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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도, 노역과 굶주림의 기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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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세 시간 여의 거리에 있는 한 섬이 영화 빠삐용을 연상시키는 부랑인 강제수용소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일제시대부터 이어져 팔십년대 초반까지 그 악명을 떨쳤던 선감도 내 선감학원 그 현장을 가 본다.

 물이 빠진 밤바다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잠든 듯 물살이 흐르는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소년은 방금 전 엉금엉금 기어 겨우 풀숲을 헤쳐 나온 참이었다. 끝도 없는 불안감이 소년을 짓눌러 왔다. 소년은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염려했던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기다가 무릎이 까졌는지 쓰라린 아픔이 한순간 소년으로 하여금 저절로 신음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소년은 끙- 신음을 뱉어내고 천천히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지척거릴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틀림없이 취침 점호를 하다 소년이 없어진 것을 안 방장과 직원들이 잠시 후면 이곳으로 쫓아 올 것이었다. 그전에 바다를 건너야 했다.

 소년은 바다를 노려보았다. 바다 끝 지척에 웅크린 육지가 보였다. 그 육지는 오늘따라 더 가깝게 소년의 눈에 다가왔다. 얼만큼의 거리일까? 내가 헤엄을 쳐서 이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마산 포는 물살이 세다던데 건너다가 기운이 빠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때 소년을 짓눌렀던 불안감의 실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바위에 으깨지고 온 몸이 푸르딩딩하게 부어오른 채 장작개비처럼 굳어 널브러져 있던 처참한 명수형의 시체였다. 소년은 달포 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웅성거리며 빙 둘러 서 있던 아이들 너머로 그 시체를 목격했었다.

원장이 입에 침을 튀기며 "너희들 마산포를 통해서 도망치다간 이꼴 날 줄 알아"는 협박을 해대고 있을 때 어느새 명수형의 시체에는 냄새를 맡은 똥파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소년은 눈을 감고 그 형의 시체를 머리에서 지우려 힘껏 도리질을 쳤다. 심한 갈등이 소년을 덮쳤다. 그러나 소년은 차라리 죽는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반복되는 농사일과 풀 뽑기는 이제 생각만 해도 지겹다. 나갈 기약도 없이 이어지는 이 선감도 수용소 생활을 끝장낼 수만 있다면 그래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나는 탈출해야 한다.

 소년은 서둘러 떨리는 손을 놀려 옷을 벗었다. 그런 다음 바닷물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발을 바닷물 속에 담그자 시린 기운이 발끝부터 차 올라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소년은 정신을 모아 힘들었지만 따뜻했던 도시 뒷골목에서의 삶을 기억해 내려 애를 썼다. 조금만 참으면 나는 못내 그리던 그 육지에 닿을 수 있다. 형들과 친구들과 만날 수 있고…

 소년은 헤엄을 쳐서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갔다. 어느새 몰려오기 시작한 공포감과 주체할 길 없는 설움에 복받쳐 소년은 엉엉 울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 갈수록 생각과는 달리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소년은 벌써 몇 차례나 물 속에 얼굴을 묻은 채 목구멍 너머로 짠물을 들이켜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버둥거리며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소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 엄마- 무심한 물살이 몰려와 거칠게 소년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기행은 이렇게 죽어간 이 땅의 소위 부랑아들에 대한 기록이다. 선감, 인천 앞 바다에 떠 있는, 반나절을 걸으면 완주할 수 있는 작은 섬, 그곳은 최초의 국립부랑아 수용시설인 선감학원이 있던 곳이다. 불과 십여년전까지만 해도 그곳에서는 많은 수의 부랑아들이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강제 수용되어 노역과 굶주림, 그리고 무모한 탈출을 결행하다 숨져가야 했다. 

