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걸음 논단] 장애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함께걸음 논단] 장애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본문

<○ 장애우 문제는 오늘의 문제이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장애우 문제는 말 그대로 "오늘"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오늘의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라는 물음과 같은 것이다. 요컨대 장애우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강요되어 왔고 또한 우리도 알게 모르게 승인하여 왔던 장애문제에 관한 하나의 잘못된 관점, 즉 장애우 문제는 개인적이고 우연적인 문제라는 관점을 깨부수고 올바르게 된다. 우리는 아주 확고한 태도로 오늘의 사회에서 장애우 문제가 사회적으로, 필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인식을 견지해야 한다. 나아가 장애우 문제가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장애우 문제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확립된 인식을 통해 우리는 궁극적인 장애해방을 위한 집단적 사회운동으로서의 장애우 운동을 힘차게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이 사회의 기본논리는 무엇인가?>
모든 사회는 자신을 유지, 발전시키는 하나의 기본적 원리, 혹은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의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라고 물을 때 사실은 그 사회의 기본적 논리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셈이다. 이 기본적 논리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의 성격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기본 논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자주 우리 사회를 자본주의사회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논리를 밝힘으로써 위의 물음에 일단 답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이 자기증식을 위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최대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을 중심 축으로 하는 사회이다. 이처럼 자본의 자기증식 욕구, 최대이윤 추구를 흔히 자본의 논리라고 하는데, 이 자본의 논리가 자본주의사회, 따라서 우리사회의 기본 논리가 되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는 장애우 문제의 성격도 결정한다. 즉 우리가 장애우 문제를 말할 때 우리는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장애우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의 장애우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이며 일차적인 관점이다.

< ○한국의 자본주의는 어떤 발전단계에 와 있는가>
그런데 일단 형성된 자본주의 사회는 형성된 모습 그대로 고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한다. 따라서 자본의 논리도 일정하게 변형된다. 또한 다 같은 자본주의사회라 해도 모두 일치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자본주의는 존재한다. 당연히 자본의 구체적인 논리도 관철되는 모습이 차이가 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의 자본주의는 어떤 발전단계에 와 있으며 그 구체적인 특수성은 어떠한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독점자본주의였다고 인정된다(일제치하인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데 이것에 관해서는 이론적 쟁점이 많이 있는 데다가 이 글의 성격상 논의할 수는 없겠다.) 독점자본주의 사회는 독점자본이 사회의 경제력 정치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이다. 한편 한국 사회는 제국주의 독점자본(특히 미국의 독점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신 식민지 사회이다. 이상을 명제화해서 말하면 한국사회는 제국주의 독점자본이 우월한 지위를 가지면서 국내의 독점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이다. 자본의 논리는 식민지 초과이윤(제국주의 독점자본이 독점적 초과이윤에 더하여 초과 수취하는 이윤)과 독점적 초과이윤(독점자본이 독점이라는 우세한 지위를 이용하여 평균적 이윤을 상회하여 초과 수취하는 이윤)을 보장하는 형태로 관철된다. 이러한 자본의 논리를 독점자본의 논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 초과이윤과 독점적 초과이윤은 민중의 엄청난 희생(대표적인 것이 저임금, 저 곡 가이다)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민중의 항거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내외 독점자본의 지배를 안정시키기 위해 민중의 항거를 봉쇄할 수 있는, 폭력에 기반을 둔 억압적 정치체제가 필요하게 된다(우리의 여의도집회가 폭력적으로 탄압 받은 것을 상기해 보라) 이상에서 서술 한 것 역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적 관점이다.

<○ 장애우 문제는 자본의 논리에서 파악하여야 한다.>
자본의 최대이윤추구, 그것의 연장으로서의 식민지 초과이윤 및 독점적 초과이윤의 추구는 현재 우리 사회의 장애의 확대 재생산 및 장애우의 참담한 사회적 소외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이다.
물론 장애우는 모든 인류역사에서 존재하여 왔으므로 장애우 문제 전체를 자본의 논리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사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장애우 문제는 인간의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비롯한 외부세계를 완전히 지배할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장애우 문제는 장애우 수의 규모나 비참한 사회적 소외 상황에서 전례가 없는(한국의) 자본주의에 특유한 내용과 형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관되게 (신 식민지 독점) 자본의 논리에서 파악하지 않는 한 장애우 문제의 근본적, 과학적 인식은 있을 수 없다. 장애의 발생, 장애우의 사회적 소외는 자본의 논리와 결코 떨어질 수 없다.

