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문제다 2] 장애우, 과연 우리의 이름인가.
본문
장애우, 그 이름이 갖고 있는 본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이름이 규제하는 삶의 방식은 또 무엇인가?
우리 스스로의 삶을 위한 새 이름을 찾아본다.
<이런 말을 아십니까?>
고추발이, 국둑발이, 절렁태, 뚝발이, 자춤발이..., 이런 이름을 들어 보았는가, 구수한 재담과 힘찬 춤사위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봉산이나 강령 그 흥겨운 탈 판 어느 곳에서 들었음직한 이들 이름은 그러나 탈 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전다리 곧 다리를 절름절름 저는 하지 장애우를 부르는 토박이말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풍부한 어휘로 사물이나 감정을 놀라울 만큼 다양하게 표현해 왔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토박이말에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우를 깨꼬눈이, 멀뚜강이, 외대박이, 일목장군 등으로 미묘한 차이점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표현해내고 있다.
우리말에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4천여 가지나 되며 이중 몸의 모양이나 기능과 관계 있는 말이 거의 삼분의 일이나 될 정도로 많다.
그러나 장애우들에게는 대체로 정상적이 아닌 이질적인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이", 나 "∼보"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전통적인 장애우관이 객관적으로 멸시와 조롱으로, 주관적으로는 열등감으로 나타난 것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민족 특유의 동질의식, 보편적 인간의 지향, 욕구불만의 뒤틀림, 복지제도의 부재로 나타난 이런 낮춤말들은 실은 그 배후에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모든 조건들이 담겨져 있는 시대정신의 반영인 것이다.
농경시대에 가장 필요했던 것은 격심한 육체적 노동을 감당할 수 있는 튼튼한 팔과 다리였으며 따라서 당시의 주된 생산관계인 농사일에 참여할 수 없었던 장애우들은 전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그 장애를 하늘- 당시 하늘은 절대 정의를 지닌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 내린 "벌"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벌" 이란 죄지은 사람이 받게되는 응분의 보상이므로 장애우는 곧 "죄인" 그것도 하늘로부터 버림받은 이가 되어 숨죽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그 후 사회가 점점 발전해 감에 따라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그 주된 생산구조가 바뀌게 된다.
산업사회는 잉여가치의 극대화를 위해 분업과 협업의 생산방식을 택하게 되어 노동력도 농경사회에서 필요로 했던 전면적인 육체 노동에서 벗어나 손이면 손, 발이면 발 등 각각의 숙련된 기능이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식의 진보는 항상 기술이나 지식의 발전 속도에 비해 더뎌지게 됨으로 뒤쳐진 농경사회의 의식구조와 앞선 산업사회의 기술과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뿌리깊은 집단화, 동질화의식>
더욱이 양반계급이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한 사상적 기반이 되어 조선사회 오백여 년을 지배해 왔던 유교적 사고방식의 굴절된 모습들이 부분적 기능만으로도 충분히 주된 생산구조에의 참여가 가능한 기능위주의 산업사회에서도 여전히 장애우를 생산주체, 노동주체에서 몰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 동질화의 의식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일습, 한 벌, 한 세트 등의 개념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결혼할 때 준비하는 혼수품 가운데 그릇이나 수저를 살펴보면 어떤 것들은 일년 내내 한번도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 수두룩해도 그 모든 것이 갖춰져야만 한 벌로서 대접을 받게되는 것이다.
또한 서재의 책도 수십 권의 전집에서 어느 하나라도 이가 빠져버리면 나머지 모두가 빛을 잃게 된다. 이 규칙은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에도 예외일 수가 없다. 한번도 젓가락이 가지 않는 반찬일지라도 모두 올려놓아야만 제대로 된 "한 상"이며 받는 쪽에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았다고 흡족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뿌리깊게 남아있는 집단 동질화 의식이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대다수의 "보통"사람과 다른 "이질적"인 장애우를 기존의 사회체제에 편입시키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생활양식을 규제하는 말의 힘>
말이란 실천, 활동, 생산의 관념들과 관계되는 물적 기반인 경제적 층위와 그 상부구조인 정치적 층위 그리고 경제적 층위와 정치적 층위의 모든 것을 합리화 시켜주는 이데올로기(사상)의 층위를 지니고 있는 사회 구성 체에서 사회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호의 하나로 존재하게 된다.
또한 언어는 사회발전에 따른 상호 작용과 의사소통이 사회관계의 배경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행위의 형태들이 언어적 상호과정 속에서 발전하므로 언어형태의 변화를 살펴보면 사회의 발전과정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모든 의식적인 행동 속에서 동반형식으로 필수 불가결하게 나타나며 이를 이해, 해석하는 행위를 통해 일정한 형태의 왜곡된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몇 가지 특징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항상 사용하고 있는 일상언어가 어떻게 생황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산이나 강, 나무나 돌 등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 사물의 이름은 처음부터 꼭 그렇게 불려져야만 한다는 "당위성"은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의 이름이 "우연히" 그렇게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단 생겨난 언어는 그 자체로 규칙과 구속성을 갖게된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말은 우연히 그렇게 부르게 되었지만 자기 마음대로 "람사"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 "며느리는 씨받이"라는 말은 당위성을 지닌 명제였으며 모든 며느리 등은 그 며느리라는 말이 한정 지우는 범위 즉 "씨받이"로서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의 생산자로서만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어떤 며느리가 나는 며느리지만 씨받이는 아니다" 라고 말했다고 할 때 두 문장에 쓰인 "며느리"라는 말은 같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전혀 다르며 따라서 당시의 며느리 개념에 도전했던 용감한 며느리는 사회적인 제재를 받게 되고 씨받이인 당시의 며느리로 돌아갈 것을 강요당한다.