 멀리는 일제시대, 가깝게는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서 소매치기, 앵벌이, 행려인 등 이 땅의 버림받은 민초들에게 그 악명을 떨쳤던 한국판 빠삐용을 연상시키는 강제수용소 선감도, 그 섬의 위용을 자랑하던 선감학원은 지금은 폐쇄되고 없다. 하지만 건물의 잔해는 섬 곳곳에 남아 그 당시의 비극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여름날 오후 물어물어 선감도에 들어섰다. 몇 해 전만 해도 뱃길로만 가능했던 길을 서해안 개발붐덕택으로 육로를 통해 닿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전철을 이용해서 수원 시외버스 종합터미널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15 간격의 서신행 버스를 타고 1시간 여를 달려 화성군 서신읍에 도착한 후 다시 두 시간 마다 한 대씩 있는 대부도행 버스로 갈아타고 삼십여분을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선감도였다. 육로가 뚫리기 전에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하루 한차례 씩 오가는 뱃길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고 했다. 경기도 웅진군 대부면 선감리, 이 주소가 이 섬의 공식 지명이었다.

 옛 선감학원 터는 어렵지 않게 눈에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누워 있는 야산 한 가운데에 낡은 탑이 하나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 탑 주변으로 시골학교 교사 같은 낡은 강당 모습을 한 큰 슬레이트 기와집이 몇 채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었다. 부근에 인적은 없었다. 부근에 인적은 없었다. 한낮임에도 기분 나쁠 정도로 사위가 조용했다.

 제멋대로 자란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 그 탑 앞에 섰다. 풍상에 시달려 이끼가 끼고 몹시 낡은 그 탑은 옛 경기도지사의 방문을 기념해 세워진 탑인 듯 했다. 제작년도가 1972년으로 되어 있고 "오늘의 괴로움을 참고 견디어 내일 즐거운 번영을 갖자"라는 양각 글씨가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탑을 둘러보고 난 후 예의 흙벽담 기와집으로 다가갔다. 두 채는 비어 있었는데 한 채에는 뜻밖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한 노인은 그 건물이 인천 모 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 양로원으로 쓰이고 있으며 현재 열명의 노인들이 수용돼 있는데 하는 일 없이 지내고 있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그 건물은 지형 상 위치로 보아 한눈에 옛 선감학원의 사무실로 쓰였던 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 역시 이 근처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외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섬의 구체적인 내력은 모른다는 노인을 뒤로하고 내려오다 보니 오른쪽으로 제법 규모가 큰 꿩 사육장이 눈에 띄었다.

 산란기인지 접근금지라는 푯말이 붙어있는 철망 아래서 한 아주머니가 부지런히 먹이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치면서 몇 마디 물어 보았다. 그 아주머니는 옛 선감학원의 이발 교육실과 자체 정미소가 있었던 건물을 소유주인 경기도의 허락 없이 꿩 사육장으로 변경해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경기도에서 불하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지 결코 고의적으로 불법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녀는 해명을 덧붙였다. 말끝에 더 자세한 내막을 알려면 길 건너 동네에 가서 물어 보라고 일러 주었다. 그 아주머니 말대로 옛 선감학원과는 반대 방향으로 논길을 건너 마을로 들어섰다.

 다행히 몇 십 채의 농가가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어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정경을 이루고 있는 마을 초입께에서 땡볕에 앉아 마늘을 캐고 있는 두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중한 아주머니는 옛 선감학원에 근무했다는 그 아주머니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선감학원이 왜 폐쇄됐습니까?"
 "도망가다 죽은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것 때문에 원이 폐쇄 됐어요."

 "많이 죽었나요?"
 "직원들이 스물 몇 명이나 있었지만 부랑아들이 300명이나 수용되어 있어 다 지킬 수 없었지요. 어느 틈에 도망을 가 바다를 건너다가 많이 죽었어요. 주로 마산포 쪽으로 도망을 쳤는데 거기서 보면 건너편에 육지 화성군이 보여요. 거기서 물이 빠지면 건너다가 힘이 모자라 죽고 그랬어요."

 "왜 한사코 원생들이 탈출하려 했습니까?"
 "걔네 들은 가출해서 나쁜 짓을 하던 애들이니까 남 속이고 도둑질을 해야 하는데 그런 짓을 못하고 갇혀있다 보니 답답해서 그랬을 거예요."

 "혹시 구타나 강제노역 같은 것이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요?"
 "잘못하면 때리기도 했죠. 규칙을 어겼을 때는 사정없이 맞았어요. 그리고 자네들끼리 말도 못하게 싸워서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어요."

