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 장애해방이란 무엇인가
본문
<·전장련의 결성과 투쟁의 전신>
<전장련 결성되다>
준비된 제1회 개최일의 모습을 조금 돌아보기로 하자. 이 날은 동북, 관동, 구주 등 전국각지에서 40개 단체 160여명의 장애우, 노동자, 학생 등 장애우해방을 위해 싸우는 모든 단체의 대표와 개인들이 모였으며 오후 1시부터 밤9시가 넘도록 열띤 보고와 토론이 계속 되었다.
회의는 첫 발언 단체인 관서장애우 해방위원회의 의장의 인사로 시작되었으며, 이어서 의장단단에 관서아오지회의 다마다(玉田)씨와 관서장애우해방위원회의 요시다(吉田)씨를 선출한 후 각 단체의 소개와 투쟁보고에 들어갔다.
처음 이 회의에 유일한 전국단체로 참가한 전 일본 뇌성마비자협회·아오지연합회의 회장인 오꼬쯔까(橫塚)씨로 아오지회가 목표로 하는 장애우 자립과 해방의 의미에 관해서 간단한 문제 제기를 받고, 계속해서 동북에서 구주까지 순서대로 모든 단체의 문제제기를 받았다.
오후 6시가 넘어서면서부터는 전국조직의 필요성과 역할, 조직건설과 함께 당면한 과제로 7월의 제1회 전국교류대회에 관한 주제토론에 들어갔다.
먼저 기다마(埼玉)에서 취학투쟁을 해온 하끼시다(八木下)씨로부터 전국조직의 필요성에 관한 강력한 의견이 나와 곧바로 이에 대한 토의로 넘어갔다.
특히 동북아 오이지회로부터 각각의 장애우의 독자성을 근거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문제제기가 있었으며, 더욱이 관서장애우연맹의 대표로 있는 아라끼(荒木)씨로부터『조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내용과 방향이 애매한 채로 결성하는 것은 이르지 않느냐, 이번에는 교류대회의 실행위원회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라는 제안이 나왔다.
더욱이 관서장애우연맹의 무라다(木田)씨로부터『이 회의에 가담하고 있는 아오이지회는 우리들의 투쟁(취학투쟁이나 아라끼재판투쟁 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앞으로 활동을 같이 할 수 있느냐?』는 반대의견이 나왔다.
이에 대해 아오이지회의 히로쯔까씨 등은『아오이지회는 전부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체로서 그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지금은 일치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단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반론이 나왔다.
또 관서 장애우해방위원회로 부터는『내실이나 방향성은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 이상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은 착각이다. 당면한 과제가 장애우에 가해지는 모든 차별을 제거하는 것이며, 자립과 해방을 위해 장애우를 중심으로 하는 단결체를 만드는 것임을 인정하면 만드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토론을 진척시켜가면서 공통의 방향성과 내실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며, 당면한 과제는 여름대회의 준비를 위한 토론을 통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생각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 후 활발한 토론이 계속되었지만 결국 궁성 장해위로부터『각 단체가 이 주제에 대해 충분한 토론을 할 수 없으므로 자세한 것은 이후 대표자회의에서 토론을 계속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중재안을 받아들여 토론은 일단 중단되었다.
10분간의 휴식시간을 이용해 전국의 각 블록에서 2명의 대표간사를 뽑아 간사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전국조직의 대표간사에 히로쯔까씨, 사무국장에 내가 선출되었으며, 다음 간사회를 1월말에 오오사끼에서 열기로 하고 전체회의를 다시 시작했다.
각 블록의 대표를 소개한 후 대표간사 히로쯔까씨로부터『참고 계속 노력합시다. 장애우의 해방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단결이 필요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끝으로 회의를 마쳤다.
이날 회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중증장애우를 포함해 많은 장애우들이 모였으며, 전국장애우연구회와 함께 많은 장애우들이 모였으며, 전국장애우연구회와 다르게 장애우와 적극적으로 회의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물론, 문제점도 많이 나왔다. 특히 각 단체가 사전에 주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별로 없어 토론이 충분하지 못한 것 등이 지적될 수 있지만 장애우해방운동이 시작된 이래 전국조직 탄생의 제 일보로서는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준비회의의 성공은 전장련 결성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 후 각 블록의 회의나 집회가 준비되면서 급속하게 전국 각지에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8월 오오사까에서 전장련은 그 첫 깃발을 휘날렸다.
