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 장애우 해방운동의 원칙
본문
<1. 장애우 운동의 역사적 개괄>
장애우 차별의 장구함이나 그 뿌리의 깊이에 비해 장애우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는 매우 짧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조직적인 운동은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해도 일부 자선가에 의한 구제활동으로 소규모 시설 설치, 모금 활동 정도에 불과 하였다. 그러므로 운동의 시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를테면, 부락해방운동(部落解放運動)이 전국 수평사(水平社)를 중심으로 부락민 자신의 손에 의해 창시되었고, 제일조선·중국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이 그들 자신의 고뇌에 찬 저항투쟁으로 발전해 온 것에 비해, 장애우 운동의 역사는 오랜 기간 장애우 자신에 의해서가 아닌 건상자(建常者) 즉 건강인들에 의해서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장애우에 대해 한없는 동정을 갖는 기독교도나 사회사업가들에 의한 구제운동으로써 전개되어 왔다. 이 "구제사상"은 장애우 운동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용어 역시 "대책" "보장" 등으로 바뀌었으나 결국은 장애우를 보호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체가 되어야 할 장애우가 운동의 실제적인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중증장애우를 비롯한 많은 장애우들이 운동에 참여하기 이전에 일상생활조차 혼자서 영위하기가 곤란하여 개호자(介護者) 즉 부축해주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개호자는 대개의 경우 가족이 담당했는데 그럴 때 장애우는 부모의 뜻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는다. 밖에 나가 자립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개호자의 존재는 불가피하다. 또 뿌리깊은 장애우 차별의 결과 많은 장애우들의 발언이나 요구는 무시되고, 자기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또한 교육이나 학습의 기회도 박탈당하고, 정보로부터도 차단되기 쉬운 장애우가 운동에 참여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명치(明治) 후반부터 시작된 이러한 구제운동은 거의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대세를 이루었으나, 정부와 대중의 장애우 차별이 극심하여 이 운동조차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게다가 침략전쟁의 격화와 패전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는 운동에 대한 탄압이 가해졌다.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장애우는 어쩔 수 없이 도외시되었던 것이다.
<장애우·장애우 부모의 융화단체>
1947년 "일본맹인회연합"(일맹연) 결성을 시발로 "일본농아연맹" "지체부자유자협회"등 장애우 자신의 손에 의한 제단체가 잇따라 재건, 결성되었다. 이들 단체는 처음에는 주로 친목을 목적으로 했으나, 전후(戰後)의 극심한 경제적 혼란과 특히 장애우가 처한 열악한 조건하에서 여러 가지 요구를 내세우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요구를 "권리"로서가 아닌, "청원"으로만 파악하였다. 게다가 그 청원도 지배체제를 유지해 온 자민당 정부와 유착하여 그 산하에 들어감으로써 실현하였다. 물론 그들이 보수정치와 유착했다고 해서 이들 단체의 구성원 모두가 그러한 경향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성원 대부분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채 일부 보수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들 단체는 "일본신체장애우단체연합회"(일신연)를 결성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나 이런 단체들에서는 각 단체들이 각기의 이해관계에 집착한 나머지 장애의 차이를 초월한 상호간의 단결을 도모하려는 자세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단체로서는 1952년 "전신박약자육성회"가 결성되어 위에서 말한 장애우 단체들과 손을 잡는 부모 단체로 조직되었다. 그 후 1960년대에 들어서서 장애 종류별로 부모 단체가 결성되었으나 명확한 사상적 경향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육성회의 지도부는 자민당과의 유착이 현저했다. 이러한 부모 모임 중에서는 일본공산당의 영향을 받는 곳도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의료피해로 인한 장애아를 가진 부모 단체를 비롯한 몇 개 단체가 기본적으로 장애우 해방운동과 일치된 입장을 가지기도 했다.
