원장에 이르기까지 해방 후 46년 동안 18명의 원장이 부임하였으나 "아무런 말썽 없이 깨끗이 떠난 원장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약육강식의 역사가 점철되어 왔다"고 소록도의 한 할아버지는 증언한다.
 지금 소록도에는 1,440명(8월 1일 현재)의 환자가 살고 있다. 남자 환자가 768명, 여자 환자가 672명이다. 소록도 병원에서 매년마다 펴내는 자료집「소록도」90년도판 기록에 의하면 15세에서 25세까지가 10명 미만, 30부터 40세까지가 90여명, 45세에서 55세까지가 330여명, 60세에서 90세까지가 950명, 90세 이상이 10여명의 분포를 보인다.
 한때 6천명이 넘는 인원이 수용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 이후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한 해에 150여명이 넘는 환자들이 퇴원하고 있다. 물론 이들 중 몇 명은 자가 치료를 위해 가정으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음성 나환자들의 자활터인 정착촌으로 빠져나간다. 무엇보다도 70% 이상이 60세 이상의 노인 인만큼 고령화 추세에 따른 사망자의 증가가 인구의 감소를 현저하게 한다. 90년 한해만 해도 108명의 환자가 소록도에서 사망하였다.
 소록도에 거주하는 환자 대부분이 10대∼30대에 발병한 환자들로 30년 이상 입원해 있는 환자들이 3분의 2가 넘는다. 900명 이상이 무학자이며, 국졸이 230여명, 중·고졸은 80여명으로 많은 수의 환자가 일제시대∼8·15∼6·25를 소록도에서 체험한 사람들이다. 젊은 시절 발병한 사실을 알았으나 치료약도 없고 드러내놓고 병원을 드나들 수 조차 없는 상황에서 남몰래 고쳐보겠다고 소록도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고, 가족들조차 냉대하는 가정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문전 걸식하며 떠돌아다니다가 강제로 붙잡혀 온 사람들도 상당수다.
 병이 낫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악화되어 더 이상은 원상태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투성이의 흉상과 망가진 신체를 가지고 소록도에서 반평생을 산사람들, 가족들과는 영영 단절된 채 소록의 하늘 아래서 먼 고향 쪽 하늘을 쳐다보며 하루에도 수십 번 눈물을 훔치며 향수병을 앓는 사람들, 바로 이 노인들의 군상이 소록도의 실상이다.

 정OO씨(78세)는 스물두살 때 소록도에 들어와 올해로 57년째가 된다. 스무살도 채 못되어 병세가 드러났고 1935년도에 경찰에 의해 강제로 끌려왔다.
 "당시를 생각하면 끔찍해. 새벽 4시 반에 나가서 밤 9시까지 노역에 시달렸지, 지금 중앙공원이 있는 자리에 벽돌 공장이 있었는데 하루에 1,000∼1,500장씩도 찍어내어 3년 만에 확장공사를 끝냈으니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의 공원 자리는 우리의 손으로 산을 깎아 만든 것이야. 좁은 방 한 칸에 20명씩 칼잠을 재우고, 제대로 일을 못하면 굶기가 일쑤였어. 죽어라 일만했던 일제 시대, 나라 없는 설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해?"
 정씨는 의족까지 한 다리로 걷고, 손가락 없는 뭉퉁한 주먹손에 고무줄을 감아 거기에 숟가락을 끼워 식사를 한다. 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정할아버지는 작은 책상 하나를 마련해 놓고 성서와 한문으로 된 서적, 잡다한 잡지책까지 펴놓고 있었다. 

 "배 곯면 커지는 병이 나병이여. 나가 열아홉살 때 여기 들어왔는디 시상에, 와서 보니 새끼손가락만 조금 꼬부라진 나보다 더한 중증 환자들이 수북하더란께. 그래도 내가 좀 더 성하다고 얼매나 부려먹는지, 금방 나을지 알았던 것이 점점 심해져부렀어.  DDS약이 없었을 적에 기름 약을 먹었는데 얼매나 독헌지 약이 몸에 안 받아 구토에 설사까지 모질게도 했지. 물들어오지 말라고 돌을 날라 방파제를 쌓은 것도, 지금 우리가사는 환자 마을도 다 이 손으로 지은 것이며."
 손마디와 손가락이 다 잘려 나간 손을 보여 주는 동생리의 한 아줌마. "녹동까지 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아 헤엄쳐 가려다 죽은 사람, 아예 굶어 죽느니 자살한다며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숱하게 많았다"며 그나마 출입증을 제시하고 육지로 나가는 것이 허용된 것도 불과 5∼6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숨 섞어 말한다.
