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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장애해방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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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장애우 해방운동소사

 장애우 자신에 의한 장애우 운동이 시작되어 온지 무릇 30년 그리고 장애우 해방운동의 역사는 이제 겨우 10년째를 맞이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길고 오랜 세월 심한 장애우 차별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우리들의 운동은 이제 그 첫 출발점에 서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계급사회의 성립과 함께 지배자 계급의 의지에 이하여 만들어졌고, 사회의 변천과 함께 그 질을 바뀌면서 강화되어온 장애우에 대한 차별이나 억압은 자본주의 위기가 다가오는 지금 또다시 새로운 양상으로 우리들을 엄습하고 있다.
 그것은 양호학교 의무화 실시 이후의 차별, 선별체제의 강화이고, 지방재정 위기를 빙자한 복지축소, 공격의 침해이며, 나아가서는 융화정책과 탄압정책을 일체화시킨 교묘한 공격이다.

 한편 국제장애우의 해 선전을 통하여 동경 융화를 선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효과가 없는 것에는 돈을 쓸 수 없다고 공언하기를 꺼리지 않는 정부의 자세, 그들은 일견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는 이러한 정책을 참으로 교묘하게 수행하려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공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장애우 스스로의 단결과 투쟁을 강화하는 것이 선결 문제인데 그와 동시에 본래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는 주인공이어야 할 노동자 계급의 자각과 투쟁도 또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의 노동운동의 현상은 반드시 우리들의 기대에 부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최근에 노동운동은 스스로의 해방을 목표로 싸우고 있는 우리들 장애우에게 절망감조차 주고 있는 형편이다.

 노사 협조를 권장하는 노동자에게 장애우 해방의 사상 따위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투쟁을 포기할 수 없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미래를 보다 더 무서운 격리와 말살의 길을 준비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러한 공격을 타파하기 위하여 끈질긴 투쟁을 계속하여야 하며,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문제제기와 규탄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근거로 우리들이 진행하고 있는 장애우 해방운동에 대하여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다시금 장애해방 운동 역사나 투쟁에 대하여 이해해주기 바라며, 그러한 토대 위에 우리들의 금후 투쟁의 전망과 노동자 계급과 관계의 연대 형태에 대해서도 가능한한 밝히고자 생각한다.

<1. 장애자 차별의 근거>
 
 ·장애우 정의와 장애우 차별
 최초의 장애우 개념부터 검토를 시작하여야 하는데 이 용어만큼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장애우란 용어의 뜻은 각 나라의 시대나 나아가서는 그것을 그 용어를 쓰는 사람에 따라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참고로 우리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체의 감각기관, 혹은 운동기관의 결점, 혹은 기능부족을 가지는 사람을 신체의 장애우라 부르며, 한편 지능지수가 75이하로 판정된 자는 정신박약자로 불리며, 또한 조울증상이나, 분열증상이 나타내는 등으로 진단되어 통상 이해하기 어려운 운동을 하는 것으로 강조되면 곧 정신장애우로 이름 붙이게 된다.
 또 신체 정신의 양면에 걸쳐 장애가 있다고 간주되는 자는 심신장애우라 불리며, 또 두 가지 이상의 장애를 함께 가지고 있는 자는 중복장애우라 불리고 있다.