<○ 자본의 유일한 목적은 최대이윤 추구이다.>
누구에게 장애라는 재난이 일어나는 가는 우연적인 것이지만 장애의 발생 그 자체는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자본의 논리와 결부되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주지하듯이 자본주의의 본격적 발전의 동력은 기계제 대공업이었다. 기계제 대공업은 인간의 생산력 발전에서 획을 긋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계제 대공업은 각종의 환경오염을 가중시켜 왔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환경, 즉 하천, 산림, 토양, 대양, 대기를 오염시켜 왔고 또 오염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발전 사, 즉 이제까지의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 사는 자연파괴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계제 대공업 자체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파악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기계제 대공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기계제 대공업에 있다.(물론 지금 기계제 대공업 자체에서 유래하는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도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자본의 유일한 목적은 최대이윤추구이다.

즉 자본은 자기 앞에 있는 최대이윤만을 향해 달려가지 뒷일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공해를 방지하고 최소화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은 최대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에게는 낭비일 뿐이다. 그래서 환경오염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되어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자본 그 자체에도 위험한 수위에 다다랐을 때에야 비로소 반응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마저도 수많은 개별자본들은 끊임없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이처럼 파괴된 자연환경 속에서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장애가 대규모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유해한 식품, 약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짐작은 확신이 된다.
한편 산업재해에 의한 장애는 자본의 논리가 어떠한 우회 과정 없이 순수하게, 직접적으로 관철됨으로써 발생한다. 노동시간을 연장할수록, 노동강도를 높일수록 이윤은 더욱 많이 획득된다. 또한 자본은 이윤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는 모든 비용을 줄임으로써 최대이윤을 확보하려한다. 이윤은 노동자의 생명과 반비례한다. 노동시간의 연장과 높은 노동강도는 노동자의 육체적 피로 도를 높인다. 사람의 몸은 피곤할수록 주의력, 집중력이 떨어지게 되는 법이다.

또한 위험한 작업을 할 경우 안전 장치나 안전시설이 갖추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장치나 시설 등은 자본에게는 낭비일 뿐이므로 노동자는 재해의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장애는 이외에도 수많은 자연적, 사회적, 정치적 요인들에 의해 필연 화된다.
이들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와 결부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전쟁, 핵, 마약 등이다. 이들에 관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이들을 고찰하는 경우에도 사회적, 역사적 연관을 무시한 채 그 자체로 고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만을 지적해 두고 싶다.

<○ 자본의 논리가 순수하게 관철될수록 장애는 양산된다>
우리는 이제 장애의 발생과 자본의 논리 사이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다. 자본의 논리가 순수하게 관철될수록 장애는 양산된다. 따라서 자본의 논리는 그것이 순수할수록 더욱 비인간적인 것이다.
한국자본주의는 한 점 티 없이 순수한 형태로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켜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주지하듯이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였다. 그것은 철저하게 대외의존성을 강화함으로써 가능했다.(물론 그 이전에도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대외의존성 강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금융 적, 기술적 종속의 심화와 수직적인 국제적 분업체계에의 완전한 편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자본의 먹이사슬이 만들어졌다. 제국주의 독점자본은 식민지 초과이윤을 수취한다→국내 독점자본은 식민지 초과이윤을 종속의 대가로 지불하는 한편 독점적 초과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중소자본 및 근로민중을 수탈한다→내외 독점자본에 하청 계열화된 중소자본은 자신들의 이윤 일부가 수탈 당하는 상황에서 자본축적의 위기를 노동자에 대한 착취에 강화하여 극복하려 한다. 이러한 자본의 먹이사슬은 모든 부문에서 근로 민중에 대한 최대한의 수탈이 진행되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식민지 초과이윤이 항상 적으로 해외로 유출되는 상황은 국내자본들로 하여금 자신의 논리를 더욱 강화시키고 더욱 순수하게 관철시키도록 강제한다. 그 표현이 바로 저임금, 저 곡 가, 세계 최장시간노동 등이다.
지금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공해문제는 뒷일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그리고 염두에 두기 힘든 한국 자본주의의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뉴스에 자주 보도되는 무단 폐수 방출을 생각해 보라, 자본의 논리란 이런 것이다.)심각성에서 공해문제에 못 지 않는 산업재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가 산업재해 건수나 사상자수에서 세계 제 1위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치를 보자, 산업재해자수는 미국·일본에 비해 7∼8배, 말레이시아, 태국, 대만에 비해서는 2∼5배이다. 1970년∼1986년 간에 1,792,990명이 산업재해를 당했으며 그 중18,620명이 사망하고 183,262명(1974년∼1986년)이 신체장애의 재해를 당했다. 1987년 한 해 동안에도 142,500명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1988년에는 신체장애의 재해를 입은 사람만 26,239명이다. 결국 우리는 5년마다 한 번 꼴로 6·25전쟁규모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이 땅의 자본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안정장치, 안전시설을 갖추느니 산업재해 보상금을 주겠다. 그 쪽이 비용이 덜 드니까 이 반인간적인 자본의 논리, 과연 무섭지 않은가?