 그의 방에는 가족 사진이 액자에 담겨져 방안 가득 걸려 있었다. 소록도에 들어와서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고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사진을 쳐다보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 1년에 한두 차례는 그래도 꼭 찾아오는 딸과 사위가 고맙다고…… 손자의 돌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보고 보고 또 봐서 닳아 있었다.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살 기도도 몇 차례, 목숨도 모질 지금까지 살아 있으나 일부러 가족들에게 연락하지 않는다"는 어느 할머니. 두 눈은 감겨진 채 붙어 버렸고, 입은 짓물러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고, 코는 콧구멍만 겨우 보일 정도에다 손가락 없는 뭉퉁한 손… 그냥 눈뜨고 보기에는 차마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끔찍한 흉상을 한 일흔 세 살의 처녀 할머니.
 "할머니 물 한 그릇만 주세요"란 말에 "워메여그 와서 물 달라는 처녀도 다 있네. 워메 고마운 것"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하며 다가가자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손을 더듬거리시면서 이름부터 묻고는 평생 잊지 않고 기도해 주겠다는 할아버지. "내 자식들에게 절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서는 안 돼" 하시면서 초점 없는 두 눈에 피고름보다도 더 진한 원한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 "이 세상에서는 비록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인생이었지만, 죽어 천국에 가서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 것이여. 거기에는 나병도 없을 테고." 75년의 긴긴 세월 동안 숱한 애환과 굴곡을 겪으면서 저주와 편견 속에 살아온 소록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사람의 정(情)을 그리워하다 지치고, 이제 막 출입이 허용되어 찾아오는 손자 손녀 같은 젊은이들을 감싸 안고 그동안 못 나눈 한과 그리움을 달래고 싶어하는 정 깊은 보통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사람들에게는 비록 배반당했으나 하늘의 위로와 평안을 바라고, 더욱 깊고 넓은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신앙인들 이었다.
 "국립소록도병원"은 원장을 중심으로 서무과·복지과·의료부의 기구로 조직되어 있고, 부설로 간호주무사 양성소가 있다.
 자료집「소록도」(90년 발행판)를 중심으로 각과의 기구 조직과 주요 업무 등을 살펴보자. 서무과에서는 시설사업(직업관사 신축·병사보수공사·지하수개발·유실수 단지 조성)과 교육(직종교육·나관리교육)등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복지과에서는 8개 부락 관리, 급여 관리 등 환자의 일상생활 전반에 관한 사업을 추진한다. 소록도 내에 있는 부락은 일반 병동으로 신생리(239명 8월 1일 현재), 동생리(154명), 남생리(145명), 구북리(100명), 중앙리(353명)로 혼자 사는 독신자(790여명)와 부부가 함께 사는 가정사(650여명)로 나뉘어져서 거주하고 있다. 신병동이라고도 불리워지는 녹생리에는 18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양성 환자(최근에 들어 온 환자들로 2∼3년 간 치료약을 투여하여 전염가능성이 없다) 40여명으로 포함하여 비교적 중증인 환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새마을 병동에는 맹인 중 생활 능력이 전혀 없는 중증 환자들이 거주하는 맹인병동(96명)과 정신질환자들이 거주하는 정신병동(63)으로 나뉘어져 있다.
 병원 본관 입원실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는 거의 반신불수에 혼자서는 도저히 거동할 수 없는 중증, 고령 환자들 40여명이 입원해 있다. 병원 건물은 덩그렇게 크고 시설 또한 화려하게 지어져 있으나 입원해야 할 상태에 있는 환자들이 각 마을마다 많은 듯 한데도 입원한 환자 수는 매우 작았고, 각 마을에 투입된 간호사와 간호 조무사는 4∼5명에 불과하여 환자 수에 비해 매우 부족해 보였다. 환자들 돌보는 일에도 그나마 조금 건강한 환자들이 그 일을 담당하고 있는 듯 해서 안타깝게 보였다. 소록도에 있는 전체 환자 중 실명자가 480여명, 다리가 한쪽 또는 두쪽다 없는 사람이 330여명에 이른다는 기록으로 볼 때 총 108명(간호사 30명, 간호조무사 78명)의 숫자는 일본의 경우 나병원의 환자대 간호사의 비율이 2:1 또는 1:1임을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턱없이 모자라는 인원이 아닐 수 없다.