 이에 대하여 1973년에 재활법의 제정으로 시작되는 일련의 개혁(명분론의 감을 씻을 수 없지만)을 진행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장애우의 정의를 "중요한 생활 활동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심신의 손상을 가진자"라고 기능적인 내용에 한정하고 있다.
 또한 1975년 제30회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장애우 권리선언에서는 "장애우란 용어는 선천적이든 아니든 간에 불구하고 신체적 또는 정신적 능력의 부전으로 인해 통상의 개인 또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을 확보하는 것이 자신으로는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불가능한 사람을 뜻한다"라고 보다 엄밀한 정의가 내려졌다. 이것도 앞에서 말한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지 신체상의 결손이나 정신상의 정상에 의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 결과 야기되는 사회생활상의 곤란이라는 소위 기능적 장애를 문제로 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다면 이러한 정의조차도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활상의 장애도 그 대부분은 그 장애우를 받아들이는 측의 설비나 조건, 나아가서는 그를 애워싼 사람들의 지원에 의하여 충분히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장애우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요인의 대부분은 그 사회의 양상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애우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까닭은 단지 전쟁이나 노동재해, 교통사고 등의 외적 요인에 의하여 장애우가 만들어진다는 현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나라의 차별이나 편견에 의하여 장애우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대개의 경우 장애자는 무섭다는지 장애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라는 든지라는 것과 같은 고정적인 예단과 편견에 의하여 그 개인의 인격까지도 결정한다.

 그러므로 장애우는 그가 속하는 사회나 집단에 의하여(특히 지배하는 사람들에 의하여)쓸모 없고 소용이 없는 귀찮은 존재, 위험한 자로 강조되어 소외되고, 배제되기에 이르며, 게다가 본래 누구나 모두 각기 그 신체나 개성 혹은 능력의 차이가 있고, 또 누구나 질병에 걸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어느 정도 고정화되고 또한 두드러지게 눈에 띠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장애우라는 딱지를 붙이게 된다.
 따라서 지배자가 장애우라 부를 때는 거기에는 장애우의 인격은 고사하고 그 존재조차 부정하는 사상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을 간파해야 한다. 고로 나는 장애우라는 용어나 개념이 원래 지배계급에 의하여 만들어진 딱지라고 인식하여 그러한 이상 이 말은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말을 되도록 쓰지 않도록 해야한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실제로 장애우의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상 아무리 심한 장애우도 결코 차별 당하지 않는 사회, 장애우를 차별하지 않는 인간의 의식이 창출될 때 즉 그 사람이 장애우든 아니든 문제시되지 않게 될 때 장애우란 용어의 개념도 아주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서야만 나는 이 장애우란 용어에 감히 괄호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단, 이 생각은 내가 속하고 있는「전장연」에서도 아직 확인되고 있지 않다).

 ·장애우 차별의 역사

 장애우의 역사는 격리와 말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 일본에 있어서는 부락차별과 마찬가지로 정의민주주의 체제하에서조차 형편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뚜렷이 그 존재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 이 불혹의 역사는 대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발전 변화되어 왔는가, 그리고 그 원인은 무엇에 유래하는가, 그것을 해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함과 동시에 곤란한 과제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장애우의 역사에 관한 문헌 그 자체가 매우 적고, 게다가 이 연구에 착수하는 연구자도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나 자신은 시각 장애로 인해 얼마 되지 않는 문헌조차 자유롭게 읽을 수 없고, 지금까지 이 문제에 착수 할 수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세가지 사람들의 연구를 참고로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들의 연구를 살펴보면(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장애우의 차별의 발생은 계급사회의 성립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계급 시대인 원시 공동체의 사회에서도 장애우는 존재했을 것이며, 식량부족이나 적으로부터의 습격 재해시에는 아마도 제일 먼저 장애우가 그 희생에 노출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볼 때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비록 장애우라 할지라도 그 집단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며 적어도 의식적으로 장애우가 말살되었다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나와는 입장을 달리하는「전장연」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 사람인 고오노 가스노키씨는 그의 저서 일본의 장애우의 과거 현재 및 미래에서 우리 일본에서의 장애우의 차별의 발생의 기원을 고대 천황제도 사회로 보고있다.

