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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 얼굴없는 대화, 피복 2세 그 어두운 삶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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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수복씨가 지은 "핵의 아이들" 가운데서 부분 전제한 것임을 밝혀둔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지 어느덧 46년, 이제 피폭자 문제는 한세대를 넘어 바로 우리세대의 문제로 새롭게 다가서고 있다. 우리 속의 이방인으로 숨죽이며 살아가는 피폭 2세의 고민은 과연 무엇이며 또한 원하지 않는 "핵"을 머리에 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모두의 고민은 무엇인가. 박신규씨와 그 가족의 모습은 차별과 소외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학대로 시들어 가는 바로 4백만 장애우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박신규는 연세대학교 정외과 학생이다. 1982년도 2학년 때 휴학계를 내고 아직도 복교를 못하고 있다. 그는 2년 동안 외무고시에 응시하며 아르바이트를 겸하는 일방, 제나름의 공부를 해나가고 있다.
 온화하지만 창백한 얼굴, 마른 체격이다. 1985년 4월 아침 일찍, 필자는 박씨의 집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오랫동안 말문을 닫고 있다가 박신규는 이렇게 필자에게, 모든 질문을 한꺼번에 묶어 버리듯이 대답했다.
 "저는 자신의 얘기를 남에게 하는 일을 원치 않습니다. 물론, 힘겹고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있습니다. 대학에서도 제가 원한다면 등록비 구면을 도와줄 교수님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휴학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이해에 도움이 될른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중학 2학년 때 선생님이 저희 집을 찾아와서 뵌 기억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머님 말씀을 전적으로 거역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만 저로서는 이렇게 만나 뵙는 일만으로 놓여났으면 합니다. 말 그대로 놓여남입니다.(살짝 웃어 보인다) 가장 지적인 편에 속하는 2세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로서는 그 말씀자체가 이미 저의 유구무언인 본질적인 핵심을 설명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조금 배웠다는 것은 그 만큼 힘을 잃는 다는 말과 같지 않겠습니까. 사태를 볼 수 있고 짐작할 수 있다는 약싹빠름이 배움의 힘일테니까 말입니다.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밑바닥 생계 수단. 그 비인간적 어머니의 등짐지기 중노동에 빌붙어 학업을 계속해야 하는 그나마 병약한 내 마음과 육신이 지적이란 표현을 빌지 않더래도 자기 주장이나 자기 세계의 발붙일 터전이 없다는 사실은 명약관호한 일이 아닙니까? 용서하십시오. 아침 수업이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박신규의 모친 윤점순(60세)은 남편인 박수만(1923∼1975)과 함께 히로시마에서 피폭, 11명 가족 중(즉사 2명, 귀국시 1명, 귀국 후 병사 2명) 여섯 번째로 남편이 사망하자 어린 세 자녀를 노동으로 키워왔다.
 윤 여인은 피폭 당시 집안에 있었으며 비행장도로 공사장 등 밖에서 당한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성한 사람으로 오늘날까지 중노동을 하며 아들에게 끼친, 윤 여인의 영향 또한 적지 않은 듯 싶다. 오랜 세월을 중노동으로 견뎌온 여인답게 윤 여인은 침착하고 당차다. 그러나 그 날 아들 앞에서 보인 윤 여인의 태도는 무척 여리고 얼얼하리 만큼 순종적으로 보였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죄지은 자의 자세이다. 자식에게 달갑잖은 사람을 만나게 한 어미로서의 죄책감, 딸 신희(22세)의 장학금을 교회여성연합회에서 받지 않고 있었다면, 이 어머니는 과연 아들을 필자와 만나게 주선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윤 여인에게 질문했다.
 "평소에 피폭과 또는 피폭 2세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자녀들 사이에 교환되고 있는지요?"
 "별로 하지 않습니다. 꼭 무슨 일이 있기 전에는."
 "꼭 무슨 일이라니요?"
 "협회에서 통지가 온다거나 애들 작은 아버지(박인만·57세·전신 중화상, 다리부분 극심, 백내장으로 75년 이후 좌측 눈 실명상태)나 고모(박경숙 47세·늑막염, 폐렴 기관지염을 계속 앓아왔음. 현재도 호흡장애) 역시 피폭자다보니 입원을 한다거나 병이 다시 악화했다거나 하면 자연히 얘기를 하게 되지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장남에게는 있는 걸로 느껴졌는데요?"