 환자 개인이 받는 1달 복지금은 월2,000원(물론 국가에서 지급한다)에 주식은 백미 520g, 보리32g, 개인에게 배정된 농경지는 1인당 312㎡이다. 부식과 피복류, 연료가 정해져 있기는 하나 거의 미미한 편이고, 배정된 땅 역시 놀리는 경우가 많다. 농사나 축산에 종사할 수 없는 환자가 대부분이며, 그나마 자기 땅과 그 외의 부지를 구입하여 농산물(마늘·쪽파 등)과 축산물(돼지·토끼 사육), 유실수(밤나무·밀감나무 등)를 경작하는 사람들은 상당수의 수입을 조합으로부터 보장받아 소록도 내에서의 빈부격차도 현저하다.
 또한 복지관에서는 지금은 원내에 폐교되고 없는 미감아학교의 원생들 자녀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교육받으며 자랄 수 있게 "금송복지회"를 설립,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의료부는 내과, 외과, 피부과, 치과, 안·이비인후과, 약제과, 간호과로 나뉘어져 원장을 비롯하여 각 과별로 의사 9명, 간호사 30명, 간호조무사 78명이 종사하고 있다.
 의료부는 소록도에 수용보호증인 나환자의 나병 및 일반적 합병증 치료를 겸하고 있다. 나병 치료약은 1941년부터 투여해 온 설폰(sulfone)계열의 D.D.S가 최근까지 가장 많이 중요한 약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970년 때부터는 D.D.S와 함께 R.M.P나 B.663 등의 약제가 복합 사용되고 있다.
 환자들의 나이가 고령화됨에 따라 노인성 질환이 많이 나타나고 약의 장기복용으로 인한 합병증과 후유증이 심각하여 이에 따라 즉각적인 치료도 그 필요성이 날로 대두되고 있으나 소록도에서의 환자 치료는 거의 방치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록도 병원의 1년 예산은 총 57억여원(90년)이다. 90년도에는 집행액 51억여원 중 행정지원비로 22억6천여만원(43.9%), 수용환자 치료액으로 20억 3천여만원(39.6%), 시설사업(각종 건물공사)으로 8억 4천여만원(16.5%)이 쓰였다. 시설 사업에 든 비용 대부분이 병원 치료본관 부속 건물과 복지과 직원들이 주로 거주하는 후생복지관 신축, 직원관사 신축 등에 쓰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실제 환자들의 치료나 일상 생활에 쓰이는 각종 용품 지급, 환자 병사의 편리한 보수 공사 등에는 미흡한 것 같은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보사부에서 통계 낸 91년 2/4분기 "나병상황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등록관리 환자 수는 23,602명(남: 13,849명, 여: 9,753명)으로 재가 12,073명, 정착 8,513명, 수용 3,016명으로 나타나 있다.
 재가, 정착촌,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환자들은 거의 모두다 음성 환자들이다. 조기 치료를 하지 못하여 나병의 고질적인 병세 때문에 상처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전혀 전염성이 없어 편견만 불식된다면 가족이나 다른 일반인들과 함께 살아도 무방하다. 양성 환자들도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면 흔적도 없이 5∼7년 사이에 완치되며 발병해도 약을 투여하게 되면 이미 균이 죽기 때문에 전염될 가능성은 없다. 현재 양성 환자 수는 1,341명으로 추산되며 재가 1,132명, 정착 140명, 수용 69명으로 보사부가 통계, 기록하고 있다.

「나병은 유전병이 아니고 만성피부전염병이다. 결핵 등과 같이 법정 제3종 전염병이다. 불치의 병이 아니고 치료되는 병이다. 조기에 치료하면 장애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치유자는 일반사회에서 건강인과 같이 생활할 수 있다. 치료될 때까지 정부에서 무상으로 치유해 주고 있다」
 이 같은 나병에 관한 상식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직까지도 문둥병, 유전병, 저주스런 병, 천형병 등의 잘못된 인식과 편견으로 주변의 나환우들을 이 사회 밖으로 내몰고 있지는 않는 지, 이 그릇된 편견 속에서 나머지 여생마저 냉대와 소외, 무관심 속에 방치하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일제 때부터 물들어 온 잔재의식, 수용시설이나 정착촌에 환자들을 묶어놓는 정부의 홍보 방식도 일반 국민들의 그릇된 편견에 한 몫을 담당하는 요인이 됨은 물론이다.

 발병한 지 4년 째, 소록도에 온 지 몇 주되지 않은 20대 후방의 한 청년은 "서울 근교 사설 병원에 있으면서 집에도 자주 왔다갔다하며 치료를 받고 싶었으나 아는 사람들과 가끔이라도 마주치기 싫어 소록도에 들어와 2∼3년은 더 있어야 될 것"이라고 말한다. "건강인들만 보면 괜히 의기소침해지고 주눅이 든다"면서 "낫는 속도가 느린 나병이 평범한 젊은이었던 자신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고 토로한다.