 그는 기원 8세기 초엽에 편찬된「고사기」(일본 수기가운데서)(마루과 신화를 세밀하게 분석하여 거기에 여성 차별과도 결부된 장애자 차별의 전재를 지적하고 있다. 그의 저서를 요약하면「신세」시대의 이부나기와 아부나미가 데이트를 했을 때 여성신이 아부나미쪽이 먼저 입을 열고 적극적으로 프로포즈를 했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들은 세 살이 되어도 일어설 수 없는 장애우가 되어 곧 갈대로 만든 배에 태워 강에 띄어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저자인 고오노씨는 중세의 설화집인 일본 여위기에 적혀있는 댕기라는 승려가 악마의 화신으로서의 장애아를 강에 버린 얘기나, 고대 희랍에서 전해지는「불타 그 영혼전」등도 소개하면서 장애우 차별의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이「불타 그 영혼전」의 상세한 내용이나 그 배경에 대해서는 맥은 오씨가 그 저서「세계 교육사」에서 쿠란주의 연구소인 고대 도시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분석을 가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고대 희랍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에서는 아이들은 부모가 마음대로 양육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각 부족의 장로들의 검사를 받게되는 것이 의무화되어 검사의 결과 잘못 태어나 모양이 이상하면 살아 있더라도 자기를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좋지 않으므로 타이그램프의 기슭에 있는 아프터테이라는 깊은 연못가 같은 곳에 버려지게 된다 라고 하였다. 또 로마를 건설했다고 하는 로물푸스가 불구 기형이 아닌 남아는 모두 양육하라. 여아는 장녀만을 양육하라. 라고 민중에게 명령했다는 얘기도 소개되고 있다.

 다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고오노 씨가 본 저서 가운데서 원시 공동체서의 장애아 살해를 단지 부득이한 일이라고 변명하며 간단히 다루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계에서는 약육강식이라는 법칙과 공동체라는 형태가 병설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사상에서의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로 이어지는 계급사회에 있어서 지배자 계급은 전자의 법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스스로의 지배체제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우리들은 전자의 법칙을 지양하고 후자를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원시사회의 장애아 살해를 차별이란 말로써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꺼림칙한 사실을 특히 건상자인 사람들이 뚜렷하게 스스로 반영하지 않게 되면 다시금 그것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최근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장애우 살해에 대하여 많은 대중이 살해한 부모입장에서 동정을 보이고, 장애우는 살해되는 것이 좋다고 단정하고 있으며, 그리고 고오노씨가 속하는「전장연」조차 이는 정부가 나쁘기 때문이다. 시설만 만든다면 부모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오베에 대학의 이또우 료우지 교수의 저서 장애우 교육의 사상에는 "만약 장애아를 죽여도 처벌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자식을 죽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80%이상의 사람들이 죽인다고 대답하였다는 데이터가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장애아 살해의 사상이 얼마나 깊게 대중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장애우의 역사는 매우 길고 그 뿌리도 극히 깊으며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며 너무나도 단순한 일반화나 유추는 도리어 문제의 소지를 애매하게 할 수 도 있다. 확실히 장애우 차별은 다른 많은 차별이 그러한 것처럼 계급사회의 구조적 필연이며, 그것은 항상 지배자 계급의 지배를 관철하기 위한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점만을 본다면 고오노씨의 연구는 참으로 우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전장연」의 다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조의 문제에만 눈을 돌리려 하고 있다.

 또 하나의 현상이 결여되고 있다. 장애우 차별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는 그것이 계급사회의 필연적인 산물이라고 보는 것과 동시에 자연과 인간과의 사이의 모순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즉, 자연을 이용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인간은 동시에 스스로도 자연계의 일부분이며 자연계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장애를 인식함에 있어서는 어쨌든 인식한다는 것은 차치하고 스스로의 생활방식에 있어서 긍정하는 것조차 극히 곤란한 문제이다. 즉 장애우 차별은 계급사회의 구조 그 자체와 거기서 파생하는 능력주의의 가치관 그리고 아직껏 극복되지 않은 자연과 인간의 모순 등 여러 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뒤얽혀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장애자 차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관점에서 추구할 필요가 있으며 전술한 고오노씨를 비롯한 많은 이론가나 전문가들처럼 성급하고 도식적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까지 할 수 있다. 확실히 마르크스나 엥겔스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상부구조의 여러 가지 계기도 또한 현저하게 투쟁의 형태를 규정한다고도 설명하고 있으며 또 자연과 인간관계의 모순을 지양하는 것의 중요성과 곤란성도 강도하고 있다.

