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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특집 1] 장애우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본문

<Ⅰ. 머리말>
 장애우 문제는 전시대에 걸쳐 존재하고 있다. 특히 장애발생이 더욱 많아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우 문제는 철저히 왜곡된 채 심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장애우 문제는 정치·경제·사회 등 총체적인 구조 속에서 바라본 것이 아닌 개별화된 한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극복을 위한 노력 또한 총체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개인과 개별적 집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애우 문제가 "장애우"라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현재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다양한 모순에 의해 파생되는 것인 만큼 그 극복 역시 개별적인 것이 아닌 문제를 파생시키는 모순의 제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랬을 때만이 장애우는 지금까지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라는 자랑스럽지 못한 이름에서 벗어나 역사와 사회발전의 주체로서 당당히 서게 될 것이다.

 본 글에서는 지금까지 잘못된 장애우 운동을 비판하고 진정한 장애우 운동, 장애해방운동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장애우 문제에 대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장애우 운동 이론이 정립되었어야 함에도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함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다만 지금 장애우가 억압받고 차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장애해방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이고 논리적이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의견을 적어보았다.

<Ⅱ. 몸말 및 맺음말>
 지금까지 장애우에 대한 정의는 "신체적인 결함에 의해 사회생활에 영속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장애우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의는 "신체적 장애라는 이유 때문에 지속적으로 사회구조 속에서 차별·소외를 받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장애우는 단지 장애를 가졌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유형·무형의 온갖 차별과 소외를 받고 있다. 신체의 부분적 결함은 그 사람의 인격과 능력 등 모든 것을 부정한다. 장애는 언제나 열등한 인간이 되고 아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부정적 시각에서 비롯되는 대다수 장애우의 삶은 생존권을 박탈당한 채 기생적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다. 어떠한 능력이 있어도 취업의 기회가 봉쇄되어 있고, 혹 자립작업장에서 노동하는 경우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며, 거의 대다수의 장애우는 구걸로 자기 삶을 유지해 가고 있다.