 "남편께서 근무하기가 굉장히 힘드셨겠군요."
 "힘들기만해요. 이가 들끓어 피부병이 안 걸릴 때가 없었을 지경이었어요…"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이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선감학원이 폐쇄되기 직전의 상황, 즉 다루기 어려운 소위 대가리가 큰 부랑인들은 육지에 막 생기기 시작한 개인이 운영하는 다른 시설로 보내고 주로 20살 안쪽의 부랑아들을 수용하며 목공, 이발, 봉제 등의 기술을 가르키던 80년대 초의 일들에 관한 증언에 그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전, 구체적으로 오십, 육십, 칠십년대를 거치는 기간동안 선감학원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으며 그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그때 일을 추적하기에는 한마디로 역부족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있을 법한 선감학원 원생출신 주민이 단 한 명도 선감도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기록과 몇몇 증언을 종합해 그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기로 한다. 기록에 의하면 서해의 낙도였던 선감도는 일제시대인 1941년 10월 관변단체인 경기도 사회사업협회에서 현금 50만원을 원주민들에게 주고 섬을 사는 형식으로 그 오욕의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강제로 주민들을 내쫓은 일제는 곧이어 바다가 철조망인 천해의 수용소인 이 섬에 사상범들과 그들이 말하는 인간쓰레기들 (장애우들도 포함돼 있었다)을 격리 차원에서 강제 수용하기 시작했고 그 악독함은 해방 전까지 이어졌다.

 해방이 되자 1946년 2월 선감도는 그 형태 그대로 경기도로 이관되어 남자들만 수용하는 부랑아 강제수용소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략 요충지인 이 섬은 다시 미군들의 손에 넘어갔고 중대 병력의 미군이 이 섬에 주둔하면서 길을 닦고 숙소로 쓰일 건물을 미국에서 직접 흙벽돌을 찍는 기술을 배워와 대규모로 건물을 지어 현재의 모습을 완성시킨다. 미군이 떠나고 나자 선감도는 다시 경기도에서 직접 운영하는 부랑아 선도 수용시설인 선감학원으로 본격적인 악명을 떨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초기에 선감도에 잡혀온 부랑아들은 말로만 듣던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껌팔이, 신문팔이, 구두닦이, 거지, 앵벌이, 소매치기 등 전쟁고아들과 전후 피폐해진 생활고를 못이겨 가출해 전국 주요도시 주변을 떠돌던 많은 수의 청소년들이 "불량기"를 이유로 선감도에 잡혀와야 했다. 그 중에는 장애우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군대식 규율과 굶주림과 강제 노역이었다. 그들은 흡사 죄수들처럼 머리를 박박 밀리고 동일한 색깔의 옷을 입은 채 하루종일 농사일과 청소와 풀 뽑기에 내몰려야 했다. 

 식량도 부족해서 비가 안와 흉년이라도 들면 설익은 벼깍지를 깨물어 먹다 목이 막혀 죽은 부랑아들도 부지기수였다 78년이 되어서야 선감도에 겨우 전기가 들어가 주민들이 지하수를 파서 농사를 지은 걸 감안하면 선감도의 주기적인 흉년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흉년의 최대 피해자는 물어볼 것도 없이 수용되어 있는 원생들일 수밖에 없었다.

 굶주림의 고통과 함께 또한 가해진 군대식 규율은 상상을 초월하는 억압으로 원생들을 괴롭혔다. 직원들은 부랑아들 중에서 힘센 원생을 골라 사장과 방장으로 내세워 원생들을 관리하게 하면서 혹독한 기합과 구타로 규율을 세우게끔 충동질하고 한편으로 묵인했던 것이다.

 원생들이 혹이나 도망을 치다 잡혀오면 그 원생은 사무관인 원장 사택 마루 밑 땅굴에 며칠을 갇힌 채 주먹밥으로 연명하며 끊임없이 반성문을 써내야 했다.