<자원활동가(Volunteer) 운동>
2차 세계대전 후 얼마 되지 않아 "불우한 사람에게 사랑의 손길을"이라는 구호로 출발한 자원활동가 운동은 1960년대 고도 경제성장기에 들어서서 급속하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1억총봉사자의 구호에서 볼 수 있듯이 "선의"(善意)에서 "오히려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라는 내용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참여하는 개개인의 의식은 차치하고라도 지도층의 대부분이 거의 보수정치의 옹호자이며, 지배자들 역시 이러한 것을 의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그들 지배자 계급은 자원활동가 운동을 통하여 그들이 담당해야 할 공적 책임을 회피하면서 인민 대중의 비판을 교묘하게 벗어났고, 또한 최근에는 자원활동가를 가장하여 장애우를 관리하기 위한 체제 형성까지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스스로의 위치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자원활동가 운동 역시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자원활동가 운동 역시 차별의식에 가득 찬 지배체제를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전장연(全障硏) 운동>
전국장애자문제연구회(전장연)는 일본교원 노조의 "장애아교육부회" 중에서 생긴 조직이며, 1967년 교사·학생·학자·시설 직원·그 부모 및 극소수의 장애우가 참가하여 연구단체로 발족되었다. 그 후 총평(일본노총)이나 자치로(自治勞)까지도 포함하여 요구 운동을 추진하는 연락체로서 "장애우의 생활과 권리를 지키는 전국연락협의회"(장전협) 아래 각 도도부현(都道府縣)에서 같은 조직을 결성하고 있다. 이 운동은 공산당과 사회당이 공동으로 지도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사회당의 방침의 불투명성과 공산당의 색트주의(종파주의)로부터 점차로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대화되어 현재에 이르러서는 지도부의 거의가 공산당으로 독점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운동의 특징은 첫째, 운동의 중심이 교사나 학자, 부모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어 "모두의 청원"이라는 명목하에 차별에 대한 장애우 스스로의 분노와 입장이 애매하게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또한, 장애우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 제거의 전망을 사회체제나 대중의 의식의 근본적 변혁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장애의 경감(輕減), 극복(전면 발달의 보장)에서 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학자나 교사들에 의한 장애원인의 해명과 치료, 교육 훈련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시설·양호학교 설치는 국민적 과제"라는 구호로 독선적인 견해와 운동이 생기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참된 의미의 과학과는 거리가 먼 지배자 계급까지도 공인하는 "과학"을 절대화하게 된 것이다.
이밖에 전장연 운동에서는 수많은 요구를 나열하는 것에 그치는 "요구운동"이 중시되었다. 여기에는 "장애우와 그 부모는 요구운동을! 학자는 연구를! 전문직으로서의 교사는 실천을!" 그리고 그들 모두를 지도하는 것으로서 "정치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공산당"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분업론·이원론"이 생기게 된다. 또한 전장연 운동에 대한 기본적 비판은 우리들이 운동을 발전시키는 의미에 있어서도 중요한 과제이며 금후의 과제이기도 하다.
전장연 운동 이후 1960년대 말에는 장애우·중증장애우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광명양호학교를 졸업한 중증 뇌성마비 환자들의 아라끼(荒木義昭) 의료실 재판 투쟁이며, 또한 같은 동경의 도립부중요육(都立府中療育) 센터의 재소생들에 의한 시설의 대우 개선과 이전 저지 투쟁이었다. 이 투쟁들은 모두 중증장애우 자신들에게 가해진 부당한 차별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살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중증장애우들이 주체적으로 궐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투쟁은 1970년의 "일본뇌성마비자협회·푸른 잔디회·가나가와(會神奈川)현연합회"에 의한 "장애우 살인에 대한 감형탄원 운동에 대한 고발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투쟁에 이어 관서(關西)지방에서 "관서장애자해방위원회"를 결성했고, 나아가 대판(大阪)에서는 장애우의 노동권을 둘러싼 "카다이라"(片平) 투쟁이 일어나는 등 점차로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장애우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추진된 일련의 투쟁을 "장애우 해방투쟁"이라고 부른다. 이 운동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60년대 말부터 고양되기 시작한 부락해방동맹에 의한 협산(狹山)차별 재판 규탄 투쟁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장애우 해방운동 역시 그 미숙성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 많은 시련에 부닥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즉 운동이 수년을 경과해도 "고발"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구체성을 결여한 관념론에 빠지기 쉬웠다는 점, 건상자의 "전시효과"를 노리거나 "이용주의"에 무방비 상태였다는 점, 또 그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대한 불신이 강하여 일체의 공동 투쟁을 거절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는 점, 운동이 개별 분산화 되기 쉬웠다는 점 등을 그 요인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제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1967년에 결성된 것이 전장연(전국장애자해방운동연락회의)이었다. 이들 장애우 스스로의 투쟁에 촉발되어 장애우를 가진 부모, 교사, 학자, 연수자의 의식도 급속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두터운 벽으로 차단되어 있는 가운데서도 내 자식을 지역의 학교에 취학시키기 위해 수년간이나 싸워 온 동경의 가나이(金井) 강치군(康治君)이나 나라 지방의 매곡상사군(昧谷尙司君)을 선두로 한 각 지방의 취학 투쟁의 고양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지금까지 전장연 운동에 포함되곤 했던 일본교원노조 가운데 오사까의 고규(高槻), 풍중(豊中) 등 교원노조로써 장애우 해방운동에 연대하는 곳도 많기 생기게 되었고 또한 총평(일본 노총)이나 자치로의 자세도 점차 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오사까의 "장애아의 생활과 교육을 보장하려는 시민의회, 대판부연합회(大阪府連合會)" 운동이 지금까지 수행해 왔던 역할과 앞으로도 수행할 것으로 보이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의 장애우 운동>