 "그렇습니다. 애가 머리가 좋다보니 잊는 법이 없나봐요. 걔가 열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기 전 아버지가 어떻게 병을 앓으시고 고통을 참으셨는지 늘 급할 때는 걔가 약심부름을 뛰었으니까여. 그때도 홍은 2동 산1번지 산꼭대기에 살았기 때문에 평지의 약국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20분, 보통 30분, 왕복 한 시간 거린데 아버지는 숨이 넘어가고 신규는 울며불며 굴러 내리듯 뛰어 다녔으니 어린 가슴에 멍이 들대로 들었지요. 비바람이 심한 밤중, 겨울철엔 눈이 한 자씩 쌓여 도저히 내려갈 수 없는 그 낭떠러지를 그 어린 게 말은 못하고 어떻게 그 기막힌 얘길 다 합니까. 우리 큰애가 달리 더 말이 없어진 게 아닙니다. 너무 치여서 그래요. 너무 가당찮은 일을 어린 나이에 겪다보니 별로 웃는 법이 없어요. 남 보기에 차고 냉정한 아이가 되었지요."
 "현재 3남매지요? 아래로 두 아이의 건강은 어떠세여?"
 "딸도 막내도 다 시원치가 않아요. 딸은 중학 때부터 주간은 근무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이번에 고등학교 졸업검정고시에 응시하느라 과로가 지나쳐서 최근엔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막내가 고 2인데 막내라 그런지 공부에 집중력이 없고 공부 그 자체만도 힘에 부치는 모양입니다. 막내를 낳을 무렵은 애아버지의 건강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박신규의 부친 박수만의 병명은 관상동맥경화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단 증세가 일기 시작하면 심장압박으로 어디고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한다.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박씨는 약국에서 진통제를 구입 응급용으로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시간과 함께 이 발작의 빈도는 잦아졌으며 이로 인해 온 가족은 환자 못지 않게 불안과 공포감에 떨게 되었다.
 그럼에도 박수만의 삶에의 의지는 불길처럼 후퇴할 줄을 몰랐다. 박수만은 요로에 진정서를 내어 취업자리를 호소하던 나머지 1972년 서울시장 양택식씨의 배려로 시청 청소과에 청소부로 일자리를 얻었으나 고작 10개월을 채우지 못했다. 이 역시 발작의 빈도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 후 그는 사망했다. 그 3년 동안 하루걸러 때로는 하루에도 몇 번 이 발작은 계속됐다. 박씨의 죽음의 그 날.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것은 박씨가 사망한 그 현장에서 필자는 넉넉히 읽을 수가 있었다.

 4평 못 미치는 박 씨의 판자방에는 신문지로 발려진 벽 가득히 그의 기억 속에 남은 주소명 지명, 인명, 시구, 한시가 빈틈없이 붓글씨로 쓰여져 있고, 책상 위의 쓰다 말은 일본어 편지엔 자신의 전쟁전의 졸업학교장에게, 자신의 병치유에 대한 방법을 문의, 호소하는 글이 반쯤 씌이다 중단 당한 채 있다.
 그리고 벽 구석에 걸린 액자에는 1972년 12월26일자 서울시장 양택식 명의로 된 시청 청소과 재임시의 근면 성실성을 높이 칭송하는 표창장이 간수되어 있었다. 윤 여인은 아들에 대한 필자의 질문을 자르듯이 자신의 얘기를 쏟아 놓는다. 
 "남편 죽고 만 16년을 등짐질로 살아왔고, 내 힘으로 산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근래 들어 말할 수 없는 비관이 들어요. 이제 공사판에 나가면, 할머니 이제 그만 돌아가서 손자나 보시지요. 난 아직 버틸 수가 있는데 대하는 사람마다 같은 말을 없구나하니, 뼈아프게 슬퍼진답니다."
 
 윤 여인이 장남 박신규를 낳은 것은 남편이 재기한 직후인 35세 때 일이다. 둘째가 38세때, 막내가 마흔 셋, 모두가 만산에 속한다. 15년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 끝에 병든 몸과 뱃삯조차 외상으로 돌아왔던 남편 배삯(밀항) 5만원을 구면해서 마산까지 내려가 남편을 인수하고 단간 셋방으로 돌아왔을 때 윤 여인은 불현듯 이제는 모두가 늦고 말았구나 새 출발하라고 할 때 떠 날것을 이제는 모두가……하고 자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윤 여인은 제아무리 원폭후유증이 지독하다해도 세월이 이만큼 흘렀으니 그것이 이미 희망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닐까 마음 한쪽을 굳게 자신을 격려하며 동시에 남편을 격려했다. 그리고 노동판으로 뛰어들었다.
 산동네 꼭대기, 고지대에 연탄을 등지기로 날라다 주고 연탄 한 장에 1원떼기 노동을 시작했다. 조건을 헤아리는 법도 주저하는 법도 없었다. 자신의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극대한의 노동을 다할 뿐. 말하자면 윤 여인의 이 시기는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어둠의 시기에 속한다. 이 시기에 3남매를 배고, 낳고 했던 것이다.
 오늘 현재 윤 여인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는, 금년 들어 일터에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태변화에 대한 충격이지 필자의 방문 의도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고된 노동보다 그 거역의 사태가 윤 여인을 갑자기 오랜 피폭자로서의 고난과 보호자로서의 지침의 끝에 와버린 노파의 숨김없는 절망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현실이 절망이면 절망일수록 그 대상은 높임을 받고 무한한 꿈으로서 손닿지 못하게 한다. 아들이 원치 않은 일은 어미 또한 원치 않는 것이다. 피폭 2세에 대한 어머니의 정이 비단 윤 여인에 한할까마는 필자는 여전히 국외자의 위치에서 한 발짝도 다가들지 못하고 만다.
 윤 여인은 골목바깥까지 따라나와 조심스레 한마디 던졌다. "몇 일 안으로 딸애의 고등학교 자격 검정고시 발표가 있을 텐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
 "큰 아이 때는 전세금을 빼서 삭을 세로 옮기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월세니까요. 선생님."
 "네."
 "원폭피해자 2세의 입장을 벗어나는 길은 공부하는 길 밖에 없다. 내 큰놈이 그런 말을 했는데 사실이 그렇다면 어미가 길로 나앉드래도 둘째도 공부를 시켜야 합니까?"
 "……"
 필자는 끝내 대답을 못하고 윤 여인과 함께 헤어졌다.

글/박수복

 

작성자박수복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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