 그런데 기계적 유물론자가 많은「전장연」은 고오노 씨로 대표되는 인물인 것처럼 장애우 차별을 구조적인 측면에서만 보려고 하며, 실제적으로는 정치적 야심에서 구조의 문제를 결코 입밖에 표현하지 않고 차별의 문제를 오로지 자민당 정치의 문제로 살짝 바뀌치기 하고 있는데 대중의 한 사람 한 사람 사이에 있는 차별의식이나 모순을 다루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진짜 적은 정부, 자민당과 독점 자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민주적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차별의식을 가질 턱이 없다"라고도 말하며, 비록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민주연합정부로부터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과정에서 제거된다"라고 공언하고 있다. 게다가「전장연」은 한편에서 이와 같이 기계적인 정치주의를 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밤낮으로 몸을 저주하고, 혹은 내 자식의 장애에 실망하면서 어떻게 하든 좀더 나은 몸으로라고 염원하고 있는 장애우의 부모들을 조직하기 위해 지금은 장애우 차별 자체와의 싸움을 애매하게 하는 발달 보장이론을 채용하기에 이르렀다. 위기에 이르러 그들은 "장애우 차별의 원인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면서 발달론에 합리적 근거를 부여하고 그리고는 마침내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차별을 극복하는 것이 첩경이다"라고 하여 장애우나 장애우의 보모들을 융화주의의 길로 이끌고 있다. 결국「전장연」의 차별론에 있어서는 장애를 극복케 하는 전문가와 정치 민주화를 지도하는 일본 공산당의 역할이 가장 중요시되어 주체가 되어야 할 장애우나 그 부친은 대상자이거나 기껏 해서 뒤를 떠받쳐주는 후원부대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는「전장연」의 차별론은 장애자의 해방에 있어서 방해는 될지언정 도움은 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얘기한 점도 아직은 매우 추상적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론을 급히 서둘 생각은 없다.

 장애우 차별의 해명은 인간의 해방에 직접 관여할 만큼의 중요한 과제이며, 그러니 만큼 앞으로 충분한 실천과 논쟁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들 두 분의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와 같이 일본에 있어서는 고대 천황제, 희랍 로마에 있어서는 노예제와 같이 모두가 계급사호의 성립과 함께 지배자 측으로 보아서 귀찮다고 강조된 장애우는 그들의 의지에 따라 배제되거나 말살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자의 논리는 중세의 봉건제도 사회, 현대의 자본주의사회나 사회주의라 일컬어지는 여러 나라들에 있어서도 그 형태는 바뀌어 졌지만 일관해서 계속 되고 있다해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봉건사회에 있어서는 영주에게 연공미를 받치거나 전투요원으로 일할 수 없는 장애우는 항상 길거리를 헤매는 방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으며 또 중증 장애우는 수용시설에 갖혀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리 대상이 되는 것이 상례였다. 한편 중세의 구라파에 한때 유행되었던 소위 마녀소탕의 대상자의 대개는 정신장애우였다고 여겨진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영국에 있어서의 구빈법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인도주의 입장에서 장애우를 구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지만 이러한 경향은 일본에 있어서는 명치유신 이후에 이루러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에도 아직 옛날 인습이나 종교적 편견이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있어서 장애우를「제앙」이라고 인정하여 꺼리는 사상이 민중 속에 남아 있었다. 게다가 겨우 확산되기 시작한 이 구제의 움직임조차 전쟁의 준비가 진행될 때마다 탄압의 대상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의 위기에서는 장애우 포기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외쳐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에서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특히 독의 나치스가 안락사라는 명분으로 장애아 살해를 추진하였고, 나아가서는 유태인과 함께 많은 장애우를 가스실에 집어넣었다고 하는 혐오스러운 역사가 아직도 우리들 기억에 새롭다.
 이러한 잔악한 행위를 가능케 하는 사상적 근거를 언론이 하끼광개 사회다윈주의라 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사회 다윈의 의미라 다윈의 생존 경쟁과 자연 도태의 이론을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여 생물계에 있어의 우열의 법칙을 사회에 있어서 생존투쟁의 결과 우수한 자는 행복한 생활을 하여 번영하는 한편 열패자는 재산도 없고, 빈곤과 병역으로 인해 불행한 생활을 하는데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어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고 말하며 나아가서 인간사회에 있어서 투쟁은 생물계의 생존경쟁과 전쟁까지도 긍정하는 이론을 만들어낸다 라고 말한 것이다.