 지금 4년째 치료를 받고 있는 또 한 청년은 "호적까지 떼서 황색 등록카드를 받아야 하는 보사부 등록 절차가 싫고 번거로와서 그 혜택을 받기를 거부하고 직접 입원비를 내고 입원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석 달 정도 입원해 있었는데 오십만원이 들었다는 그는 "열악한 소록도 환경에 나머지 여생마저 외롭고 고통스럽게 보내야하는 노인들이 안쓰럽다"며 "제발 나병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게 사회에 나가 홍보해 달라"고 애원했다.
 150만평의 넓은 소록도에는 교회가 다섯 개, 성당이 하나, 우체국, 동사무소, 소비조합, 화장터, 납골당, 교도소까지 들어서 있어 또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듯했다. 철저하게 고립되고 소외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섬, 그 속에서만 통용되는 법으로 자유를 속박 당하고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인권과 생존권조차도 짓밟혀 온 "나병공화국", "사람"의 편견과 냉대 속에서 신(神)의 가호만을 바라는 신앙심 충만한 사람들의 작은 나라 소록도는 대한민국 저 편에 있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일 수밖에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웃지 못할 사실은 직원마을과 환자마을이 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번지라 불리는 직원 마을에는 의사 및 관리인들의 개인 주택, 간호사 기숙사, 수녀원, 등이 자리잡고 있고, 200여명의 직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직원 교회와 성당, 원불교, 수녀원, 매점이 소록도 입구에 우뚝하고 아름답게 지어져 있다. 근무하는 곳이 한참을 가야 하는 거리이고 보니 대부분의 직원들이 개인 승용차를 이용하고 있으며 넓은 주차장 또한 보유하고 있다. 환자 마을에 있던 미감아 학교는 이미 폐교되었으나 직원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직원 마을 입구에 유치원과 초등학교까지 있고(학생수 현재 40명), 소록도 한쪽 구석에 있는 순천지서 소록지부라고 푯말이 붙어있는 교도소에는 외부 나환자 중 재판에 회부된 사람 10여명이 수감되어 있으며, 여기 근무하는 경찰관은 무려 25명에 이른다는 얘기다.
 현대식 건물에 잘 가꾸어진 정원과 온갖 편리한 물건들을 갖추어 놓고 사는 직원마을은 환자들이 사는 8개 부락과 많이 떨어져 있어 일제시대 때 있었던 1번지 2번지 경계선이 선만 그어져 있지 않다 뿐이지 확연하게 느껴졌다. 외양 역시 칙칙하고 오래된 길다란 일본식 시설인 환자 병사와 비교가 되어 직원, 환자간의 보이지 않는 계층의 격차를 실감케 했다.

 요즘 소록도를 찾는 방문객들이 많이 늘어났다. 자원 활동단체들도 매년 여름이면 몇 차례씩 찾아오고 교회를 통해서도 수련회나 봉사활동을 온다고 한다. 1년에 수백명씩 이 곳을 다녀가지만 모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갈까. 며칠 동안 잡초를 제거해 주고, 위문공연을 하며, 집안 청소를 해주고, 몇 시간 말동무를 해주는 "봉사"의 차원만으로 그쳐야 하는 걸까.
 "보다 조직적인 정비를 갖추어서 근본적인 개선의 여지를 갖고 활동할 수 없는 것이 현 단계 자원활동의 어려움이자 한계"라고 말하는 어느 자원 활동 단체 관계자의 말을 납득해야 하는 것도 바로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몇 년 후면 소록도는 영영 우리의 기억 속에 묻혀 감추어질지도 모른다. 적어도 10년 후면 나환자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관광지로 만든다", "또 다른 수용시설로 만든다", "거대한 수상 공원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들이 분분하다고 한다. 이런 갖가지 소문들 때문일까. 자신들의 젊음과 숱한 목숨까지 바치며 연명해 왔던 근거지가 없어진다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개별 취재가 허용되지 않아 다른 통로를 통해 들어가 며칠 동안 지내면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었던 한 할아버지가, 돌아서는 기자에게 푸념처럼 내 뱉는 몇 마디, 그것조차 끝내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소록도에 점점 인원이 줄어들고 있으니 몇 년 후면 큰일이오 큰일. 우리도 여기서만 살란 법 있소? 서울 대구 부산 등지에 집 짓고 살았으면…… 정말 그렇게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우리도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소."

글/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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