 또한 장애우를 위한 특수교육과 전문적인 특수교사의 미비, 장애우가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의 부족, 장애우의 삶을 저급한 감상에 호소하는 문화 등은 장애우를 더욱 특별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우는 자신의 삶, 자신의 존재가 결코 자랑스럽지 못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사랑과 동정, 그리고 연민을 뜨겁게 자아내는 대상이 되고 있다.
 산업사회이전의 장애발생은 질병 등 자연발생적인 원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은 산업과 과학문병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구조적 원인이 보다 본질적이다. 질병 등에 의한 장애발생이 있더라도 이는 국가의 보건시책의 미비에서 오는 것이고, 교통사고는 교통정책의 미비, 공해와 산업재해 등에 의한 장애발생은 기업의 최대 이윤만을 생각하는 자본의 논리에서, 그밖에 전쟁, 약물 중독 등 모든 원인은 사회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장애발생이 자연발생적이든 사회구조적 원인이든,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돌려졌다. 따라서 장애를 입은 개인은 자신의 운명과 부모를 탓하고 자신의 삶을 자포자기해서 되었다. 또한 자신의 장애극복을 개인의 끈질긴 노력과 타인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장애우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 이를 통해 현재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는 장애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장애우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4백만이며, 고통의 억압받는 상황에 처해있다. 대다수의 장애우의 현실을 외면하고 개인의 성공이 장애우 문제의 영원히 억압 속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다.
 그간 장애우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노력이 있었다. 호소와 청원이 그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갸륵한 감정에 호소하여 일시적으로 문제들을 해결한 예는 수없이 많다. 또한 정부나 언론, 기타 기관에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청원도 많았다. 그러나 호소와 청원은 장애우 문제의 본질을 덮어둔 채 이루어진 미봉책이었으며, 오히려 장애우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봉사와 선교는? 장애우를 상대로 한 봉사·선교 단체는 수없이 많이 있다. 물론 장애우들에게 위안과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 감사히 생각한다.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활동과 장애우를 구원하려는(?) 선교 활동을 통해 자기 삶에서 희망을 얻은 장애우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우 문제의 극복은 장애우들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치열한 싸움을 전할 때 가능하다. 오히려 봉사와 선교활동은 장애우들을 자기 문제 극복의 주체로 설 수 있게 한 것이 아니라 타성에 젖게 하고 자기 문제를 관념적으로 사고하게끔 만들었다. 이제는 봉사와 선교가 장애우를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진정한 장애우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적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장애우 문제 극복은 복지정책으로 귀결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복지 정책이 민중의 저항을 무마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장애우 복지정책 역시 장애우 문제를 은폐하려는 현 정권의 지배논리일 뿐이다.
 88년 서울 올림픽과 장애우 올림픽을 치루면서 대한민국은 세계의 초점이 되었고, 노태우 정권은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장애우 올림픽의 성공적(?)으로 끝나자 장애우 복지의 불모지인 대한민국을 장애우 복지 선진국임을 대대적인 선전을 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구걸하는 장애우, 자살하는 장애우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복지에 대한 기대는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또한 정립회관을 비롯한 장애우 시설 단체의 비리가 속출하고 있고, 사이비 사회사업가들은 장애우들은 장애우를 이용해 치부를 하고 성폭행마저 서슴치 않는 현실에서 복지정책은 장애우 문제를 왜곡·은폐하는 수단에 다름 아니다.
 장애우 문제의 진정한 해결과 극복은 무엇을 통해 가능한가? 그것은 장애우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투쟁 방법 모색, 장애우의 의식화와 이를 바탕으로 투쟁 방법 모색, 장애우의 의식화와 조직화, 즉 장애우 운동일 것이다.
 장애우 운동은 장애우들을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장애우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을 철폐하고, 장애해방을 이루려는 것이다. 바로 장애해방운동이 장애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현재 모든 사회운동은 한국사회의 변혁을 지향하고 있다. 이 땅의 4천만 민중은 잘못되어진 사회구조가 배출하고 있는 모순에 의해 공통으로 억압과 착취를 받고 있으며, 이러한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은 "운동"에 의해 가능하다. 각각의 부분운동은 자기 운동의 특수성에 맞춰 투쟁하면서 또한 변혁운동이라는 일반적인 범주에 속해있다. 즉 각각의 운동은 자기만의 이익을 고집하지 않고 이 사회의 공통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것이다.
 장애우 운동 역시 "장애우 운동"이라는 자기 범주를 지키면서 변혁운동의 부분운동으로서 위치 지어야 한다. 모든 민중의 문제가 그렇듯이 장애우 문제도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화되고, 물질중심에 의해 인간성이 파괴되고,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구조와 이를 토대로 성립된 정치·사회·법, 문화 등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우 운동은 여타의 변혁운동과의 연대를 튼튼히 구축해야만 한다. 그랬을 때만이 장애우 운동의 투쟁역량을 담보해 내고 올바르고 과학적인 이념의 정립이 가능할 것이다.
 계속해서 장애우 문제, 장애우 운동을 장애우만의 문제, 사회 변혁과 전혀 상관없는 운동, 정치성의 철저한 배제를 외칠 때 장애우 운동은 집단 이기주의로 빠지게 되며, 모두로부터 외면당하게 될 것이다.
 장애우 운동은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과제, 즉 사회 민주화, 남북통일, 경제정의 실현 등을 이념으로 삼고, 이 안에서 장애우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
 이제 장애우 운동은 장애우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과학적 이론의 무장으로 힘차게 전개되고 있다. 장애우 운동의 전진은 장애우가 여전히 사회적 차별과 억압 속에서 신음하는가, 모든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고 사회와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고리이다.

 장애우 운동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가 있다.
 첫째, 아직까지 패배감에 젖어 있는 장애우 대중에 대한 선전·선동작업을 통해 운동의 당당한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대다수의 장애우는 심한 패배감에 빠져있다.
 그동안 어떠한 형태로는 노력을 했으나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믿는다. 장애우가 스스로 서지 않을 때 장애우 문제의 극복과 장애우 운동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장애우 운동 진영은 다양한 선전·선동 방법을 통해 장애우를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의식화해야 한다.
 둘째 조직의 건설이다. 현재 장애우 운동을 표방한 단체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덩어리만 크고, 사람만 많다고 해서 운동 조직이 될 수 없다. 더 이상 운동하지 않고 있는 거대한(?) 단체를 바라보고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뚜렷한 투쟁성과 운동의 전망을 내올 수 있는 전국적 조직의 박차를 가해야 한다.
 셋째, 과학적 이론의 무장이다. 과학적 이론 없는 운동은 발전할 수 없다. 장애우 운동론의 성립, 이를 통한 운동의 전개, 이것은 가장 시급하고 필수적인 과제이다.

 장애우 운동의 최종목표는 장애해방, 인간해방이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상을 철폐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 건설이다.
 정애우 운동은 지금까지 민중운동의 성과를 장애우 운동에서 전수 받아 장애우 운동의 이름으로 인간해방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노동자·농민, 도시빈민, 그리고 정의를 외치는 모든 민중들과 함께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할 것이다.    

글/이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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