그 밖의 장애우 운동으로서는 1974년 사회당·총평의 호소로 결성된 "장애우의 생활 보장을 요구하는 연락회의"(장애연), 매년 "휠체어 전국 시민집회"를 실시하고 있는 그룹, 또한 팔대영태(八代英太)씨가 고문으로 있는 "전국척추장애자연합회"등이 있다. 간체는 각기 일정한 방향성(정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 포함)을 갖고 있지만 전체로서는 많은 애매성을 남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장애우 해방운동의 기본원칙>
지금까지 우리는 자주 "장애우 해방"이라는 용어를 써 왔는데 이 용어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말하는 "장애우 해방"이란 전장연 등이 말하는 것과 같은 장애의 경감·극복, 즉 "장애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 비록 아무리 중한 장애일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차별을 받는다든지 그 존재가 부정된다든지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장애우가 스스로의 생활 상태를 당당히 드러내 놓고 생존 경쟁에 나설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칫하면 그릇 생각하기 쉬운, 장애를 가볍게 하거나 고친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만약 장애우의 해방이 장애를 고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장애우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보다 전문적인 의료나 훈련이며, 그것이 보장되는 특별한 장이다.
한편 그와 반대로 장애우 스스로가 차별과 싸워서 차별을 없애는 것을 중시한다면 장애우인 우리들 모두가 어떤 차별적인 제도가 있을지라도 건상자가 살고 있는 지역 가운데서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회, 정치 구조 자체를 변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정치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차별과 수탈 그리고 침략 전쟁을 되풀이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여 노동자 인민을 위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아래로부터의 일상적인 투쟁이 절대로 필요하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구호가 아니라, "일할 수 없는 자도 먹을 수 있는" 사회, 필요에 따라서 받을 수 있는 사회제도이다. 참으로 인간 서로서로가 차별이나 편견 없이 활발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문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를 유토피아 즉 이상향에 불과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 장애우들이 그러한 사회를 목표로 두는 것을 체념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체념한다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어떤 차별도 묵묵히 견뎌내야 하며 마침내는 죽음까지 초래하는 결과를 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장애우는 어떠한 괴로움을 무릅쓰고 서라도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투쟁이냐, 죽음이냐." 지금도 차별 받고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것이 결코 말로만의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장애가 중증이면 중증일수록 장애우는 매일 한 순간 한 순간이 죽음과의 대결인 것이다.
장애우 해방은 현재의 이윤 추구를 제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물론 자본주의의 유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능력주의나 관료주의가 잔존하는 과도기의 사회에서도 달성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투쟁은 정부나 행정에 화살을 행하고 동시에 이 계급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에서 화살이 쏟아져야 한다. 그것은 단지 "차별하지 않도록"이라는 도덕적, 윤리적인 문제는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장애우 해방이라는 입장은 자본가 계급이나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를 마음속 깊이 증오하여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같은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운동은 먼저 무엇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 장애우에 대한 차별이나 비인간적인 취급을 제거하여 빼앗긴 제권리를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장애우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건상자와 함께 지역 사회에서 생활하고 일해야 한다. 동시에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애우의 진짜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계급적인 투쟁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일상적인 과제로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투쟁의 최선두에 장애우 자신이 서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피차별 인민 대중에게 있어서 스스로를 차별이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 장애우에 관한 한은 이 원칙은 단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장애우가 차별과의 싸움에 나서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신적, 물리적 공간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장애우가 생활하고 이용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현재의 거리 구조만 봐도 중증장애우는 한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게다가 중증장애우는 용변이나 식사 등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필요한 것조차 개호자의 존재가 불가피하다. 책을 읽고 학습을 하며, 문장을 만들고 선전지를 뿌리는 등의 운동을 진행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의 모든 행위에도 건상자의 손을 요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로 건상자에 의한 이용주의를 낳게 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장애우의 현실에 대하여 극히 일부를 논한 것만으로도 장애우 운동의 어려움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이러한 많은 어려움과 싸우면서도 집요하게 장애우의 손에 의한 장애우 운동을 찾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글/구스노끼 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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