 설혹 죽기를 각오하고 탈출을 시도한다 해도 직원들이 하루한번 인천에서 오는 뱃길만 지키고 서 있으면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었던 섬을 벗어나고자 바다에 뛰어들어 몸부림치다 죽어갔던 원생들에 대한 전술한 기록은 비극의 한 정점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원생들이 마치 적군묘지처럼 선감학원 부근야산 한곳에 웅덩이를 파고, 선감학원에 근무했던 직원들 말대로 가마니에 둘둘 말려 집단으로 매장돼 있다는 사실에 이르면 더 이상 할말을 잃게 된다.

 이러한 참혹한 사연을 간직한 채 한때 자의가 아닌 타의로 어쩔 수 없이 부장인이 되어 찬  이슬을 맞으며 거리를 헤매던 장애우도 포함된 민초들에게 잡혀가면 죽는 다는 더할 수 없는 공포감으로 악명을 떨쳤던 선감도 선감학원은 마침내 1982년 7월 재정난을 이유로 폐쇄된다. 폐쇄되기 직전에 수용되어 있던 원생들은 80여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감학원이 폐쇄된 후 죽지 않고 살아서 선감도를 빠져나간 그때의 원생들은 선감학원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훨씬 나중 일이지만 수소문해서 만난 한 장애우는 선감학원 이야기를 꺼내자 언급을 회피하는 것으로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웅변했다. 겨우 얻어낼 수 있었던 말이 기억조차 하기 싫다는 짤막한 한마디 대답뿐이었다.

 당시 선감학원의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걸어 섬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낡은 슬레이트 기와를 얹은 흙담 짐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런 대형건물이 족히 30여 채는 넘어 보였다.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포로수용소를 연상시켜 주는 정경이었다.  

 바닷가 너른 들판에서 흑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그 건물들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상태로 낡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외벽에 구멍이 뚫린 건물도 있었고 서까래가 무너져 너덜거리는 을씨년스러운 건물도 있었다. 그런 중에도 비교적 멀쩡하게 보존된 건물들은 마치 별장처럼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예외 없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집들은 옛 선감학원 직원들 숙소로 사용되던 건물인 듯 했다.

 기록을 보면 폐쇄되기 직전의 선감학원 원생들 숙소는 창조의 집과 개척의 집 두 사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한 사 마다 각각 아홉 개의 방이 딸려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그 중 개척의 집 소속의 한 숙소를 둘러보았다. 담이 무너져 여기저기 흙벽돌이 나뒹구는 복도 한쪽으로 다 부서진 나무문이 매달려 있었고 그 안쪽의 방이었다. 대여섯평 정도 될까. 그 공간에는 역시 부서진 장롱과 옷가지 등 지저분한 쓰레기가 썩으면서 풍기는 악취가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난방을 나무로 했던 듯 재래식 아궁이도 눈에 띄었다.

 선감도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섬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였기 때문에 더 이상 별다른 특징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섬을 빠져나오기 전 다시 마을에 들렸다. 아무래도 몇몇 주민들 말을 보충해서 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우선 왜 낡은 건물들을 방치해 놓고 있는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홍모 노인은 그 이유를 경기도에서 땅 투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경기도에서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주민들이 불하를 해 주거나 아니면 빌려주기라도 해 달라고 도청에 들어가 진정도 하고 데모도 했지만 수년 째 묵묵부답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땅 값이 제일 싸던 선감도가 이웃한 대부면보다 오히려 땅값이 비싸지는 기현상이 빚어졌다는 게 그 노인의 설명이었다. 다른 주민들도 경기도가 옛 선감학원 건물을 헐어내지 않고 있는데에는 서해안 개발과 연관된 투기와 관련이 있다고 혐의를 두기는 마찬가지였다.

 늦은 오후, 어렵게 빈차를 얻어 타고 선감도를 빠져 나왔다. 만약 사전 지식이 없어 이 섬에 들렸다면 그 평화로움과 한적함에 푹 빠져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을 법한 이 기행은 그렇게 되기는커녕 처연함과 착잡한 심정만을 가득 안은 채 끝나가고 있었다. 지난 시절 이곳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고통에 몸부림치던 원생들이 모습들이 너무도 생생히 눈에 어른거려 저절로 한숨을 내 쉬어야 했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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