결성대회 당일 준비회에 참가한 동지들은 모두 예상을 넘어선 1,500여명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에 놀랐으며, 이는 장애우해방운동의 확산과 힘을 우리 스스로 확인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 반 이상이 장애우 자신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장애우운동의 방향과 분명히 다른 결성대회가 된 의미 있는 일로서 우리 모두의 기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장애우정책의 전환과 전장련의 투쟁>
전장련이 결성된 당시의 정황은 한마디로 고도성장에서 저 성장으로의 전환기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동시에 정부의 장애우 정책의 전환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께다(池田) 내각은 처음 고도경제성장에 힘입어 복지국가를 선전하며 장애우·노동자에게 보랏빛 환상을 심어 왔지만, 70년대에 들어와 불황과 인플레라는 중요한 체제위기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복지국가라는 유토피아 역시 무너져「복지바로보기」등으로 변질되는 등 지배자 자신 스스로 복지국가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말았다.
『확실히 사회복지는 이전보다 다소 확대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것이며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상 자본가의 양보에는 자연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경기의 변동에 따라 지배자계급이 복지예산의 실질적 삭감, 건강보험의 개악, 국민의 자기부담 가중 등을 강요하는 것은 명백하다』는 지적은 확실히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60년대에 장애우의 요구와 분노를 미국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던 정부·지배자계급이 지금이야말로 그 본질을 드러내고 그들에 의해「역할에 입각해서」「위험한」장애우를 잘라버리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장애우복지연금은 일만팔천엔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누가 이 돈으로 생명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까다로운 소득제한과 장애정도에 따른 갖가지 제한을 두고 있기도 하다.
또한 오오사까의 휠체어용 주택은 그 수가 적을 뿐 아니라 그 밖의 주택에서 실시하고 있는 장애우 우선 입주 분은 불과 백 호도 안 되는 실정이다. 게다가 임대료는 만칠천엔과 이만구천엔으로 교통이 불편할 뿐 아니라 독신자는 제외되고 있다. 이러한 복지정책을 가지고 어떻게 이제 와서 복재개선 등을 떠들어 댈 수 있는가?
교육의 분야에서도 장애아가 지역보육소, 유치원, 학교에 들어가는 운동이 일어나자 정부와 문부성은 황급히「54년도 양호학교 의무화」방침을 내세우고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시를 강행하였다.
5년 전, 미국 뉴저지주의 최고재한소에서 나왔던「죽을 권리를 인정함」이라는 판결은 법률에 의한 장애우 살인을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74년의 우생보호법 개악과 양수체크, 그리고「장앵아낙태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중절은 허가하지 않지만 장애아가 태어날 가능성이 있는 경우는 중절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는 사상은 미국의 판결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판결을 단순히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장애아살인」의 사상은 결국 생산에 의해 인간을 재단하는 자본의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간단히 개인의「양심」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한층 심화되는 가운데 장애우를 시작으로 약자에 대한 공격이 보다 노골적으로 강화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형법개악, 보안처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공격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장애우의 굳은 단결과 해방투쟁의 전진에 의해 자본가의 정책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장련은 객관적으로 이러한 지배자 측의 공격이라는 새로운 정세 속에서 태어났으며, 결성당시부터 그것에 직면에 왔기 때문에 이후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우선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장애우를 중심으로 하는 굳세고 커다란 조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내실도 방향성도 애매하다』는 부정적인 견해는 잘못이다.
우리들을 둘러싼 정세의 어려움을 확인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애우자신을 중심으로 단결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높아져 가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해서 전장련의 결성과 강화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단순한 야합」으로 종결짓는 것을 거부하는 길은 오로지 장애우해방운동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의 자세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장련을 야합으로 종결짓지 않기 위해서는 각각의 단체가 자신들이 개척해 나간 분야를 모두 전장련의 장으로 끌어들어야 할 것이다.
『저쪽은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를 명백히 하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입장을 납득시켜 전장련 전체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자신들의 불충분한 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는가?』를 위한 철저한 토론과 통일된 운동의 추진을 목표로 모든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전장련 안에는 장애우의 해방을「노동자계급과의 결합」에서 찾고자 하는 흐름과「장애우해방은 어디까지나 장애우의 독자적 영역에서 추진해야 한다」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또한 교육 분야에서는 장애아학급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 노동에 있어서는 노동의 개념에 관한 의견의 상이함 등 중요하면서도 곤란한 문제가 많이 쌓여있다.
이들 문제를 토론하고 발전시키기는 것이 장애우해방 투쟁의 전진과 승리에 불가결한 요소일 것이다.