 저 악명 높은 우생보호법의 기초를 이루는 우생사상도 이와 마찬가지 입장에 근거하는 것인데 작년 주간문춘의 3월 21일호에 발표된 고오찌 대학 교수와 다나베 승일씨의 논문은 이러한 사상의 복권확대를 기도한 것으로서 엄히 규탄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장애우의 차별의 기본은 가벼운 장애우의 최저변 노동자로서의 이용과 중증장애우의 격리 말살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가 노동력 상품이라는 가치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회에 있어서는 말하자면 필연적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근거가 자본의 이론으로서의 능력주의, 생잔제일주의에 있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중증 장애우의 많은 사람을 무권리 상태인 채 방치하며, 혹은 집단부락이나 정신병원이나 수용시설 양호학교 등에 수용하여 격리하고 마침내 장애우는 살아 있어도 쓸모 없다 하여 그 생존권조차도 부정하게되는 것이다. 최근 1, 2년 사이에 다시금 증가하기 시작한 장애아 살해는 경기가 불황의 조건상태에서 실업의 증가나 생활 파괴의 기인한다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뿐만 아니라 정부 지배자 계급이나 일반 대중, 나아가서는 재판소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장애우 부정의 이론에 의하여 한층 조장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고도 경제성장 시대에는 저임금의 노동자로서 고용되었던 경도장애우는 이미 2∼300만을 헤아리는 실업자로 전락해 부락차별이나 민족차별과 마찬가지로 사태의 수습 방법으로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처럼 떠들썩하게 떠돌던 개정 고용촉진법도 뚜껑을 열고 보니 허점 투성이라는 것이 폭로되었으며, 특히 대기업에 있어서 고용율 미달이 많다는 것이나 관공서에 있어서 고용율의 신장 때문에 고민이라는 실태를 보면 정부 독점자본의 자세가 일목요연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능력주의에 의거한·차별 선별체제와 교육의 형태가 진행되는 가운데 능력미달로 쫓겨나는 일이 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장애아라고 일컬어지는 어린이들은 더욱 배척 당하고 있다.
 그런데 약 10년 전부터 구미제국에서 급속히 고양되고 있는 소위 표준화의 움직임이 장애우 정책의 새로운 전환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자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애우 자신이나 관계자에 의한 끈질긴 투쟁의 결과지배자 측이 일정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였으며, 현재의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경제위기의 전항에 따라서 명분과 정책의 분열이 표면화하게 되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사회주의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소련에 있어서는 장애우의 조기 선별이나 격리의 체제가 더 한층 강화되고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의 장애우 차별이 능력주의뿐만 아니라 일부 지배층이 스스로의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한 관리주의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장애우 차별의 성립은 계급사회에 있어서의 지배자의 논리 및 그 정책의 의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밖에도 종교적 편견이나 장애우를 배제하는 감각, 나아가서는 지배자의 분단의 의도에 얽혀 있는 대중상호 비교와 경쟁의 의식 등이 복잡하게 뒤얽혀서 형성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뿌리는 무엇보다도 깊다고 할 수 있다.

글/구스노끼 도시오

 

작성자구스노끼 도시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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