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그 삶의 현장을 찾아서] 부산 우리들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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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심가인 남포동, 충무동이 지척에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감안해 볼 때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게 전혀 뜻밖이다 싶을 정도로 마을은 개발이 안 된 조용하고 한가한 전형적인 어촌의 모습을 간직하고 누워 있었다.
얼마 전까지 국립동물검역소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해서 부산 사람들이 행정지명인 암남동 대신 흔히 혈청소라고 부르는 마을이 바로 이 마을이다.
이 마을 한 귀퉁이, 검푸른 바다를 마주보고 솟아있는 언덕배기 구석진 곳에 장애우 공동체 우리들의 집은 자리잡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 위, 흔히 사람들이 읊조리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이 아닌 언덕 위의 기와집으로 무심하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작은 동아리를 틀고 있었다.
현재 우리들의 집에는 소아마비 장애, 뇌성마비 장애, 하반신 장애, 근이양증 장애를 가진 장애우 식구들과 실질적인 운영자인 강성도 씨의 가정을 포함 모두 열 명의 식구들이 함께 사는 삶을 살고 있다. 장애우 식구들은 전부 다 서른을 넘긴 성인 장애우 들이다.
식구들은 특별한 외부 도움 없이 자개 일을 공장에서 하청을 받아다가 해주고 얻는 수입과 장애우 한 분이 영세민으로 등록돼 생기는 약간의 수입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틈틈이 박 공예 일도 하고 있지만 판로가 여의치 않아 물건만 만들어 쌓아두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생활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노동을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한 구차하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 우리들의 집 식구들의 한결같은 각오이다.
보통 아침 아홉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저녁 여덟시까지 자개 일에 매달리는 게 평상시 우리들의 집 식구들의 하루 일과이다.
요즘은 비철이라 조금 한가하지만 그래도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다음 달에는 굶어야 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들의 집은 우여곡절이 많고 굴곡이 심한 행로를 걸어왔다. 우리들의 집이 생긴 계기 그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이다.
우리들의 집을 처음 시작했고 현재도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강성도 씨(37세, 소아마비 장애)는 가족을 찾는 게 소원일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혼자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한다.
청소년기에 자개 기술을 배워 그 방면의 기술자가 됐지만 워낙에 자개 업이 영세업체가 많았기 때문에 통틀어 직장생활을 한 13년 동안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아 횟수가 6∼7년을 헤아릴 정도였고,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거지 생활을 해야 하기도 했던 뼈아픈 고통 속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강성도 씨는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이 없어야 되겠다고 참 많이 간절히 생각했다고 한다.
서울에 오래 있다가 부산에 내려와서 다시 직장생활을 한지 3년,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강성도 씨는 한동안 가족 찾기에 골몰한다. 방송, 신문광고 등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결국은 가족을 찾는데 실패하고 만다.
이어지는 좌절 속에서 헤어나오 질 못해 또다시 방황을 시작하고, 그러던 어느 날 방문하게 되면서 강성도 씨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소록도에서 일주일을 기거했는데 다녀보니 거기에는 저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나병은 천형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번 걸리면 완전하게 낫지를 못하는 병입니다. 살이 썩어 들어가고, 진물이 흐르고....그런데 거기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징그럽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게 없어요. 말 그대로 순수한 사랑으로 헌신하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저를 보고 그러더군요. 당신은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강성도 씨는 소록도에서 돌아오자마자 광안리 해수욕장 옆 남천동에 100만원 자리 방 한 칸을 얻어 비슷한 처지의 다른 장애우 두 명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그 때가 1982년이다. 남은 생을 자신보다 어려운 장애우들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수 없이 많이 자신에게 했다. 한다.
주로 자개 일과 목공예 일을 하면서 장애우들을 많을 때는 열세 명이나 데려다가 같이 기거하면서 기술도 가르치고 형편 닿는 대로 각자 노력한 만큼 월급도 주면서 생활을 해 나갔지만 워낙에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시작한 공동체 생활이었기 때문에 점차 무너지기 시작해 3년 만에 광안리 생활을 마감 할 수밖에 없었다 한다.
그 이후로 이사를 아홉 번이나 다녀야 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정들었던 식구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당장 문을 닫아야 할 곤란 속에 애태웠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정착해 있는 이 마을에서도 이사를 세 번이나 다녀야 했다 한다.
부동산 투기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오르기만 하는 집세가 현재 우리들의 집 식구들의 가장 큰 걱정이다. 가뜩이나 방을 얻기가 힘든 실정인데 요즘처럼 집세가 오른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부산시에서 받은 도움은 복잡한 절차를 거쳐 대출 받은 영세민 융자금 100만원이 전부란다. 도움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가능하다면 부산시에서 시유지라도 몇 십 평 분양해 주었으면 하는 게 우리들의 집 식구들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들의 집 식구들은 처지의 동질 감을 느끼며 서로 이해하고 화목하게 웃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이 없단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자 강성도 씨는 조금 형편이 펴지면 장애우 식구들에게 각자 방 하나씩을 나눠줘서 결혼 상대가 있으면 같이 와서 살게 하고 같이 일해서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금을 똑같이 분배하고 일부는 노동력이 없는 장애우들의 생활비를 대주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장애우가 사회에 나가면 아무리 심한 장애우라도 어떻게든 먹고는 삽니다. 그런데 잠 잘 데가 없어 고통을 겪는 장애우가 의외로 많아요. 특히 우리 같은 가족이 없는 장애우들은 한 곳에 정착하는 게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공동체 생활은 구성원들 서로간의 믿음이 없으면 오래 지속되기가 힘들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의 집 식구들 사이에 갈등은 없을까? 강성도 씨 혼자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이런 물음을 던져봄직 하다.
식구들은 웃으며 아기 엄마가 무척이나 희생적이라고 말해 주었다. 마치 친삼촌을 대하듯 매사에 따뜻하게 감싸준단다. 살아가면서 사소한 갈등이 안 생길 수는 없지만 그 갈등은 보통 가정에서 늘 생길 수 있는 그런 낮은 수준의 갈등이란다.
(연락처 : 부산시 서구 암남동 622-10 12통 4반)
이태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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