<3. 노선논쟁과 우리의 입장>
다음은 이후 장애우해방 운동의 정확한 방법을 모색해 가기 위해서, 또한 지금까지 우리들이 경험해온 노선상의 문제점을「아오이지회의 전장련 탈퇴」와「전국장애인문제연구소의 발달보장이론」그리고「관서장애우해방위원회의 분열」문제를 살펴보면서 정리해 보기로 하자.
<아오이지운동의 역사적 경과와 전장련 탈퇴배경>
1979년 3월 전국아오이지회의 전장련 탈퇴는 전장련 안팎에 커다란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는 돌연한 사태가 아니라 충분히 예측된 것이었다.
그들이 탈퇴의 이유로 내세우고 있는『행동강령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뇌성마비 장애우의 의견이 무시된다』는 이유들은 사실 경과상의 인식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에 관해서는 전장련전국간사회의 견해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며 여기에서는 아오이지운동의 내재적 문제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강경한 태도에 이르게 됐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들이 70년대 이후 일관되게 내 걸어온 장애우 자립의 사상과 자기 주장의 정신은 어느 장애우 단체보다도 날카롭게 핵심에 도달한 것이었다.
또 그들이 항상 문제 제기하고 있는 비장애우와의 긴장관계에 대해서도 장애우운동이 종종 비장애우에 대한 의견이나 보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생각할 때 그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애우해방운동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면서 아오이지운동의 한계도 명백해지고 있다. 그들 운동의 가장 큰 한계는 관념론적인 운동관에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행동강령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행동강령은 아오이지 사상의 정수가 들어있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생산적인 것, 건설적인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특히 강령의 뒷 부분에「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비장애우문명을 부정한다」든가「문제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 등은 앞에서 지적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관념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약 이들의 목표가 전국아오이지의 결성선언에 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들이 행동강령으로 내걸었던 것이 운동으로 현실화 될 때 거기에는 처음부터 명백한 한계성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고발의 눈」만으로는 결코 운동이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첫 번째를 부정하자마자 자신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무엇을 건설할 것인지가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이제까지 싸워온 사람들의 책임일 것이다. 물론, 장애우운동이 비장애우운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뒤처져있고, 또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들이 뇌성마비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운동은 기념비적 존재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이 참으로 차별사회의 변화를 목표로 한다면 자기들의 주장을 계속 견지해 나가면서 많은 장애우 동지들과 단결하고, 다가오는 사회에 주도권을 갖기 위해 노동자계급에 대한 비판이나 규탄을 멈추고 보다 구체적인 과제를 제시해 그들과 진정한 계급적 연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무척 어려운 문제지만 그것을 저버리고는 장애우의 자립도 해방도 단순히 구호에 그치게 되는 것이다.
아오이지회는 분명 전장련 결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76년 8월 전장련 결성 이후 아오이지운동도 그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어 77년 가을부터 관서의 경우 비장애우와 장애우관계의 존재방향을 둘러싼 대립이 발단이 되어 전국 아오이지 각 조직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요꼬쯔까씨의 돌연한 죽음으로 결국 전국조직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전국아오지회가 전장련으로부터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행동강령에 나타난 그들의 사고 방식과 현실의 차이에 의한 조직적 혼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요꼬쯔까씨 후임으로 회장이 된 요꼬다(橫田)씨는『비장애우나 다른 장애우와 운동을 함께 해왔지만 아오이지사상에 눈뜬 뇌성마비장애우의 단결만 약화시켰다』는 생각에서 전장련에서의 탈퇴를 조직재건의 계기로 삼으려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운동과 사상에 대한 철저한 점검을 회피하고 조직의 혼란을 그들을 둘러싼 비장애우나 전장련에 뒤집어씌우는 사고방식은 혼란을 더욱 깊게 할 뿐 조직의 재건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도 전국아오이지회의 재건과 전장련에의 복귀를 강력하게 바라고 있지만 이러한 관행이 시정되지 않는 한 스스로 운동의 완전한 재생을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장애인문제연구소의 잘못에 대하여>
60년대 일본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시기에 조직확대에 일정한 성과를 거둔 전장연은 70년 후반 지배계급의 위기와 함께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다. 그것은 조직의 이완과 내부의 동요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기의 요인은 결론적으로 국가재정위기 상황에서 모든 요구운동=개량주의라는 막다른 길과 우리들을 시작으로 일어난 장애우해방운동의 거대한 전진이었다. 여기서는 그들의 오류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 정리해 보기로 하자.
첫째, 전장연은 장애우 차별을 단순히 민주주의의 과제로 밖에 파악하지 못해 장애우의 잠재력을 요구운동의 테두리 내에 묶어버렸다.