<○ 400만 장애우의 대다수도 노동자 계급에 속한다.>
이제 장애우의 사회적 소외 및 장애우 복지정책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장애우의 사회적 소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장애우 대다수의 실업상태, 취업장애우의 기아적 저임금, 절대적 빈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 곧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노동자계급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400만 장애우의 절대 대다수도 이 노동자 계급에 속한다. 고용되어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애우는 일반 노동자들과는 다른 사정을 안고 있다. 장애우가 노동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특정부분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에게는 이윤의 생산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는 제반 물리적 장치에 추가적으로 투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본은 그것은 단호하게 낭비라고 말한다. 자본은 이윤을 저하시키는 일을 결코 자발적으로는 하지 않는다. 이처럼 생산의 목적을 이윤의 취득에 두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장애우의 실업상태는 필연적이다. 용케 취업이 되더라도 일반 노동자보다 더 낮은 저임금이 강요되리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가 장애우 복지정책을 포함한 사회보장정책에도 적용된다. 요컨대 순수한 자본의 논리라면 사회 보장정책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국가는 원래 모든 정책의 핵심을 자본의 원활한 운동에 놓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란 자본의 운동이 원활해야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국가는 자본의 전체이익을 대변한다.(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주로 독점자본의 이익을 대변한다.)이러한 국가의 성격에 주목하여 흔히 국가를 총 자본가라고 부른다. 한편 자본의 논리가 비인간적임이 점차 명확해 짐에 따라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민중의 저항이 거세어졌다. 이에 총자본가로서의 국가는 전체자본의 궁극적인 이익을 위해 부분적인 양보를 하게된다. 이것이 바로 사회보장정책이다. 이처럼 사회보장정책은 민중투쟁의 결과이지 자본의 시혜가 아니다. 그렇지만 부분적인 양보를 하게 된 이면에는 자본이 양보를 할 수 있는 물적토대가 갖추어졌다는 사실도 있다. 흔히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매우 발전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식민지초과 이윤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회보장정책은 오직 자본의 근본적인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논리상 당연하다. 따라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조차 불황이 닥쳐올 때는 사회보장에 할당되는 예산이 최대한 삭감되는 것이 통례이다. 장애우 복지정책 역시 사회보장의 한 내용이므로 이러한 논리가 적용될 것임은 틀림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는 지극히 저열한 수준이다. 장애우 복지 정책은 전무한 것이라 해도 좋다. 이러한 상황에서 400만을 넘는 장애우의 절대 대다수는 자본의 논리에 온몸을 드러낸 채 극심한 사회적 소외상태에 있다. 이러한 장애우의 절대적 소외는 앞에서 여러 번 말했던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반민중적 성격의 연장인 것이다.

<○ 우리는 잘못한 적이 없다.>
전체 장애우를 주체로 하지 않고 소수의 뜻 있는 사람들에 이끌려왔던 이제까지의 장애우 운동은 청원적 성격의 운동이었다. 우리가 위에서 논의한 바에 충실히 따른다면 이러한 청원운동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우리의 요구는 청원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의 주장이다. 청원이란, 사실은 우리의 잘못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한 적이 없다. 또한 청원으로 장애우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이 청원운동의 치명적 약점이다. 왜냐하면 장애문제의 궁극적 해결이란 장애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청원운동은 잘해야 사후적으로 문제를 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요컨대 청원운동은 장애문제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확실히 올바른 이론없이 올바른 실천은 없다.

이제 장애우 운동은 거듭 태어나야하며 이미 거듭 태어나고 있다. 거듭 태어나고 있는 장애우 운동은 오직 400만 장애우 전체의 각성과 집단적 힘에 근거한 집단적 사회운동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반 공해운동으로, 반 전 반 핵 평화운동으로, 산업재해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반독점운동으로 다양한 차원으로 표현될 것이며 풍부한 내용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중운동과 연대해 나갈 것이다.
궁극적인 장애해방을 위한 우리의 운동은 이제 시작되고 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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