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깨걸음의 눈] 구걸하는 장애우,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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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남대문 시장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숨까지 훅훅 막히는 7월의 땡볕아래 한 팔로는 동전바구니가 얹힌 스피커를 밀고, 또 한 팔로는 땅바닥을 밀며 물결같이 오고가는 수많은 행인사이를 기어다니는 장애우, 그리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쯧쯧, 차라리 죽는게..."하며 혀를 차던 오십대의 어떤 아주머니는 행여 바구니에 손이 닿을까봐 멀찌감치 서서 백 동전 하나를 던져 넣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미아리 눈물고개 임이 넘던..." 또는 "태산을 넘어 험 곡에 가도...." 이즈음 복잡한 전철 안에서 혹은 시장바닥에서 허리 근처에서부터 타이어 조각을 덧대고 온몸을 질질 끌면서 "한푼"의 동정을 구걸하는 장애우를 심심지 않게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선언했다. "문제는 생존권이다."라고. 생존은 살아 남는다는 말이다. 생존은 또한 죽음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삶의 이름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그럴듯한 모양새와 품위를 논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한가한 일이라 하겠다.
따뜻하고 풍요로운 삶의 즐김이 아닌 거칠고 본능적인 생존의 여러 모습들.
도시 미관과 교통방해를 이유로 강제철거를 당하고 있는 영세 노점상,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행인을 유혹하는 윤락녀...
그러나 이 모든 생존의 모습 중 "구걸"만이 유일하게 교환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일방적인 요구(?)이다.
아니, 교환관계가 이루어지기는 한다. 말라비틀어진 현대인의 눈물샘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더욱 충격적이고, 더욱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의 장애를 돋보이게 하는 이들의 생존연기(?)가 혹시 그동안 줄기차게 그러나 추상적인 말로만 주장해왔던 "장애우의 동등한 사회참여라는 각종 선언이나 성명서의 허구성을 정면으로 맞 받아치는 도전의 증거가 아닐까?
우리가 여의도에서, 명동에서 전경에게 무수히 얻어터지고 짓밟히면서 쟁취하고자 했던 사람대접이 "쯧쯧..." 혀차며 던지는 백 동전 소리에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일까?
거스를 수 없는 민주화의 대세에 따라 그동안 장애우를 기만해 왔던 각종 법률이나 제도를 개정하거나 새롭게 만들기 위해 전국의 장애관련 단체나 시설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애사회의 일들이 아직은 충분히 사회화되지 못하고 더욱이 절대 다수의 흩어진 재가 장애우들 마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몇몇 단체나 기관의 내부의 범위에 한정되고 있는 것 또한 현재의 상태이다.
따라서 장애문제의 사회화는 필연적인 과제이며 이를 위해 다각적인 홍보전략 및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구걸하는 장애우는 가뜩이나 왜곡된 장애우 관을 "동정이나 혐오"라는 양극단의 대상으로 완전히 붙박아 두는 생생한 체험의 전달자가 되고 있다.
이는 갈 데까지 다간 사이비 복지정책의 허구성이 심각한 지경에 다 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보도를 통해 알고 있듯이 일부 복지원은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가 되어 장애우들이 그러한 시설에의 수용을 거부함은 물론 수용이 되더라도 탈출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우선 눈에만 띄지 않는다면 이들 장애우가 사이비 복지시설에서 매를 맞던 병이 걸려 죽던 알 바 아니라는 식의 무조건적인 수용위주의 정책이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자신의 장애를 상품화해서 먹고 살아야하는 장애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항간에는 이들의 수입이 꽤 짭짤하다는 (그래서 해 볼만 하다는?)한심한 얘기도 떠돌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보라! 과연 어떤 사람이 길 바닥을 기며 남의 발 밑에 몸을 던지고 싶겠는가.
바구니에 쌓이는 동전 한 닢 한 닢들은 이들에게 밥이며 고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무너져 내리는 인간성의 상실을 나타내는 것이며, 육체의 장애보다 더 무서운 정신의 장애-배부른 노예-를 강요하고야 마는 독약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인 법이나 제도의 개정과 더불어 지극히 현실적인 "현상"의 개선 또한 시급한 일이다.
"구걸"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그들에게 여전히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우리가 그 모양이 추하고 더럽다고 탓해야 하는가.
밥을 위해 개, 돼지의 밥이 아닌 사람의 따뜻한 밥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리도 없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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