이것은 어떠한 말이든지 당시의 사회, 경제적 역학관계에 따른 당파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가치 중립적일 수 없는 것이다.
<초월적인 말 폐쇄적인 말>
말이 지닌 당파성을 알아보기 위해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가정에서 남편의 잦은 외박으로 가정불화가 일어나게 되고 이러한 남편의 행동에 불만을 품게된 부인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외박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이 사회적인 심판을 받게될 때 남편과 부인 두 당사자가 각각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할 것이다. 가령 남편은 "나는 남자니까..." 라고 말하고 부인도 "나는 여지니까..."라고 말했다고 할 때 "남자니까..."와 "여자니까..."라는 문장은 문장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중립적이고 동등한 문장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남자의 외박은 어느 정도 허용을 하면서 여자의 그것에 관해서는 가혹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현 사회체제가 남성 중심의 사회체제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남자니까..." 라는 말속에는 자연적 조건이나 인위적 관습까지도 초월할 수 있다는 지배자적 사고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여자이니까..."라는 말은 자연적 조건이나 인위적 관습에 갇힐 것을 요구하는 포로 적이며 피 지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 부인의 행위는 "여자"라는 말이 지닌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제 제를 받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4백만의 우리를 부르는 "장애우라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를, 어떤 범위를 가지고 "불리워" 지고 있는가? 곰배팔이, 곱새...이 모든 말은 처음에는 외적인 생김새나 이질성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런 이름들이 생겨나자 이 말들은 곧 그 당시 사회가 요구하고 인정하는 사회, 경제적 활동의 범위와 한계를 지니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이다.
"장애우" 이 말은 우리 속에서 생긴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누가, 어떤 뜻으로 주었을까?
장애우라는 말이 한정 지우는 열등감, 패배감은 도대체 그 말의 어느 부분에서 오는 것일까?
장애우라는 말이 갖고있는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는 그 말이 가리키는 사람의 모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대표하고 있는 사회, 경제적 현상에서 온다. 노동현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질적인 사람.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척도인 "자본"으로부터 멀어진 사람. 따라서 "무가치한 사람",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단단히 얽힌 이 의미의 그물이야말로 장애우를 얽어매고 있는 현실적인 말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주어진 말의 의미는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것인가.
말(언어)은 그 체계 안에서 수많은 말이 죽고 또 태어나면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이다.
물론 그 사멸과 생성 그리고 변화의 근본적인 힘은 각각의 말들이 대표하고 있는 계급간의 대립과 투쟁의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상언어와 사고의 5가지 명제>
일상언어의 근본(최초의 생활양식이 언어를 만든다)
↓
사람은 일상언어로 사고한다.
↓
일상적 사고에 의해 생활양식을 갖는다.
↓
일상언어도 생활양식을 규제한다.
↓
생활양식의 변혁에서 일상언어의 수정이 온다
<말의 수정을 위해>
이미 주어진 말의 의미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어떠한 일들이 필요하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용했던 말들이 얼마나 왜곡된 표현방식인지 "가정주부"라는 말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가정주부는 결혼한 여성이 갖게되는 가장 중요한 존재양식이다. 그러나 주부라는 말에는 전혀 주체성이 없으며 남편이라는 동일체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사회 일부에서 과부를 무시하는 이유가 남편이라는 동일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부라는 단어는 결혼한 여성의 제 1차 적 존재의무나 양식으로서는 거부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가 장애우라는 단어에도 적용됨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단순히 어떤 단어를 거부하거나 폐기시킨다고 해서 그 말이 지니고 있던 사상적, 경제적, 사회적 의미의 범주마저 떨쳐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생활양식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한 폐기되거나 거부된 말은 틀림없이 동일한 의미의 다른 말로 대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장애우"라는 단어의 포로에서 해방되고자 한다면 이 단어가 부과하는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장애우가 자신의 사회, 경제적 활동으로써 개인적인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면 장애우라는 단어는 무능과 기생적 존재를 대표해왔던 지금까지의 제 1차 적 존재방식의 규제어로서는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장애우라는 말의 잠재적 의미 자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생활양식의 혁신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하며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변화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과정 또한 고통스러울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언어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역사가 오랠수록 고정관념의 틀을 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가자, 새 이름을 찾아서>
고추발이, 국둑발이, 절렁태....
이 놀랍도록 미묘하고 풍부한 우리 토박이말을 고통과 치욕으로 곰씹어야 하는 4백만의 우리가 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모양만 바꿔오면서 계속 장애우를 좌절과 생의 질곡으로 밀어 넣었던 이데올로기의 족쇄인 기존의 우리 이름을 거부하자.
인간은 그가 그 말을 이해하고 사상적 공명을 일깨워주거나 삶에 관계 있는 말에만 반응하게 된다.
진정으로 우리 장애우가 이해하고, 공명할 수 있는 삶의 새로운 이름은 무엇일까?
어설픈 인간화, 사회화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 말 뒤에 숨어있는 몰 개성화, 노예화의 실체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들이 주는 모든 이름은 결코 우리의 참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이름.
우리가 사회에게 주는 이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
이제 가자. 새 이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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