특히 전장연 지도부는 장애우의 요구가 자본주의의 뿌리까지 건드려야 하는 것으로 드러났음에도 그러한 요구를「과격한 행동」으로 치부하고「정치문제는 공산당에 맡기라는」관료주의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의해 비판받고 추월 당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노동운동을 경제주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는 노동관료 지도부와 같은 모양으로 장애우 자신의 운동의 자주적 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을 방기한 일본공산당의 하부조직화한 전장연은 자기들 요구의 실현을 의회에서만 찾았으며, 그 결과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은 선거에서 공산당의 표를 늘리는 일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재정위기를 복지축소로 극복하고 있는 제국주의적 정책에서 이러한 노선은 전면적인 파산을 가져올 뿐이다.
둘째, 전장연은『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사업이다』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을 무시하고 장애우운동을 장애우 자신들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문가나 부모에 의해 대행하고 있다.
지배자의 장애우 격리·말상 정책과 뿌리깊은 차별, 편견이 장애아를 갖고 있는 부모에게『이 아이만 없어진다면…』하는 생각을 갖게 하고 더 나아가서 장애아 살인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전장연에 모인 부모들의 대부분이『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시설, 특수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사실 장애아 살인의 사상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특히「정상적인 신체가 되는 것」만을 바란 나머지「정상적인 신체가 아니라면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장애우자신들의 생존권보장과 자립의 입장이 무시되고, 부모가 일방적·독단적으로 아이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커다란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 중에는『도대체 이 아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전장연을 지도하는 공상당원과 전문가는 이러한 부모의 바램을 교묘히 이용해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연구대상의 확보에만 전념하자는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이 운동의 중심이 되는 경우 전장연이 장애우의 이해에서 멀어져 갈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지도부중에는 장애우가 있지만 거의 엘리트 의식과 분파주의에 빠져 있어 한 사람 한사람이 장애우 차별과 투쟁하는 자세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대행주의는 필연적으로 장애우 자신의 자각을 더디게 해 운동의 올바른 발전을 방해하게 된다.
셋째, 발달보장이론은 장애우해방운동과 무관하다.「발달보장」이라는 말은 전문가 모두의 머리에 공산당의 정치노선과 부르주아적 학문체계가 뒤섞여 있다. 만약 그들이 참으로 노동자계급과 차별 당하는 인민의 해방을 목표로 싸우는 지식인이었다면 그들의 학문도 또한 부루주아 어용학자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떻든지 실제로 그들의 학문은 극히 체제 내적이고, 특히 사상이나 문화면의 경우 깊이도 신선함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이론에는 반드시「사회적」,「민주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계급성도 없기 때문에 결국은 지배자를 이롭게 하는 결과가 될 뿐이다. 그리고 발달보장이론은 그들의 이런 사상성의 전형적인 일례인 것이다.
특히『인간은 누구라도 발달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고방식은 옛날부터 고정관념이나 편견의 뿌리가 강한 일본의 경우 어느 정도 혁신성과 신선함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금세기 초 유럽의 교육학자나 심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발달보장이론은 그들 선구자의 이론에「횡적발달」또는「집단발달」등이 첨가된 것이지만 결국 애매하고 추상적이며 전체적으로는 유럽의 선배들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들의 의도가 어떻던지 현실적으로 그러한 사고방식이 지배자 측의『어차피 살려놓을 것이라면 훈련시켜 사회에 복귀시키고 노동력을 착취하자』는 의도와 일치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이 이 발달보장이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발달의 기본은 무엇보다도 차별과 투쟁하는 것이고 그에 의해 장애우 자신이 강한 의지와 주체성을 체득하면서 비장애우 한사람 한사람의 의식혁명(모든 인민을 해방하는 계급적 혁명)을 해 나가는 것이다.
중증장애우나 정신지체장애우는 차별과 투쟁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은 분명히 편견이다. 투쟁의 성격은 비록 다르더라도 차별에 맞설 수는 있으며 그것이 바로 장애우 생존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차별과의 투쟁을 통해서 장애우 자신들이 자립을 요구하면서 장애우해방을 목표로 함께 투쟁하는 것이 바로 장애우의 발달을 보장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중증장애우도 결코 차별하지 않으며, 지역 사회의 인민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장애우 자신이 모든 차별과 싸우는 노동자계급과의 긴밀한 결합을 통해 자신들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측면이 없는 발달보장이론은 장애우 해방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속>
글/구스노끼도시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